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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노래하는 늪 (전자책)

2005.03.26 01:3403.26



lunaticsun@msn.com들어가기 전에

 지난해 첫 번째 거울 단편집이 출간된 이후로 거울 필자들의 개인 단편집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각 필자들의 개성을 담은 특색 있는 단편집이 계속해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잡문을 시작한다.
 그동안 보아 온 赤魚 님 작품의 특색은 우선 그 독특한 설정과 소재의 사용이 아닌가 싶다. 매 작품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설정이 작품 전개상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그러나 이분의 작품은 깊이 없이 이것저것 특이한 설정을 남발해 놓은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런 작품들에서는 설정이 전부고 작품 자체는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赤魚 님 작품에서 설정은 주제의 구현과 밀도 있게 연결되어,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치고 나오는 반전을 선사하기도, 때로는 그 자체로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슬쩍 드러내기도 한다. 게다가 간간이 보이는 재치와 자연스러운 묘사 또한 그 매력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글 중 몇몇 작품은 이분의 개성이 제대로 드러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서두가 길어지니 이만 본문을 조심스럽게 들추어 보기로 한다.


크레바스 보험사

 때로는 시간이 한 개인을 위해 돌아가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보르헤스의 단편들 중, 일생일대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죽음을 연장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죽음의 순간에 필사의 의지로 시간을 멈춰 버린 그 남자는, 일 년 ― 물론 그 시간을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뿐이었다 ― 이 지난 뒤 예정된 죽음을 맞는다. 어떻게 시간이 멈추었다가 다시 흐를 수 있을까? 그것도 한 사람에게만은 흐르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이러한 허구적 상상은 시간이 불연속적으로 흐른다는 가정 하에서 가능하다.
 「크레바스 보험사」는 이러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재미있는 작품이다. 시간의 틈새를 이용해 죽을 운명의 사람들을 구출하는 보험사라는 독특한 설정에, 이러한 사실을 대충 흘려듣고 나중에 허둥대는 주인공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악덕(?) 보험사에 잘못 가입했다가 순식간에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가 되고, 나중에는 밀린 보험료 때문에 무료 봉사를 해야 하는 주인공은 불쌍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히 독자들이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을 즐겁게 감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시간을 멈춰 준 보험사 직원들 덕분에 목숨을 연장했지만, 그 역시 시간의 틈새에서 빠르게 늙어가다가 결국에는 소멸할 것이다. 이 작품에 담겨있는 진실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들 또한 오늘도 무엇인가를 지불하고 하루의 목숨을 산 것이 아닌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칼날을 품고 있는 글이다.


돌아오는 여름이 다시 여름인 것처럼

 누군가에게서 완전히 잊혀지고,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나’라는 하나의 상이 소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타인의 기억에서 잊혀진 존재들이 실제로 지구에서 ‘멸종’된다. 친구와 가족들에게서 잊혀진 사람들, 더 이상 실재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드래곤과 요정들은 지구를 떠나 사람들에게 감정들을 배달하며 살아가다가, 누군가가 그들을 기억해 내면 지상에 불시착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자신을 찾는 마음속의 부름에 이끌려 원래의 삶,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있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히 기쁠 것이다. 그러나 작중의 ‘나’는 약간은 쓸쓸한 어조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 사라졌던 공백을 채우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잠시 등장하는 모후라는 아가씨도 마찬가지, 제자리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미 난 잊혀졌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을 폐기 처분한다.
 말했듯이, 잊혀진다는 것은 물론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기쁨의 미소를 띠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쓸쓸히 미련을 정리하고 돌아서는 사람도 모두 아름답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결점이 있다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서술상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차이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가 차분히 가라앉은 독백의 느낌을 주는 것에 비해 전반부는 다소 어수선해서 처음부터 작품에 몰입하기가 힘들다는 점이 아쉽다.


영원한 수요일

 역시 작가의 독특한 소재와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 중 하나이다. 시간을 구획대로 나누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발끈한 창조주가 만든, 언제라도 ‘시간 재배열’이 가능한 마을이라는 설정 자체가 매우 재미있다. 게다가 ‘시간 저금통’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소품이 후에 어떤 식으로 이야기의 결말에 작용하는지를 알고 나면, 작가의 창의적 발상력 ― 이 때는 개성적인 소재와 설정을 고안해내는 능력을 말함 ― 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결코 따로따로 발휘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대중가요의 가사를 들어보면 영원한 사랑이란 참 쉬운 일 같다. 누구나 그대를 영원토록 사랑하겠다고 외쳐 대니 말이다. 이에 대해 이 작품 전체의 어조는 무척 냉소적이다. 영원한 사랑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청년의 말에 시간 저금통의 고안자 아작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즐!’뿐이다. 현실에는 서로에게 눈이 먼 순수한 연인은 존재하지 않고, 탐욕과 허영으로 가득한 꽃뱀 한 마리와 그에 속고 있는 샌님이 있었을 뿐.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영원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루카스의 변치 않는 사랑은, 알고 보면 저금통에 갇힌 시간의 일부일 따름이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냉소와 아이러니컬한 결말은 다소 섬뜩하기까지 하다.


마을로 오는 기차

 어딘가 하나씩 결핍된 사람들은 아주 가끔씩 마을에 들르는 기차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기차가 자신들의 결핍을 채워줄 무엇인가를 싣고 올 것을 기대하며. 기차가 한번 왔다 갈 때마다 허탕 친 사람들은 다음번을 기약하며 돌아서서 하염없는 기다림을 다시 시작하며, 결핍을 채운 사람들은 그동안 갖고 있었던 것들,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의 관계마저도 내던지고 기차에 올라탄다. 마을 사람들의 눈길은 항상 기차가 오는 쪽, 먼 곳을 향한다. 마치 해바라기 같다.
 그러나 하염없이 태양만을 향하고 있는 해바라기와는 달리, 먼 곳을 향하던 눈을 옆으로 돌린 소녀와 아이는 기차가 가져다주지 않아도 이미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격언처럼 말이다.
 이 짧은 단편은 대화보다는 주로 느릿느릿한 서술과 단순한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어, 단편 소설이라기보다는 마치 잘 짜여진 그림 동화 같다. 서술자의 담담한 어조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섬세한 묘사 또한 작품의 동화적인 분위기에 일조한다.


노래하는 늪

 아이들은 곧잘 엉뚱한 상상을 한다. 요새 아이들은 영약하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말들 하지만 아직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에도 눈을 빛내는 어린 조카를 보면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중?고등학교 6년을 거치고 나니까 심성이 메말랐는지 환상 동화집 같은 것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는 나에게는, 마음 놓고 환상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이 세계에 속하면서도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를 보는’ 소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밤마다 늪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거기서 나오는 습기를 느낀다. 이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같은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면 광인과 죽음을 앞둔 노인들뿐이다. 도대체 왜? 화자는 노인들이 느낀다는 강렬한 기시감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기다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을 벗어나면서 잃어버렸던 그 무엇 ― 화자는 ‘광기’라고 표현하는 ― 이 되돌아오는 느릿한 죽음의 시간에 대해서. 머리가 굵어져 가면서 미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들은, 어린 날의 광기가 돌아온다고 해도 더 이상 흠이 되지 않는 그 날만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쩐지 기괴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붓끝 한 방울

 내력을 알 수 없는 붓 한 자루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가 주가 된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미래 ― 에서도 과거에 묻혀 사는 듯한 한 남자가 역시 과거로부터 떠오른 유물 하나를 입수하게 되면서, 그에 얽힌 사랑 이야기를 엿보게 된다.
 소재와 분위기가 운치 있고 신비로워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 될 수도 있었는데, 중심인물의 상념이 이어지다가 순식간에 사건이 진행되어 어느새 끝나버리는 등, 구성 면에서 부족한 점이 눈에 띄는 점이 아쉽다.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얕게 들어갔다는 느낌. 특히 마지막 부분의 ‘사실은 이러이러했는지도 모른다’ 류의 사족은, 이야기를 진부하게 만드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마지막 티타임(Tea Time)

 죽을 때 꽃잎이 되어 흩어진다는 점만 제외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워(Flower)족’과, 그들이 죽으며 남긴 꽃잎으로 차를 달여 마시는 불사의 존재 ‘마시는 자(Drinker)’가 등장한다. 인간이 죽어가면서 고유한 향의 꽃잎을 남긴다는 설정은 상당히 은유적이다. 한순간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최후에 흩날리는 꽃잎의 맛과 향이 결정되는 것처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 자체의 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 내에서 주인공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는 ‘마시는 자’ 바이샨의 말들이 다소 주제와 어울리지 못하고 붕 뜨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신의 정원

 인류의 타락이 극에 달한 미래의 어느 날, 인간들은 전쟁과 최후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방주를 타고 지구를 떠난다. 지구에 최후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정원 가꾸기를 즐기던 어느 박사가 그의 정원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로봇들이다. 인류가 귀환하는 날까지 지구를 관리하기 위해 남아있는 로봇들이라는 설정은 왠지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의문과 긍정적 인식을 담고 있는 「프로스트와 베타」와는 달리, 이 작품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인간에 대한 풍자는 섬뜩하리만치 냉소적인 반전에서 극에 달한다. 신의 정원으로 변한 아름다운 지구에 타락한 인류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봐, 도대체 이 신의 정원에 인간이라는 잡초가 왜 필요한 거지?”라고 묻는 듯한 로봇 파수꾼의 말은 가히 촌철살인이다.


다시 쓰는 선녀와 나무꾼

 우리에게 익숙한 전래 동화인 「선녀와 나무꾼」을 SF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 재치 있는 작품이다. 옛날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사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왜 선녀는 지상에 목욕을 하러 내려왔을까?’ 등의 의문을 품어본 독자라면, 이 작품상의 해석에서 참신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패러디로 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의 내용을 비틀고 비틀어 교묘하게 스페이스 오페라의 한 부분으로 끼워 맞추는 데 성공한다. 사슴과 사냥꾼의 정체를 어이없는 언어번역기의 실수로 설명하는 부분이라든지, 동화 속에서 허술하게 지나쳤던 사항들을 모두 SF적인 요소로 바꾸어 놓는다든지 하는 부분에서는 장난스러운 재치가 철철 넘친다. 전래 동화에 대한 추억이 새삼 떠오르게 하는 유쾌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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