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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잃어버린 세계]를 소개하면서 코난 도일이 SF 쪽에도 손을 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한두 번 손을 댄 것이라기보다는, (나름대로는) 초기 SF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책 [마라코트 심해]에는 {마라코트 심해}, {독가스대}, {하늘의 공포} 등 세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책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마라코트 심해}를 소개할까 합니다. 나머지 두 편은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세계]에서 천재 과학자 챌린저 박사가 등장한 것처럼 [마라코트 심해]에서는 천재 과학자 마라코트 박사가 등장합니다. 두 명 모두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엄청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두 캐릭터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챌린저 박사가 엄청나게 활발하고 성격이 급한 수다쟁이라면, 마라코트 박사는 침착하고 세심하며 그다지 말수도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좀더 조용하거나 지루한 것은 아닙니다. 챌린저 박사 대신, 거칠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빌 스캔런이라는 기계공이 등장해, 글 중간중간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 주더군요.

해양학과 심해 생물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증기선 스트래포드 선이 바다로 떠납니다. 이 연구의 지휘자인 마라코트 박사는 그동안의 방법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심해 생물을 연구할 방법을 생각해 내지요. 유선 잠수함이라고나 할까요, 줄로 매단 철상자에 들어가서 바다 속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갈수록 수압이 강해지기 때문에 사람은 일정 깊이 이상으로 들어갈 수 없다’라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 이론이었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에 능통한 마라코트 박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보편적 이론이 지금도 그대로 통용되므로 저는 도무지 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 이론에 따라 마라코트 박사와 사이러스 헤들리, 빌 스캔런 세 명이 철상자에 들어갑니다.

바다 깊이 들어가도 수압이 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마라코트 박사는 주위의 심해 생물들을 보면서 감격하지요. 그러면서 점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발견한 적 없는 심해를 발견하고 ‘마라코트 심해’라고 이름 붙이면서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던 중, 바다 속 그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을 발견하지요. 그리고 그 절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생물이 나타납니다. 이미 감격할 대로 감격해 있던 마라코트 박사는 그 생물을 관찰하기 위해 조명을 비추지만, (아마도 먹잇감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그 생물이 박사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 튼튼하던 철사줄은 한 번에 끊어지고, 철상자는 절벽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아래에서 아틀란티스 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 스포일러는 여기까지입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전작 [잃어버린 세계]와 매우 흡사하군요. 엄청난 지식을 자랑하는 천재 박사와 두 명의 동행인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미지의 장소를 발견하고 그 곳에서 생활하는 모험담입니다. 이제는 바다 속 아틀란티스 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워낙 많이 쏟아져 나와서 식상하다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그 식상할 소재를 이렇게까지 재미있게 풀어내다니요. 정말 그 상상력에 놀랄 따름입니다. 바다 속의 또다른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지상과는 다른) 사회의 모습이 정말 독특하면서도 신비하게 묘사됩니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저는 내용 끝부분이 조금 아쉽습니다. 작가 코난 도일이 말년에 신비주의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리고 이 작품이 그 즈음에 쓰여진 것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한 분위기로 가는 것은 조금 아쉽더군요. 과학적인 기반에서 주욱 진행되던 내용이 갑자기 이상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건 제 혼자만의 생각이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


코난 도일은 1인칭 시점을 매우 좋아하는 듯합니다. [잃어버린 세계]나 [마라코트 심해],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셜록 홈즈] 시리즈는 모두 1인칭 시점이지요.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읽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1인칭 시점은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독자가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게 (다른 관점에 비해) 더 쉬운가 봅니다. [마라코트 심해]를 보다 보면 서술자인 사이러스 헤들리의 감정과 그 상황이 너무 쉽게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뒤쪽의 해설을 보면 코난 도일의 SF가 아직도 더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황금가지에서 [안개의 땅]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중편이 나와 있더군요. 개인적으로 황금가지라는 출판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이 서평을 보고 나니 읽고 싶은 마음이 조금 사라지기는 합니다만, 실망할 때 실망하더라도 구해서 읽어보기는 해야겠습니다. 코난 도일의 글은 너무나도 즐거운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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