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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두더지

2004.06.25 22:3406.25





lemontree@hotmail.com소년만 길을 떠나냐, 두더지도 떠날 수 있다!
두더지가 찾는 구도의 길


판타지는 기본적으로 성장 소설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하이 판타지들이 선과 악의 운명의 결전지에서 성장해 가는 소년 혹은 드물게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이 판타지란, 대부분이 오해하듯이 엄청난 순도의 최고급 하이엘프 같은 귀족이 나와 설치는 명작 판타지가 아닙니다. 하이 판타지는 선과 악이 세계를 두고 벌이는 운명적이며 치열한 싸움을 배경으로 하는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를 이르는 서브장르명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판타지 팬(혹은 팬이라고 주장하는 떨거지)들은 고귀한 혈통의 운운하는 사람 혹은 엘프 같은 것만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소개하려는 책은 동물이 주인공으로 해서 펼쳐지는 애니멀 에픽의 삼대 명작 중 하나인 <덩튼 숲Dunton Wood>입니다.
   일단 저 위에서 사용한 애니멀 에픽이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 알아보죠. 애니멀 에픽Animal Epic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쓰는 판타지들을 가리키는 장르명입니다. 에픽은 영웅의 업적 등을 노래한 서사시로 애니멀 에픽이라고 한다면 동물 주인공이 영웅이 되기 위한 험난한 모험과 여정 등을 통해 영웅이 되는 이야기인 셈이겠지요. 따라서 이솝 우화 같은 우화랑은 목적에서부터 다릅니다. 좀더 다른 점을 살펴보면, 애니멀 에픽은 동물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동물의 특성을 잘 살려야 합니다. 따라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거의 사람과 비슷하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을 하나, 좀더 동물적인 관점에서 자연을 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2차 세계Secondary World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화에서 이 장르는 인기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비어트리스 포터의 <피터 래빗>도 넓게 보자면 애니멀 에픽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애니멀 에픽이라는 장르에는 삼대 명작이 있습니다. 토끼가 주인공인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쉽 다운>, 브라이언 자크의 귀여운 쥐들이 나오는 <붉은벽 시리즈>,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려는 <덩튼 숲>입니다. 이 책은 국내에는 <두더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치사하게 두꺼운 한 권을 세 권으로 분철하는 만행을 저질렀지요. 역자는 일어중역으로 유명한 정성호 씨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정성호 씨는 역시 삼대 애니멀 에픽 중 하나인 <레드월>의 첫권도 번역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세요. 두더지가 철학적이면 얼마나 철학적이겠고, 감동이 있다면 얼마나 감동이 있을까요. <엄지공주>에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햇빛을 싫어하는 부자 영감으로 나왔던 그 두저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 <덩튼 숲>의 내용에 대해서는 상상이 잘 안 갈 겁니다. 그런데 저는 남들이 최고로 꼽는 <워터쉽 다운>보다, <붉은벽 시리즈>보다 이 <두더지>를 읽고 더욱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두더지가 살면 얼마나 살고, 모험을 겪으면 얼마나 겪고, 생각하면 얼마나 생각하겠는가! 과연 두더지의 삶에 감동이란 있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 있는 그 진한 감동은 진국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인공은 덩튼 숲에 사는 두더지 일족 중 젊은이들인 브렌튼과 레베카입니다. 브렌튼은 평범하게 태어났으니 타고난 호기심으로 땅굴 여기저기 파고 들어가는 예민한 청년입니다. 레베카는 두더지 일족의 지도자의 딸로 태어나 애지중지 자라난 고명딸로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하잘것없는 브렌튼과 고명딸 레베카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로미오와 줄리엣> 못지않은 닭살돋는 연애씬과 둘의 사랑을 막는 많은 험란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당연히 레베카의 아버지는 이 둘의 사랑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딸을 강간까지 합니다. 레베카와 브렌튼은 헤어지고 이 둘은 서로를 찾아 헤매며 수많은 모험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서로 각자 성인이 되어가고 정신적인 구도의 길을 찾게 됩니다.
   이들의 역동적인 삶과 사랑, 그리고 복수와 구도의 길이 마치 인간세상처럼 보여집니다. 이 소설은 시점이 사람이 아니라 두더지라는 점에서 상당히 독특하며, 또 시종 그 시점을 잃지 않고 섬세하게 쫓아가는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땅을 뚫고 다니고, 큰 동물을 두려워하며, 파헤치기 좋은 흙과 싫은 흙을 구별하며, 전에 누군가 파놓고 잊은 굴을 찾는다거나 하는 두더지의 일상생활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이런 아기자기하고 쏠쏠한 묘사 덕에 이 소설이 더욱 재미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두더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의 강렬함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서를 다른 동물의 시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범하게만 보였던 브렌튼이, 일족 수장의 가장 사랑받는 딸인 레베카와 사랑하면서 서로 가슴 아픈 이별을 겪고, 실수와 성찰 끝에 정신적인 열반의 경지에 다다르는 과정은, <워터쉽 다운>이나 아동물인 <붉은벽>은 결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두더지가 사는 아주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두더지의 눈으로 보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아주 독특합니다. 역시 엘프의 삶도 다른 것 같지만 결국 엘프도 인간의 한 단면이라고 톨킨이 엣세이에서 밝혔듯이 두더지도 우리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소설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듯이, 이 소설 속의 두더지들 속에서 우리 인간의 한 모습을 본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덩튼 숲>을 최고로 치는 애니멀 에픽이자 굉장히 강렬한 소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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