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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pe.krjay@jay.pe.kr

열여섯 번째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에 서른아홉 편의 단편을 싣기 위해 윈들링과 대트로우는 서른 가지 책과 잡지를 뒤졌습니다. 그냥 ‘서른 권’이라고만 해서는 썩 많다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실제로 일 년 동안 뒤적였을 책이며 잡지의 양을 곰곰 생각해 보면 아찔해요. 잡지 하나만도 일 년이면 적게는 여섯 호, 많게는 열 두 호나 되고, 꼼꼼히 찾는 사이에 탈락해 버린 출처도 있을 테니까요. 두 편집자의 열성은 다른 연간 걸작선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데이빗 하트웰과 카트린 크래머는 [Year’s Best Fantasy]에 열다섯 가지 책/잡지에서 스물 아홉 편을 추려 실었고, 하트웰 & 크레머, 윈들링 & 대트로우 콤비에 밀린다는 평을 듣는 후발 주자 로버트 실버버그와 카렌 하버가 [Fantasy: The Best of 2002]에 골라 넣은 열한 편은 그 중 자그마치 일곱 편이 [매거진 오브 판타지 & 사이언스 픽션](The Magazine of Fantasy & Science Fiction, 이하 F&SF)에 실렸던 글이었거든요.* 이 넓은 선택의 폭은 단순히 편집자들이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 이상이랍니다. 이들이 ’환상문학’과 ‘공포문학’을 얼마나 넓게 정의하는지를 보여주죠. 소설 서른아홉 편 외에도 시를 열세 편, 덧붙여 에세이까지 한 편 포함한 점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네요.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읽으며 ‘어? 이런 것도 판타지라고 하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가 있는 것도, 여기에 실린 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환상소설가’가 아니라 ‘시인’, ‘비평가’, ‘과학소설 작가’ 등으로 정의내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요?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의 2권을 여는 영국 작가 애덤 로버츠도 환상소설가이기에 앞서 과학소설가이고, 또 그에 앞서 비평가에요. 게다가 [옥스포드 작가 소개: 디킨스]나 [낭만주의 및 빅토리안 장시(長詩)에 대해]같은 책을 썼답니다! 그렇다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착안하여 쓰여진 깔끔하고 솜씨 좋은 풍자소설 {스위프틀리}가 환상소설 독자들에게 낯설 글은 아니에요. 오히려 거인과 소인, 프랑스와 영국이 공존하는 환상 세계를 엮어내어 환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운가, 그리고 환상의 본질은 때로 얼마나 현실적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하게 하지요.



▲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 2권.

   크리스토퍼 파울러의 {녹인}은 케이트가 부부관계도 개선하고 논문도 마무리하기 위해 의처증세를 보이는 남편 조시와 함께 말레이시아 쪽의 작은 섬에 가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었어요. 남편은 모든 남자, 아니 숫놈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케이트는 그런 남편을 이해하지 못해요. 결국 일어나는 파국. 이 단편은 마찬가지로 유인원류와 인간 사이의 만남을 그린 커렌 조이 파울러의 {내가 보지 못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굳이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차이라고 말할 부분은 아니지만요.

   무시무시한 단편 {하이즈}를 쓴 제이 러셀은 끔찍하고 선명한 폭력성으로 논쟁에 휘말렸던 작가에요. 런던에서 살고 있지만 본래는 미국 출신으로, 작가로 등단하기 전에는 로스앤젤레스 탐정 사무소에서 일했답니다. 그 때문인지 러셀의 글에는 탐정소설 같은 긴장감, 공포/범죄가 다가오는 듯한 긴박함이 살아있어요. {하이즈}도 물론 그렇고요. 그는 {천상의 개들}을 쓴 후 어째서 탐정소설이 아니라 공포/환상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죠. ‘저는 공포/환상문학이 허락하는 무한한 상상의 폭을 좋아합니다. 생각만 하면 쓸 수 있다는 점이요.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은 흔히 장르소설을 한정적이고 공식화되었다고 폄하하지만, 여기에는 클래식 재즈처럼 오래된 소재에서 새로운 흐름이며 즉흥성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어요.’ (2001, TWbooks와의 인터뷰)

   {멘도사 씨의 붓}은 이 걸작선에 딱 세 편 있는 비영어권 출신 작가 중 하나입니다(첫째는 1권에 실렸던 조란 지브코비치, 둘째가 바로 이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셋째가 영미권 독자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친숙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죠). 멘도사 씨는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거침없이 쏘다닙니다. 여자를 훔쳐보던 사내아이 얼굴에 ‘나는 음탕하다’라고 휘갈기고, 도로 표지판에 ‘백 킬로미터 이내에 지적인 생명체 없음’이라고 꼼꼼히 써넣으면서요. 멘도사 씨의 온갖 명언부터 끝이 활짝 열린 마무리까지, 개운하고 기분좋은 단편이에요.

   로빈 매킨리의 {사막의 연못}은 제가 이 걸작선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글입니다. 로빈 매킨리라는 작가에 대해 관심이 없어, ‘이 글은 이러저러하겠구나’ 하는 생각 없이 무심히 읽기 시작했기에 더 놀랐죠. hermod님이 지적하셨듯이 단편집에는 수많은 세계관과 설정이 들어 있고, 그렇다 보니 가끔은 전혀 준비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세계에 온 마음이 사로잡히는 경험을 하기도 해요. 버스 한쪽 구석에 앉아 책을 읽던 제게 다마르의 모래바람이 몰아쳐 왔던 것처럼요. 지긋지긋하고 끝없이 단조로운 일상에도 끝내 시들지 않은 헤타의 모습, 그리고 침침할지언정 따뜻함은 버리지 않는 서술……. ‘내가 글을 읽을 줄 알아서, 그리고 이 장르를 좋아해서 정말 행복하다’는 충만감을 안겨주는 흔치 않은 단편 중 하나였어요.

   {먹는 자와 먹히는 자}는 1권 리뷰에서 언급했던 ‘닐 게이먼 표 깔끔한 공포소설’이랍니다. 만화와 영상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작가답게 짧은 글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미지는 ‘깔끔함’과 ‘공포소설’이라는 말의 어울림이 낯설어 보일만큼 칙칙하고 섬뜩하지만요.

   {가장 낮은 패}는 대호평을 받은 중편으로, 세계환상문학상 후보작이기도 해요. ‘슬기로운 개미’ 연작으로 명성을 얻은 어머니가 물려준 ‘고독의 집’에 혼자 살던 문신예술가 아이비는 어머니를 만나러 육지로 나간 길에―――고독의 집은 섬에 있어요―――교회 바자회에서 일 달러짜리 타로카드 세트를 하나 샀다가, 낡고 허름한 패들 사이에서 환상적인 그림이 그려진 두 장의 카드를 발견합니다. 카드세트에는 ‘가장 낮은 패’라고 휘갈겨 쓴 종이도 들어있어요. 더 이상 말하면 아직 이 글을 안 읽은 분들께 폐가 되겠죠? 엘리자베스 핸드는 세계 공포소설 협회상,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 등을 수상했고 페미니즘 성격이 분명한 환상소설부터 스타워즈, 엑스파일 타이-인 소설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며 꾸준히 활동해 온 중견 작가에요. [애나 앤 킹(Anna and King)], [12 몽키즈(12 monkeys)]같은 영화의 소설화도 맡았죠. 이런 영화/만화/드라마의 소설판을 쓰는 작가들은 실력에 비해 폄하받기 쉽고, 그에 앞서 작가 자신이 신인 때의 빛나던 창작력을 잃고 아쉽게 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엘리자베스 핸드는 도리어 소설판을 영화보다 재미있게 만드는 기분좋은 예외 중 한 명이랍니다. 참, 그리고 498페이지에 나오는 [보지 독백]은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랍니다. 처음에 보고 뭔지 고민했거든요.

   돈 투마소니스의 {그림 우편엽서}, 스티븐 갤러거의 {죽은 소녀의 노래}, 니콜라스 로일의 {숨바꼭질}등은 앞에서 소개한 {하이즈}나 {먹는 자와 먹히는 자}처럼 공포소설이랍니다. 우연이겠지만 걸작선 2권은 1권보다 공포소설의 비중이 훨씬 높아 읽기가 꽤 힘들었어요. 피투성이 이미지를 잘 잡아내는 글도 무섭지만, 그보다도 무서운 건 일상에서 반쯤 감추어진 공포의 꼬리를 섬뜩하게 드러내는 글입니다. 시골 독창 대회가 배경인 {죽은 소녀의 노래}나 너댓 살 아이들의 숨바꼭질을 소재로 삼은 {숨바꼭질}이 리뷰를 쓰는 지금까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거에요.

   이 걸작선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닙니다. 때로는 너무 새롭고, 때로는 너무 강하고, 또 때로는 너무 날카롭지요. 그렇지만 바로 그 낯선 경험이 우리에게 장르를 넘어 문학을 보고, 문학을 넘어 삶을 바라보게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의 현실에 대해 쓰이지는 않았을지언정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박고 선, 이 환상문학의 경이로움을 맞아들이고 변화하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겠지요.


* 참고 자료 Gary K. Wolfe (Locus 2003년 8월호)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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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04.01.31 13:39 댓글 수정 삭제
    확실히 읽기 쉬운 책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낮은 패가 대호평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저는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 지 감이 잘 안오더군요..
    하루끼도 좋아하는 작가인데.. 타이는 좀 갸웃했고요..
    전 멋진 징조들을 그닥 재밌게 보지 않아서 먹는 자와 먹히는 자도 별 생각없이 읽었지만...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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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odern 04.02.10 01:38 댓글 수정 삭제
    전 2권이 1권보다 훨씬 낫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