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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uidkwon@empal.com들어가면서...
2004 과학기술 창작문예 수상작품집(앞으로 수상작품집이라고 하겠습니다.)에 대해 서평을 쓰려고 막상 키보드를 잡으니 뭔가 불안해 집니다. 아무래도 전문적인 평단에 의한 심사평이 함께 실려 있는 소설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니 어설픈 실력이 비교당할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아무리 걱정이 돼도 어쩌겠습니까. 쓴다고 일을 벌여놨으니 써야죠.

레디메이드 보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번뇌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런 번뇌를 이겨내고 해탈의 경지에 올라 진정 득도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사실 이 득도라는 게 뭔지 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게 된 여러 가지 정보만 있을 뿐입니다. 그 때문에 어려운 선문답 같은 대화들을 보면서 눈만 굴렸을 뿐입니다. 하여간 로봇이 일상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불교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 매우 각별하게 느껴졌고, 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불교철학에 대한 대담들을 통해 불교가 SF에 이렇게 어울려 들어갈 수 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경지에 오른 로봇이라니 정말 기발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소재였습니다. 덕분에 미래의 적그리스도와 구세주는 모두 로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부
로봇이 등장하면 으레 당연한 것처럼 따라오는 게 아시모프의 3대 원칙입니다. 아시모프는 스스로 그 원칙의 완전성을 깨는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SF소설은 아시모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실제로도 이 원칙은 로봇공학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새삼 책 권두의 추천사가 떠오릅니다. 하여간 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노부는 철저히 로봇 3원칙을 따르는 소설이기 때문에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 본겁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해 졌을 때 우리를 보살펴 주는 것이 사람이 아닌 로봇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미래의 우리 후손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로봇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게 될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소설 속의 세상은 늙은이들에게 정부에서 간호로봇을 붙여주는 세상입니다. 낡은 정부의 로봇과 늙은 로봇공학자는 묘한 우정을 쌓게 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늙은 로봇공학자는 로봇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합니다. 로봇과 인간의 우정이 쌓여가는 과정이 좀 더 잘 묘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자살이라는 결말에 대한 아쉬움이 좀 남습니다. 하지만 묵직한 주제가 조금 껄끄럽기는 해도 잘 녹아들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프, 이프, 이프
수상작품집을 읽으면서 가장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작품입니다. 배경을 알 수 없고, 두 가지 이야기의 연관성을 찾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제 부족함을 작가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다만 생명의 소중함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미래를 경험해보는 성장촉진 시뮬레이터와 같은 논란의 여지가 큰 소제를 너무 가볍게 넘어간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네요. 출산과 낙태를 다룬 다는 점이 너무 무거운 주제를 억지로 삼키려는 듯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촉각의 경험
인간 복제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는 요즘 모든 감각이 차단된 채로 '배양'되는 클론과 그의 꿈에 대한 이야기는 뭔가 호소력이 있게 다가옵니다. 다만 중편임에도 중편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단편을 읽는 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글의 구성이나 호흡이 중편보다는 단편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다루는 글로는 조금 가볍다는 느낌도 납니다. 그렇지만 지루하지 않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Hotel, Since 2079
수상작품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이 제일 뒤에 있는 만화 Hotel, Since 2079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활자보다 그림이 눈에 잘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만화이다 가장 눈이 쉽게 갔고, 가장 먼저 보게 됐습니다. 온난화가 진행돼서 더 이상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될 지구를 위해 과학자들은 인간의 DNA를 인간이 살 수 있을 지도 모르는 행성을 향해 인류문명의 기억과 함께 '방주'를 만들어 보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과학자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도망치는 인류가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의 DNA를 저장할 '탑'을 남극에 만들자고 합니다. 방주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탑'은 '호텔'로 불리면서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지구에서 외롭게 생명의 씨앗을 지켜냅니다. 생명의 씨앗인 DNA를 지키기 위한 '호텔'의 지배인, R42000CH, 루이의 노력은 정말 인간적이며,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짧은 단편만화는 그 내용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움과 동시에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 지구온난화... 흔한 소재지만 2700만년이라는 세월을 이겨내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아동문학부문
'풀꽃이 된 사람들'은 핵전쟁으로 멸망한 지구에서 풀꽃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풀꽃이 되서 살아남는 다는 발상이 참 기발하면서도 우울했습니다. 뭔가 부족한 느낌도 있었지만 탄탄한 느낌으로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여쁜 나의 주인님'은 약간 부족한 감동과 어설픈 듯한 느낌이 났지만 잘 읽히는 이야기였습니다.
'키움 박사의 눈물'은 배드엔딩이라 수상작품집에 실린 아동문학부문소설들 중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유전자에 의해 통제되는 미래에 대한 통찰이 이해하기 쉽게, 읽기 쉽게 쓰여 졌습니다.

덧붙여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소위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SF나 판타지에는 제대로 된 공모전이 없는 실정입니다. 판타지 쪽에서 장편과 연재 위주로 공모전이 열리고 있지만 아직 모양새를 갖추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외국에 비해 소위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이 쓰여 지기 시작한 것도, 읽혀지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런 상황에서 과학기술 창작문예는 오아시스와도 같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수상작품집의 가치는 남다릅니다. 앞으로 이 공모전이 일회성이 아닌 꾸준하고 전통성 있는 공모전으로 자리 잡아 좋은 소설과 좋은 작가들을 많이 발굴했으면 합니다. 내년에는 더 좋은 글들로 수상작품집이 가득 차기를 기대하면서 부족한 글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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