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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

2004.02.27 23:0202.27





Filia@hitel.net주의!
이 글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에 대한 엄청난 스포일러들이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아랑곳하지 않는 분들만 읽으세요.






배경은 일본의 개화기.
   신경쇠약 증세를 가진 젊은 시인 마사키. 그는 그 신경쇠약 증세를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도중에 불가사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서양풍의 차림새의 여인의 대화, 죽어버린 무사 혹은 광기에 휩싸인 늙은 남자와의 대화, 그리고 붉은 반점을 가진 나비와의 조우.
   그는 그 과정을 거쳐 산속에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던 그는 독사에 물려 사경을 헤메다 한 노승에게 구원 받는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고열에 시달리는 그를 간호하던 노승은 자신의 이름이 엔유라고 밝히고 그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산사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한다. 다만 그는 산사 근처의 암자에는 접근하지 말라고 한다. 그곳에는 나병을 앓고 있는 노파가 있다면서…….
   그러나 처음 그가 이곳으로 오게 한 계기를 만든 서양 차림새의 여인을 다시 만날 기회를 놓칠 것을 조바심을 내고 빨리 산사를 떠나고 싶어한 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산사에서 조용히 요양을 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꿈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게 되면서 계속 산사에 머물 핑계를 만들려 한다.
   처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엔유는 그가 완전히 회복하게 되자 그에게 산사를 떠나줄 것을 요구한다.
   꿈속의 그 여인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게 된 마사키는 산사를 떠나기 싫어하고 그 여인과의 만남을 위해 잠을 자지 않고 산사 안을 헤맨다. 그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달빛에 젖어 요요한 빛을 발하는 꽃들 사이로 난 길을 통해 암자로 몰래 들어간다.
   그 암자에서 그가 본 것은 나병에 걸린 노파가 아니라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움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의 꿈속에서처럼 목욕을 마치고 핀을 떨어뜨렸고, 그 순간 그가 꿈에서 깨어날 때처럼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엔유 선사가 그의 눈을 가려버린 것이다.
   엔유는 아무런 말도 않고 그에게 산사를 떠날 것을 종용하고 화가 난 마사키는 그에게 폭언을 퍼붓고 산사를 내려온다.
   그가 산사를 떠나오는 순간, 그는 독사의 물리기 직전의 장소로 돌아오고 그는 다 나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는 우연히 산속을 배회하던 사람에 발견되어 여인숙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그 아름다운 여인 도카코의 어머니 도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겁탈당해 실성해 뱀의 아이를 가졌다고 떠들던 그녀가 도카코를 낳고, 젊은 나이에 죽은 뒤 그녀의 부모는 도카코를 기른다. 우연히 여인숙에 들린 승려 하나는 그들에게 도카코의 눈에 살이 끼었다고 하고, 정말 그 말처럼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불행한 죽음을 맞자, 그들은 그녀의 눈을 가린 채 아이를 키운다.
   저주받은 아이란 뒷소문 속에 자라나던 도카코는 개화기 일본의 탄불 정책을 피해 산속을 떠돌던 엔유에게 인도되어 산에서 자라나게 되었다고 한다.
   도카코의 슬픈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마사키는 더 걷잡을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한번이라도 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산으로 뛰어 들어간다.
   산속을 헤매다가 그가 뱀의 물리기 전, 그 이상한 장소로 들어간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끼며 어느새 자신이 그 산사로 돌아와 있음을 발견한다. 도카코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암자로 달려가 도카코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고백한다.
   처음 그에게 불운이 내릴 것을 우려해 그의 사랑을 완강히 거부하던 도카코도 그의 진심을 알고 마침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중독되어 자신이 하룻밤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마사키는 그녀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갑자기 그곳에서 중단되고 다음날의 상황으로 바뀐다.
   피를 흘리며 죽어버린 도카코는 엔유 선사에게 발견되고 그는 죽은 그녀를 안아 올려 암자 밖으로 나온다. 그때 그의 뒤로 피 묻은 백발이 떨어지고, 그녀가 흘린 피에는 그 붉은 반점의 나비가 앉는다.

   마치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다. 아니면 지독할 정도로 낭만적인 일본 연애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전작 [일식]이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작품에는 동양적인, 아니 일본적인 서정이 물씬 풍겨난다.
   단지 한 젊은 시인의 죽음에 얽힌 전설 같은 몽유담에 지나지 않을 이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경지에까지 올린 것은 히라노의 유려한 문체와 감성이다(그래서 이미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모두 까발린 상태에서도 그 문체와 감성을 직접 맛볼 것을 적극 권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난해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난해함에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는 것은 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다음 장을 읽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일식]에서는 “불가사의한 연금술사가 밤에 몰래 동굴로 출입한다”란 소문을 통해 독자에게 그가 왜 그곳으로 출입하는지 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는 소설 상에서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그 수수께끼에 대한 복선을 제공한다. 달에서는 그가 여인의 꿈을 꾸기 전에 밤에 폭포 소리를 듣는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그 문체의 아름다움과 그가 그려내고 있는 공간적 배경의 신비로움을 쫓다보면 어느새 이 몽유담이 지닌 소름끼치는 그러나 슬프도록 아름다운 반전과 결말을 읽게 되는 것이다.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그의 대단한 필력과 연출력 에 감탄을 하면서도 이것이 신인이 어쩌다가 써낸 명문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달]을 읽은 지금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역량을 지닌 작가인가를 실감하고 있다.
   벌써부터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것은 그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장면 위로 펼쳐지던 반전의 쇼크와 몽롱한 낭만성 때문이다. 그는 낭만을 그려내되 천박하지 않게 그 낭만을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이다. 마치 그의 소설 속의 시인 마사키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 소설이 가진 한 가지 단점은…….
   그가 과연 어디까지가 죽어가는 마사키의 꿈과 도카코의 꿈 얽혀 들어가는 지점인지, 또 왜 그들의 의식이 그렇게 한 순간 신비의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있었는지가 설명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무용한 트집 잡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난초를 그린 동양화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고개를 떨구는 필치처럼 유려한 그의 작품에서 그가 다른 작가들도 흔히 사용하는 트릭을 독자들에게 썼다고 해서, 또 아름다운 환상에 사로잡혀 마사키와 도카코의 관계에 어떤 개연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그의 소설을 트집 잡을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랑에 어떤 이유가 필요하냐는 질문과도 같은 이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 그의 환상적이고도 낭만적인 이야기에 한동안 모든 것을 잊고 취하도록 해주게 한 작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방법도 아닐 것이다. 누구라도 그의 소설 [달]을 읽게 되면 그 소설이 지닌 마력에 사로잡혀 버릴 것이다. 마치 내가 휴일 지하철 4호선의 시끄러운 나들이 인파 속에서 정신없이 일본 개화기의 한 산 속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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