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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쿼런틴

2005.05.28 01:4105.28





toonism@magicn.com

저는 과학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더군다나 양자역학이라면 당연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다는 건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다 보니, 양자역학을 기초로 한 이 소설 [쿼런틴]을 보면 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 자체를 이해를 못한다는 건 아닙니다. 무예를 할 줄 모르면서 무협지를 보거나 마법을 쓸 줄 모르면서 D&D류 환타지를 본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을 즐기지 못할 정도는 아닌가 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내가 왼발을 내딛는 순간, 오른발을 내딛는 또 다른 내가 있는 겁니다. 내가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뒷면이 나오는 것을 보는 내가 있는 겁니다. 내가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특정한 결과를 볼 때, 또 다른 무수히 많은 다른 행동을 하거나 또는 결과를 보는, 무수히 많은 내가 있다는 거지요.

이 책에서 주장하는 양자역학의 현상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주사위를 던져서 1이라는 숫자가 나왔다면, 1부터 6까지의 여섯 가지 결과로 ‘확산’되었다가 1이라는 하나의 결과로 ‘수축’되어서, 주사위는 1이라는 결과를 내보인다는 것이지요.

글을 시작하면서 이상한 이야기를 해버렸군요. 제가 써놓고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이야기 때문에 이 책을 ‘따분하고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난무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책을 꺼내든 그 순간부터 덮을 때까지, 한 순간도 쉬지 못하도록 몰입하게 되는 게 바로 이 [쿼런틴]입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소개를 해야 할 테니 일단 줄거리를 간추려 보겠습니다.

2034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의 별이 모두 사라져버립니다. 지구 둘레에 정체 불명의 커다란 차폐막(遮蔽膜)이 생겨서, 지구에서는 별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우주로부터 격리(quarantine)된 것입니다. 대략 삼십 년 정도가 지난 후, 사립탐정 닉은 한 실종자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완벽한 감시 체제 하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정신지체장애자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것이지요. ‘앙상블’이라는 조직이 실종자를 은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닉은 ‘앙상블’의 건물에 몰래 침투하지만 발각당하고 맙니다. 그런 후 ‘앙상블’의 ‘충성 모드’의 속박을 받게 되지요. (세뇌를 당했다고 하면 간단하겠지만, 그런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양자역학 이야기만 했습니다만, 이 책에 양자역학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나노 테크놀러지가 일상적으로 퍼진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뇌에 설치되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시대랄까요. 여행 정보 모드(mod), 수면 조절 모드뿐만 아니라, 인간 고유의 생화학적 능력, 감각 처리 능력, 판단력 등을 조절하는 모드까지 있습니다. 위의 줄거리에 나온 ‘충성 모드’도 그 일종이지요. 주인공 닉은 ‘앙상블’에서 강제로 설치한 ‘충성 모드’에 의해 앙상블에 충성하게 됩니다. 앙상블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닉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신념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 일부를 발췌해 보겠습니다.

(전략) 환청이 들리거나 환영이 보일 것을 거지반 기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조잡한 테크닉이 이미 과거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충성 모드는 머릿속에서 선전 문구를 속삭이지는 않는다. 헌신의 대상에 해당하는 것의 영상을 끊임없이 보여 주며 뇌의 쾌락중추를 자극하거나, 올바른 사고에서 벗어나자마자 고통과 구토감을 불러 일으켜서 정상적인 활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지고한 황홀감이나 광신적인 열광으로 마음을 흐리게 하지도 않았다. 결함이 있긴 하지만 우아한 궤변으로 교묘하게 속이려 들지도 않았다. 세뇌도, 조건화도, 설득도 없었다. 충성 모드는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그 최종 결과이며, 기정사실이다. 신념의 원인이 아니라, 신념 그 자체인 것이다. 육화(肉化)한 신념―――아니, 육체 상태가 신념화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후략)

닉은 ‘충성 모드’에 의해 ‘앙상블’에 충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앙상블’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는 따로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앙상블’ 조직의 고위 관계자들을 따라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앙상블’이라는 조직의 원래 방향을 따라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고민 때문에, ‘충성 모드’의 지배를 받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캐넌’이라는 비밀 집단을 만들게 되지요. 권력다툼을 하는 일부 고위층은 “진정한 ‘앙상블’”이라 할 수 없으므로, 각기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앙상블’”을 위해 움직이기로 한 것입니다. (뭐랄까요,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가, ‘국가’를 움직이는 고위 권력층에 충성해야 하는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대입시켜 보니 재미있더군요.)

‘앙상블’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던 닉은 정체 불명의 모드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 모드는 ‘확산’과 ‘수축’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지요. 쉽게 설명하자면, 주사위놀이를 하던 중 6을 원한다면 1부터 6의 여섯 개 결과가 나오는 다양한 상태 중에서 6이 나오는 하나의 결과만이 남도록 조절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쿼런틴]은 기본적으로 스릴러물의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미 너무 많은 내용을 소개해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단순히 줄거리만으로 이 책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모드’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 “‘확산’과 ‘수축’”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금방 책에 빨려들어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복잡하게 소개하는 바람에, 이 책을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사실 조금 어렵고 복잡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을 그런 이유만으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재미있거든요. 여유가 있다면 양자역학에 관련된 간단한 책이나 [타임 라인](양자역학을 기초로 한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을 읽어보라는 주위의 조언도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미처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사족입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 이 말을 적어 넣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귀퉁이에 박아놓습니다.)

내용 중에, 닉이 ‘확산’한 후 여러 시간에 걸쳐 건물 여기저기를 드나들면서도 누구와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결과로 ‘수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닉의 입장에서는 건물 여기저기를 드나들면서 자신이 원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신기할 정도로’ 경비원들과 마주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지요.

지난 시간부터 현재의 시간까지 발생한 일이 한 순간에 결정되고, 그 모든 시간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진다는 것이 마치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헵타포드’ 종족의 인식 체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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