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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길가메쉬 서사시

2005.03.26 01:4003.26




정원사 (gardener_77@hotmail.com)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2003년 초여름 거울이 막 문을 열었을 때, 신화서적 리뷰를 쓰기로 하고 바로 떠올린 책이 세 권 있었다. 하나같이 신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저작인 동시에 “재미있다”는 점에서도 빠지지 않는 책이었다. 첫번째는 1호에서 쓴 [황금가지], 두번째는 4호에 실은(그리고 8호에서 hermod님도 다루신) [캠벨]……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지금 소개할 책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김산해, 휴머니스트, 2005년 1월)다.
   현재까지 실체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신화(최소한 4800년 전에 이미 완성된).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내용. 모든 영웅신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이야기(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도 길가메쉬 신화의 비중이 크다). 수많은 신화학 서적에서 인용하는 신화. 반드시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제까지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지 못한 것은, 그 시점에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2000년에 다시 나왔던 범우사판 [길가메시 서사시](N.K 샌다스, 이현주 옮김, 범우사, 2000년 6월)도, 심지어 부분적인 줄거리나마 싣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테오도르 H. 가스터, 이용찬 옮김, 대원, 1994년 6월)마저 품절 상태였다. 구하기 어려운 책을 소개한다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그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쉬움을 접었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올 1월, [길가메쉬 서사시]가 새로 출간되었다―――그것도 앞에 거론한 두 책이 외국 학자가 쓴 책을 옮긴 일종의 중역본이었다면 이번에 나온 책은 수메르-악카드어를 읽을 수 있는 저자가 점토판에서 한글로 직접 옮기고 주석과 해설까지 단 판본! 칼라로 도판을 넣고 양장본으로 만들어서 값은 비쌌지만 사지 않을 수 없었고 사서 읽으니 과연 그 값이 아깝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샀던 판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조금은 더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사고 나서야 친구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쨌거나 후회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앞으로도 신화 서적 리뷰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밟아야 할 산이기에, 이미 적지 않은 관심을 모으고 있고 좋은 서평이 많이 나온 것을 알면서도 다시 이 책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통칭 [길가메쉬 서사시]로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악카드어로 쓴 열두 개 점토판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수메르 도시국가 우루크의 왕이며 3분의 1은 사람, 3분의 2는 신인 영웅 길가메쉬에 대한 찬사로 시작하는 이 서사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의 중심은 신들이 길가메쉬의 맞수이자 짝패로 만들어준 ‘엔키두’다. 엔키두를 만난 길가메쉬는 그와 함께 숲지기 훔바바를 죽이고, 하늘의 황소를 없애는 등 모험을 벌이지만 결국 이들의 거칠 것 없는 행진은 엔키두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후반부는 엔키두의 죽음으로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괴로움을 알게 된 길가메쉬가 영생의 비밀을 찾아 떠나지만 결국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우르크로 돌아가서 죽음을 맞는 내용이다. 범우사판 [길가메시 서사시]의 저자 샌더스는 거의 이 서사시를 풀어놓는 것만으로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책은 구성이 사뭇 다르다. 열 두 서판을 기본으로 하여 악카드어에서 직접 해석한 서사시가 본문을 이루는 것은 같지만, 사이사이에 더 오래 전에 쓰인 수메르어 판본의 내용을 보충했다. 소실된 단어나 문장은 비워두되 저자의 추측을 따로 적었으며, 표현도 현대식으로 바꾸지 않고 일일이 적되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수메르어와 악카드어 원문과 음역을 첨부했고,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유물들의 사진을 끼워넣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책 앞(1부 최초의 신화, 그 탄생의 비밀)에는 19세기에 들어서야 ‘수메르어’라는 고대어를 발견하고 이를 해석하기까지의 역사적인 과정을, 책 뒤에는 저자 본인의 감상(3부 비극의 전주곡, 죽음의 공포)과 더불어 이제까지 발견된 여러 점토판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수메르 신들의 계보와 창세신화(4부 황금시대의 전설, 부록 연표)를 함께 수록했다.
   원문 해석과 별도로 저자가 특히 힘을 싣는 부분은 길가메쉬 서사시를 비롯한 수메르 신화가 말 그대로 “최고(最古)”의 신화이며,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문명권은 모두 그 영향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구약성서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 쓰인 히브리인들의 창세기 “베레쉬트” 같은 경우도 알고보면 길가메쉬 서사시와 수메르 신화를 베끼고 뒤집은 것이며, 이를 알면 구약의 신화에서 발견되는 모순이 모두 설명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실제로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언급되는 ‘대홍수’ 같은 이야기가 노아의 대홍수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에덴과 아담의 어원 등에 대해서는 국내의 또다른 수메르 전문가인 조철수도 의견을 같이한다. 길가메쉬와 수메르 신화에 대한 저자의 웅변과 찬탄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너무나 그리스 로마 신화만 이야기해온 우리 나라에서 길가메쉬 서사시가 고대 세계에 미친 영향은 신중하게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어쩐지 길가메쉬 서사시가 갖는 역사적, 신화적인 가치에만 열을 올린 느낌이지만, 이 서사시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문학성과 재미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탄탄하고, 주인공 길가메쉬는 영웅적이면서도 너무나 많은 약점을 드러낸다. 넘치는 힘에 행패를 부리다가 겨우 맞수라고 할 만한 친구를 얻어 기뻐하고,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심에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고, 또 막상 무서운 상대에 맞닿뜨려서는 겁을 먹는 길가메쉬. 엔키두를 잃고 비탄에 빠져서만이 아니라, 곧 그 시체를 혐오스러워하게 된 자신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 때문에 순례의 길을 떠나는 길가메쉬의 모습은 현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간적이다. 묘사가 많지 않고 표현이 낯설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끝없는 변주가 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길가메쉬의 탄식이나 씨두리의 조언 등, 시대를 뛰어넘는 강한 울림이 담긴 대사도 많다. 저자가 이 서사시에 취하여 찬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 다음에 [수메르 신화](조철수, 서해문집, 2003년 6월)를 권하고 싶다. 역시 수메르어 전문가인 저자가 점토판을 직접 읽고 해석하여 재구성한 책으로, 내용이 자세한 편이어서 길가메쉬 서사시를 통해 대략적인 신화를 이해하고 흥미를 가진 뒤에 보면 더 재미있다. 균형감을 찾기에도 좋고, 길가메쉬 서사시도 부분 수록되어 있어 두 학자가 어떻게 해석을 달리했는지 확인하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마침 이 책도 때를 맞추어 작년 6월에 대폭 내용을 보강하고 도판을 더한 판본이 새로 나왔다.
   엉뚱하지만 필자는 수메르 신화에서 인간이 창조된 이유를 보고 한참동안 상상의 나래를 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원래 큰 신들을 시중들고 일을 하던 작은 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대신 노동을 시키기 위해 창조한 존재가 인간이라니…… 어디서 많이 본 줄거리 같지 않은가?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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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5.03.26 03:12 댓글 수정 삭제
    이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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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5.03.26 09:44 댓글 수정 삭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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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5.03.26 11:16 댓글 수정 삭제
    지르고 싶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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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onism 05.04.01 22:41 댓글 수정 삭제
    흑... 저도 지르고 싶지만... 28000원이라니. 아직 월급 받으려면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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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therworld 05.05.27 00:52 댓글 수정 삭제
    훌륭한 책에 대한 의미있는 서평입니다. 저도 읽었습니다. 김산해님의 또 다른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를 깊게 읽었습니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보다 더 굉장합니다. 대단합니다.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