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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림 단편선, [할티노]

2005.05.28 01:3905.28

wooden-box@hanmail.net"세상은 지독하게도 언제나 내가 여자라는 걸 일깨워 주었다." (「후기」)

거울의 두 번째 단편집, 할티노를 독파하고 난 뒤의 첫 인상은 작가가 자아내는 강렬한 이미지와, 작가 스스로 후기라 말하는 「숲에 사는 물고기」를 제외하고서라도 여덟 편에 달하는 적지 않은 단편들 간의 불균형이었다. 「할머니 나무」, 「할티노」, 「낙오자」 등에서 보이는 독창성, 플롯을 안정적으로 풀어내는 놀라운 솜씨는 다른 글에서 피상적이고 설득력이 낮은 플롯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의 뿌리와 닿은 글인가, 닿아있다면 얼마나 깊게 닿아있는가가 작가의 일련의 작품들이 불균형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할머니 나무」에서 엿보이는 작가의 필력은 그야말로 놀랍다. '시커멓고 냄새나는 양말', ‘철이 덜 난 막내딸의 빨간 에나멜 주전자’ 등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나무가 된다는 환상적인 소재를 일상으로 끌어내린다. 저승과 이승을 가르는 문지방 설화를 삽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나를 모두 느끼고 싶으셨’던 어머니를 결부시킨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나무가 된다는 불안감을 지닌 화자와 늙어감을 화해시키고, 가족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다시금 재확인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세계만 있는 건 아니라는 듯 금세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표제작인 「할티노」로 시작해 일련의 작품들을 공통적으로 지배하는 시선이다.

베트레이는 네블레인을 배신하고 니힐란트는 에델라이드 공녀를 배신하며(「할티노」), 노마는 이세를 배신한다(「얼음공주」).  ‘나’는 희연을 죽이고(「SAVING EARTH」) 라트리는 마족을 죽이며(「밤의 연상」) ‘나’가 원희를 죽이는가 하면(「태양을 삼키다」)심지어 닐라는 선박왕에게 잡혀 먹힌다(「이상한 무도회」).
사랑의 배신과 실연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사랑은 환상’이며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열정을 부르짖는 악사를 ‘가엾게 여길 심장이 있었으면 좋았’(「할티노」)겠다고 동정하는 대공녀의 시선과 닮아있다.

그러나, 이렇게 흡사한 주제를 변주하고 있는 작품일지라도 「할티노」, 「얼음공주」, 「이상한 무도회」, 「낙오자,」의 설득력과 완성도에 비해 다른 작품의 변주는 피상적인 아픔을 되풀이 노래하는 것에서 그친다. 그 이유를 작가의 후기에서 찾는다. 세상이 여자임을 일깨운다. 사랑의 고통스러운 결말은 어긋나고 일그러진 세계의 흠과 연결될 때 설득력과 공감을 얻는다.

베트레이의 배신은 왕녀를 ‘그림자 속에 매장’(「할티노」)해버리고, 세계를 부계혈통으로 바꾸어버렸으며, 그 세계 안에서 니힐란트는 대공녀를 향해 약혼녀 에델라이드를 배신한다. 하나의 배신이 다른 배신을 빚는다. 얼음공주 이세는 결빙의 방에서 실연으로 부서진 자신을 부여잡고 따뜻함을 원하고(「얼음공주」), 닐라는 단 한 번의 착각으로 잃어서는 안될 것까지 잃었다(「이상한 무도회」). 신분상승의 가능성에 대한 단 한 번의 착각, 단 한 번의 어리석음,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민트 역시 예외로 살아나지는 못했다고 ‘혀요리’와 ‘민트 향을 첨가한 닐라’로 작가는 암시한다.

얻어서는 안 될 것을 원했다가 죽은 이세의 인물상은 「이상한 무도회」에서 닐라와 민트로 나뉘고, 다시 「낙오자」에서 메이든 하나로 압축된다. 세계의 틀 안에서 순응하기 위해 조급해하면서도 메이든은 자신 안의 호기심까지 억누르지는 못한다. 메이든의 파멸은 예견된 것이다. 그녀는 세계 안의 성공을 원하면서도 세계에 맞춰 자신을 억누르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쟌처럼 세계 안에서 안온함을 느끼지도 못했고, 이든처럼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도 못했다. 자결은 세계 안에서의 실패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을 뿐이다.

비정상적인 세계 안에서 메이든은 자신 안에 모순을 끌어안고 있었고, 그 모순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자결로 파멸을 앞당겼다. 자결까지는 아닐지라도 세계와 개인, 사회와 나 사이에서 그 거리와 모순을 메우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동동거리는 삶은 우리의 통상적인 삶과 다를 바 없다. 얼마나 숱한 여자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자신을 버리지도, 사회에 등을 돌릴 수도 없이 괴로워하는가.

단편집 한 권으로 한 작가의 작품세계와 작가정신의 연원을 말하기에는 섣부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아픔과 고통을 말하기 이전에, 그 아픔과 고통이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할 때 그 작품이 빼어난 태를 갖추는 것을 보면서 작가의 차후 행보가 좀더 날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속된 파멸, 안개보다 흐린 희망을 노래하던 작가는 「낙오자」에 이르러 메이든의 열매를 남겨놓았다. 쟌이 주는 물을 먹어서일지라도 언젠가 그 열매가 벌어져 아이가 태어나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메이든에 대해 묻기를 바란다. 작가의 뼈아픈 현실인식이 희망을 품기를 조심스럽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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