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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ehong@unitel.co.kr

얼마 전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대표작인 [7인의 사무라이]를 봤다. 그 전까지 내가 본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라고는 작년 서울아트시네마의 회고전에서 본 [요짐보]뿐이었는지라 이 감독이 어떤 류의 영화를 만드는지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난 그저 슬슬 이 영화사 속의 걸작을 감상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고, 발표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박진감 넘친다는 사무라이와 산적들의 전투 장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DVD를 실행시키기 직전까지도 내가 아는 거라곤 이 영화에 미후네 토시로라는 이름난 배우가 나온다는 것과, 상영 시간이 세 시간이 넘는다는 것과, “산적들의 약탈을 앞둔 농부들이 일곱 명의 사무라이를 고용해 산적들을 막도록 한다”는 줄거리 정도였다.

   영화는 시작되었고, 산적들은 약탈을 예고(지난 가을에 이미 털어간 마을이라서 보리 수확기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온단다)했고, 마을 사람들은 울부짖다가 사무라이들을 고용하기로 결의했고, 여차저차 해서 사무라이 일곱이 모여 마을로 왔고…….

   (극장에서 당당하게―――그들은 진동이면 어디서나 충분할 줄로 안다―――휴대폰 액정의 불을 밝히는, 참으로 미운 관객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 DVD 감상의 문제 중 하나는 휴대폰을 끄고 시계를 치우더라도 눈동자를 조금만 굴리면 플레이어의 램프가 보여서 영화가 시작한 뒤 얼마나 지났는지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7인의 사무라이]의 전개 과정은 물론 무척 재미있었지만(나는 이번 달에만 이 영화를 네 번 봤다) 나는 그 즐거움과 별개로 종종 플레이어의 러닝 타임 표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급기야 한 시간, 그러니까 영화 전체의 1/3이 지나도록 온다던 산적들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은 채 농민들과 사무라이들만 나오자 조바심이 났다. 내 조바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화는 계속해서 농민들과 사무라이들만 보여주더니 무려 “휴식” 자막을 내보냈다. 결국 첫 등장을 제외하면, 세 시간 이십육 분짜리 영화의 절반 동안 산적들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즐거움만큼 당황을 안고 어서 휴식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나머지 절반에선 산적들이 많이 나왔지만, 농민들이 산적보다 더 많이(수적으로나 시간상으로나) 나오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이래서 이 양반이 거장일 수밖에 없구나.”라고 탄성을 지르며 무릎을 탁 친 나는 그제야 새삼스레 어떤 이야기든 줄거리 요약으로는 그 내용을 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7인의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들과 산적들의 싸움이라는 갈등을 중심에 두는 영화가 아니라 산적들의 약탈을 앞에 둔 상황에서 드러나는 농민 계급과 사무라이 계급 간의 갈등을 중심에 두는 영화였다. 산적들은 계기이고, 외부 요소였으며, 정말 중요했던 건 내가 그 전까지 갈등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전개 부분이었다. 그 긴 전개 과정이 있었기에 후반부에 처절한 싸움이 등장하더라도 여전히 농민들과 사무라이들은 영화의 중심에서 진한 감정을 풍기며 남아있을 수 있었다.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화재 감시원}, [둠즈데이 북],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을 읽으면 딱 그런 느낌이 든다. 이 작품들은 결코 줄거리 요약으로 이해될 수 없다. 줄거리 요약이란 건 굵직굵직한 상황의 전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은 그런 식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작은 것에 대한 이야기, 중간의 기나긴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니 윌리스의 선택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읽은 작품이 별로 없는 자의 섣부른 판단인지도 모르겠지만, SF에 있어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는 이미 낡을 대로 낡은 것처럼 보인다. “부모 살해 패러독스”로 요약되는, “우리가 이미 지나간 시간을 변경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굵직하지만, 바꿔 말하면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SF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안을 제시하는 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즈 이래 오랫동안 많은 SF 작가들이 그 일을 해왔고, 결과적으로 이제 여기서 빨아먹을 단물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간여행 SF에서 “SF적 사건”의 힘은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코니 윌리스는 이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 하며,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은 “사건” 밖에 눈을 돌리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피해가고 있다. {화재 감시원}은 2차 대전 시기의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간 바솔로뮤가 독일군의 공습 속에서 세인트폴 대성당의 화재를 막으려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둠즈데이 북]은 중세로 간 키브린이 그 시대의 전염병 속에서 마을 사람들을 돌보는 내용이,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빅토리아 시대로 간 네드가 실수로 바꿔놓은 과거를 되돌리는 내용이 주가 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사건들은 SF적 사건이 아니거나 SF 농도가 옅으며, 무엇보다도 사건이 직접적으로 제시되기까지 한참 책장을 넘겨야 한다.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이 “아줌마 수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핍박(…)을 받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데, 굵직한 사건과 주인공의 활약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들의 지지부진한 전개는 한없는 결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뭔가 하나가 크게 터지기를 기다리며 “수다”를 대충대충 훑어가며 지루해하는 데에서 오해는 시작된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수다에 있다.

   이쯤에서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의 설정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우리가 이미 지나간 시간을 변경하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시간여행 SF의 중심 질문에 대해서 코니 윌리스는 “우리는 애초에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대답한다(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내가 두 문단 위에서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내용이 “바뀐 과거를 되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실 것이다. 그러나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하여, 또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읽지 않으신 분들이 읽어보시게 하기 위하여, 나는 그 지적에 대해서는 은은한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낼 수 있을 뿐임을 밝혀둔다). 시간여행의 메커니즘을 지배하고 있는 “네트”는 과거로 가는(시간여행 SF들이 대게 그렇듯, 미래로 가진 못한다) 시간여행자가 과거를 바꿀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편차를 만들어 내며(만약 역사학자가 케네디 암살을 막기 위해 암살 시각 직전에 케네디 옆으로 가고자 하면 네트가 자동적으로 시간여행에 편차를 만들어 도저히 암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시간이나 공간에 도착하게 되는 식이다), 그 밖의 범위 내에서는 자체 교정을 통해 역사를 이미 있었던 그대로 흘러가도록 한다. 시간의 흐름에 문제를 줄 수 있는 물체의 운송도 일절 불가능하고.

   따라서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의 주인공들은 결국 과거를 “관찰”하는 관찰자들이며, 이 세계에서 SF적 상상력을 이용한 극적인 사건 전개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다(물론 그 편차 때문에 다소 큰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며…… 다시 한 번 모나리자 미소). 이 작품들을 SF라기보다는 역사 소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그 지적은 상당부분 타당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전지적인 입장에서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서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 그 시대 속의 인물도 아니며 “현대인”(21세기 초의 우리에겐 아직 미래지만)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하다. 코니 윌리스는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따라서 그 위치가 현대와 동등한 과거 속에 한 사람의 개인인 현대인을 집어넣음으로써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 혹은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은 과거와 현재가 “동등하게” 만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SF 농도를 줄임으로써 SF만이 가능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행복한 아이러니!). 그리고 그 순간에 작가가 눈을 돌리는 것은 역사책 속의 위대한 장면들이 아니라 과거의 일상 자체다(그렇게 파란만장한 걸 “일상”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지금 우리의 하루하루를 일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저들의 하루하루도 일상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시공간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눈을 돌리는 순간, 코니 윌리스의 “아줌마 수다”는 “모든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 된다. 그 애정이 없으면, 그 애정을 함께 품고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면, 세 작품들의 결말이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의 첫 작품인 {화재 감시원}은 바로 이런 접근법의 핵심만을 뽑아낸 작품이다. 실습을 위해 1940년 영국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보내져 화재 감시원 노릇을 하게 된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과 학생 바솔로뮤가 쓰는 일기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에서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는 최소한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과거를 여행한다는 소재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수십 페이지에 걸쳐 바솔로뮤는 그저 화재 감시원으로서의 일상과 그 속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과 동물)에 관해 이야기할 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전개의 중심이 되는 사건이 있긴 하지만, 작품을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아니, 대체 이야기는 언제 시작할 거야?’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다. 그러나 실습을 마친 바솔로뮤는 (대부분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뒤늦게” 자신이 가볍게 쓰고 넘어갔던 그 모든 삶의 흔적을 돌아보며, 거기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어떤 다른 작품이 전해주는 것보다 더 깊다(정말로 “인간 외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바라고 있는 SF 팬들이라면 여전히 입술을 삐죽일 테지만).

   두 번째 작품인 [둠즈데이 북]은 분량이나 규모 면에서 {화재 감시원}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화재 감시원}에서 조역으로 등장했던 역사학과의 키브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현재”는 과거와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지는데, 그것도 단지 역사학과 팀이 키브린의 과거 탐사를 컨트롤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자잘한 에피소드를 언급하는 형식으로 다뤄지는 게 아니라 전염병과 격리라는, 키브린이 중세로 가서 겪는 갈등과 같은 종류의 갈등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명백히 대비시킨다. 즉, [둠즈데이 북]에서 “과거와 현재의 동등한 만남”은 이중으로 일어나며, 덕분에 가슴은 두 배로 먹먹해진다. 그러나 두터운 분량에서 짐작할 수 있듯, {화재 감시원}처럼 끝에 가서 단숨에 전체를 헤집어 내는 힘을 발휘하는 대신 우직하게 디테일을 짜 나가면서 차근차근 그 속에 사는 사람의 무게를 더해가는 작품이라 하겠다.

   세 번째 작품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 관해서는 좀 더 애정을 담아 이야기해 보고 싶다.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은 우리나라에서 {화재 감시원} → [개는 말할 것도 없고] → [둠즈데이 북] 순으로 소개되었는데 그 중 {화재 감시원}은 1995년에 [시간여행 SF 걸작선]에 수록되었다가 이내 (삐걱거리다 무너진 고려원 출판사와 더불어) 절판되었고, 아마 코니 윌리스를 좀 더 널리 알린 작품은 2001년에 출간된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나부터가 이 작품이 나왔을 때 어디선가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은 {화재 감시원}, [둠즈데이 북],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순으로 좋다”는 소리를 들었고 실제로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읽은 뒤에 {화재 감시원}, [둠즈데이 북]의 진중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자 ‘응, 그래. 역시 이쪽이 좀 더 힘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일단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훨씬 가볍고 경쾌한 로맨스다보니 자연스레 “옥스퍼드 역사학과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위해 즐겁게 쓴 일종의 팬 서비스”처럼 생각해버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은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확실히 달랐다. 이 작품을 “유쾌한 팬 서비스 로맨스”로 넘기기는 아쉽다(물론 그 정도로 충분히 만족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겠고, 나도 그런 감상에 대해 시비 걸 생각은 전혀 없지만). 코니 윌리스는 이 작품에서 유머와 추리라는 좀 더 즐거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결국 하는 이야기는 앞의 두 작품과 다르지 않으며, 내 생각에 그 이야기의 무게가 덜한 것 같지도 않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화재 감시원}과 [둠즈데이 북]은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죽음을 통해 말 하고 있으나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사랑을 통해 말 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거시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와 “그 속에서의 개인”이라는 문제는 처음에는 페딕 교수라는 우스꽝스러운(스러워 보이는) 인물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제시되어 ‘아, 코니 윌리스가 이제 자기 전작들 가지고 농담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그 농담을 따라가다 보면 여전히 그 문제를 진중하게 다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가진 추리소설로서의 구성(실제로 등장인물들이 이런저런 추리소설들을 언급하며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역시 추리소설임을 열심히 밝힌다. 그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몇몇 고전 추리소설들―――[월장석] 같은―――의 범인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은 그 전까지의 전개를 후반부에서 재차 불러들이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화재 감시원}이나 [둠즈데이 북] 못지않게 전개 “과정”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게 짜여진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주인공 네드가 그 동안 툴툴거리며 묘사해 왔던 코번트리 성당 복원 작업이나 빅토리아 시대의 청년 테렌스에 대해 어느새 애착을 갖게 됐음을 깨닫는 순간 느껴지는 감정의 무게는 결코 앞의 두 작품 못지않다.

   혹자는 코니 윌리스가 뻔한 이야기를 뻔하게 해서 싫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나처럼 {화재 감시원}의 첫머리부터 툴툴거리는 주인공이자 화자 바솔로뮤가 작품이 끝날 때 즈음에는 보다 점잖고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눈치만 좀 있다면 [둠즈데이 북]에서 키브린이 겪게 될 어려움이 뭔지도 짐작할 수 있을 테고,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시차증후군에 걸린 네드가 베리티에 반했을 때부터 독자들은 두 사람이 손잡고 키스하는 장면을 그리게 될 것이다(만약 여러분이 그런 독자가 아니라면, 미리 밝혀버려서 죄송하다. 하지만 원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볼 때 두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는 법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특히 코니 윌리스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하지만 이영도가 [드래곤 라자]에서 말했듯이, 인생은 원래 축약하면 뻔하게 보인다(“태어나서, 살다가, 죽겠지”). 코니 윌리스는 그 뻔해 보일지도 모를 삶의 디테일을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웃으며 샅샅이 살펴보는 작가고, 그 작업을 통해 독자들에게 우리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다. 그리고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을 이루는 세 작품은 모두 그 일을 훌륭히 해낸다. 장르 문학이 장르 게임을 벗어나서 모든 (훌륭한) 예술들이 해내는 일을 똑같이 해낼 때, 나 같은 장르 문학 팬의 기쁨은 두 배, 세 배가 된다. 그 기쁨, 다른 분들도 많이 누리셨으면 좋겠다.



   덧 하나. [둠즈데이 북]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번역하신 최용준 님(나는 존경과 선망과 애정을 담아 보통 “욘 사마”라고 하는 편이지만)께서 {화재 감시원}의 번역본을 거울 21호 해외단편란을 통해 게재하시긴 했지만 이 시리즈를 즐겁게 보신 분들이라면 출판사 열린책들의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화재 감시원}을 포함하고 있는 코니 윌리스의 단편집 [화재 감시원]의 출간도 요청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최용준 님께서 {화재 감시원}을 [둠즈데이 북]에 함께 싣고 싶었으나 사정이 있었다고 역자 후기에서 언급하신 걸로 미루어 볼 때 출간이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 책은 독자가 만드는 법이다, 라고 나는 믿고 있다.

   덧 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재 감시원} > [둠즈데이 북] > [개는 말할 것도 없고]”라는 공식은 내게 여전히 유효하다. 어떤 방식으로? 바로 내가 이 세 작품을 읽으면서 흘린 눈물의 양이다. {화재 감시원}은 끝에 가서 컴퓨터 붙들고 엉엉 울었고 [둠즈데이 북]은 마지막 2백여 페이지를 읽는 내내 흐느꼈고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일이 해결되는 끝 무렵에 가서 아쉬움과 기쁨의 눈물을 글썽였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읽다가 운 건 나도 참 놀랐는데, 그게 아마 그 동안 {화재 감시원}과 [둠즈데이 북]을 읽어 나가면서 코니 윌리스 덕에 좀 더 삶의 작은 것들 속에서 쉽게 울림을 느끼게 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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