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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에서 앨런 대트로우와 테리 윈들링의 [The Year’s Best Fantasy and Horror]를 낸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런 책을 낸다는 것은 황금가지처럼 장르문학 시장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출판사에게도 상당한 모험이리라고 생각했거든요. 독자 입장에서야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접하고, 현대 환상문학에 대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귀한 기회이지만,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독자들이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단편을 읽기 위해 지갑을 열어주길 바래야 하니까요. 반신반의하는 사이에 정말로 나온 이 책은,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이라는 복잡하고 거창한 제목을 단 멋진 양장본이었습니다. 2002년에 발표된 작품을 모아 2003년에 출판된 책이 2004년이라는 제호를 달고 나온 점을 애교로 보아 넘겨도 좋을 만큼요.

   세인트 마틴 출판사는 크게 두 가지 걸작선을 매년 출판합니다. 이번에 딱 스무 해 째가 된 가드너 도조와의 [The Year’s Best Science Fiction](이 중 열여덟 번째가 [21세기 SF도서관]이라는 제목으로 시공사에서 나왔습니다)과 앨런 대트로우, 테리 윈들링의 [The Year’s Best Fantasy and Horror]가 바로 그 두 권이죠. 둘 다 로버트 실버버그, 데이빗 하트웰 등 다른 편집자들이 내어 놓는 걸작선을 제치고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답니다.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은 [21세기 SF도서관]을 기획했던 짐 프랭켈(Jim Frenkel)의 작품이었습니다. 환상과 공포를 아우르는, 말하자면 [21세기 SF 도서관]의 판타지 버전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죠. 앨런 대트로우와 테리 윈들링을 편집자로 선정한 것도 짐 프렝켈의 공이었어요. 두 사람은 이전까지 한 번도 같이 일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관심 분야도 달랐거든요.



▲ [21세기 SF 도서관]으로 국내에 소개된 [The Year’s Best Science Fiction: Eighteenth Annual Collection](왼쪽), 그리고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 1, 2권으로 소개된 [The Year’s Best Fantasy and Horror: Sixteenth Annual Collection].

   “우리는 가벼운 호러나 어두운 환상문학처럼 취향이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팀이 되었죠. 하지만 앨런은 공포문학에 대해 저보다 많이 알았던 반면, 저의 지식은 환상문학과 민속 신화 쪽에서 더 넓었어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걸작선에 꽤 다양한 느낌의 작품을 담을 수 있게 되었죠. 제인 욜렌(Jane Yolen)은 자기 소설 제목을 따서 우리를 ‘빛과 어둠의 자매’라고 불렀답니다.”
(테리 윈들링 인터뷰, ‘로커스’지, 2003년 10월)

   테리 윈들링의 말대로, 이 걸작선을 유심히 살펴보면 누가 선택한 작품인가만으로도 글의 성격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답니다. 고전적 환상을 담아낸 {아퀘로}나 자연 친화적인 성격이 뚜렷한 {녹색 말}같은 작품은 윈들링이 고른 것이죠. 섬뜩한 광기가 느껴지는 {제이코브 박사의 조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대트로우의 선택이고요.



▲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 1권.

   1권에 실린 스물여섯 명의 작가들은 현대 영미권의 환상 문학을 이끌고 있는 대가들이랍니다. 어쩌면 이렇게 잘 골랐나 싶을 만큼 수준이 고르죠.

   첫 작품, {달래기}의 켈리 링크는 데뷔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비틀린 공포/환상/과학 소설로 일찍부터 인정받았어요. 이름이 같은 두 여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그린 {루이스와 루이스}로 2001년 네뷸러상을, ‘눈의 여왕’ 동화를 페미니즘적으로 각색한 {눈의 여왕과의 여행}으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상을 수상했지요. 켈리 링크의 글은 대부분 현실에서 살짝 엇나간 여성의 시각을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답니다. 취향에 따라서는 정말 못 읽겠다 싶을 만큼 특이하기도 해요. 저는 처음 {루이스와 루이스}를 네뷸러 쇼케이스 북에서 읽었을 때, 너무 기괴하고 기막힌 나머지 ‘이 사람 글은 절대 돈 주고 안 산다’고 생각했다니까요. 결국에는 그 끈끈한 매력을 이기지 못하고 단편집까지 사 버렸지만요. 켈리 링크는 내년부터 개빈 J. 그랜트와 함께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의 편집을 맡는답니다. 테리 윈들링이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이 책을 그만두면서 추천했어요. 켈리 링크의 색깔이 들어간 걸작선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군요.

   {응시}를 쓴 차이나 미에빌은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영국 작가에요. 여기 실린 {응시}는 어린아이를 화자로 선택하여 미묘한 상황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죠. 번역이 미에빌 특유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전혀 살려내지 못하여 무척 안타까웠어요.

   {녹색 말}과 {창조} 두 편이 실린 제프리 포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환상문학작가 중 한 사람이랍니다. 특히 {창조}는 생명, 사랑, 가족, 자연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무수히 던져 주는 명작이지요. 테리 윈들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소개했지만 사실은 이후 발표된 세계환상문학상을 탔어요. 포드가 ‘카프카적이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해요.

   조란 지브코비치는 이 책에 소개된 몇 안 되는 비영어권 작가 중 한 사람이에요. 영미권에만 환상문학작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장르의 움직임을,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자금을 주도하는 것이 영미권―――특히 미국―――의 출판 시장이다 보니 실제로 비영어권 작가가 소개되는 경우는 무척 드물어요. 지보코비치도 몇몇 편집자들이 꾸준히 소개한 덕분에 이제야 이름을 알리고 있으니까요. 최고의 바이올린을 만든 명인이 자살하자 남은 제자는 바이올린 제작을 그만두고 술꾼이 되지요. ‘바이올린 명인’은 왜 죽었을까요? 그리고 바이올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걸작선에는 시도 여러 편 실렸지만, 번역으로 운을 살리기가 쉽지 않다 보니 줄거리가 분명한 단편만큼 인상을 남길 만한 작품은 별로 없죠. 코리 막스, 트리시나 잭슨애덤스 같은 작가는 장차 단편으로 다시 소개가 되길 바래요. {헨젤, 회고, 또는 소아 비만의 위험성}을 쓴 톰 디시는 뉴웨이브를 주도한 과학소설 작가랍니다. 6, 70년대에 분노와 냉소, 허무한 그로테스크로 가득 찬 날카로운 걸작을 여럿 발표했어요. 하지만 여기 실린 작품에서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아요. 한때는 성나서 장르소설계를 이리 저리 뒤집고 다녔지만, 80년대 중반 이후 갑자기 훨씬 부드러워졌거든요. 래리 맥카페리는 80년대 말에 그와 인터뷰한 후 ‘일에서나 사생활에서나 행복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커렌 조이 파울러는 과학소설/환상소설/로맨스(!)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랍니다. 로맨스 쪽에서는 필명을 써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고, 대학 시절부터 가졌던 간디, 중국, 일본 등에 대한 관심이 작품에서 종종 드러나지요.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도조와의 SF 걸작선에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과학소설적인’ 글이에요(여담이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의 소개에 ‘공상과학 소설의 요소’라는 표현이 있어 한참 웃었죠). 혹여 예전에 나온 [세계여성소설걸작선]에 실린 {호수는 인공물로 가득 차 있었다}를 기억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내가 보지 못한 것}은 거미 연구를 하는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난 여성을 화자로 하여 여행 중에 일어난 일을 쓰고 있어요. 저는 {호수는……}보다 같은 책에 있던 어슐러 K. 르 귄의 {정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떠올랐어요.

   닐 게이먼은 [멋진 징조들]로 우리나라에서 이미 꽤 인기를 끈 작가에요. [멋진 징조들]의 유머는 사실 테리 프랫챗의 색깔이 강했어요. 게이먼은 그런 식으로 웃기는 작가는 아니거든요. 오히려 깔끔한 공포소설 쪽이죠. {구두상자에서 발견된 일기로부터}도 [멋진 징조들]과는 아무 공통점이 없는 닐 게이먼표 글이랍니다.

   마지막을 장식한 램지 캠밸은 영국의 공포소설 거장이에요. 유명한 신인이나 자리잡은 중견이 아닌 진짜 거장이요. 경계에 서지 않은 확실한 ‘공포’소설로 70년대 중반부터 영국환상문학상을 비롯한 공포소설 관련 상을 수없이 탔어요. 오직 공포 소설 하나에 집중하여 일관된 작품 세계를 보이는 작가랍니다.

   이 외에도 여기 실린 작가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하자면 끝이 없어요. 램지 캠밸과 같은 영국 작가인 킴 뉴먼({이집트 거리})은 비평과 연극 분야에서 데뷔하여 영상과 글을 넘나들고 있어요. 콘래드 윌리엄스({기계})는 영국 평단에서 에드거 엘런 포를 잇는 작가라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고요. M. 셰인 벨({시부르의 탑들})은 [스타워즈] 같은 타이-인 소설을 쓰기도 한 과학소설 작가랍니다. 좀 뜻밖이죠?

   다음 호에서 2권들 다룰 예정이니 총평은 좀 더 뒤로 미루고, 이 글을 맺기 전에 번역에 대해서만 간단히 한 마디 하고 싶어요. 실망스럽거든요. 물론 번역자도 취향과 문체가 있고 스물 여섯 명이나 되는 작가 중에는 번역자와 더 잘 맞는 글, 덜 맞는 글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점을 다 감안하더라도 마무리가 거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답니다. 홈즈 전집에서 보여준 백영미씨의 번역을 생각해 보면 8월 중순에 나온 책을 3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번역, 출판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니까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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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rmod 03.12.30 12:33 댓글 수정 삭제
    단편집을 열어본다는 건, 사실 두려운 행동입니다. <<플레이보이 SF단편선>>(?)을 읽으면서 계속 그런 생각을 했죠. 매번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설정을 몸에 익혀가야한다는.

    그런데, jay님은 글을 얌전하게 쓰시는군요^^ 최근의 온오프라인 독서에서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 글에서 느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