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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ehong@unitel.co.kr

사실, 허구를 다루고 있는 예술 작품을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며, 불행하게도(혹은 다행스럽게도) 예술가 역시 그런 사람들에 속하는 무리이기에, 모든 예술 작품들은 저마다 다른 현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접한다는 것은 감상자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와 만나는 일이며, 아무래도 그걸 즐기자면 다른 세계의 법칙을 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해가 잘 안된다면, 주변에선 온갖 괴상망측한 물고기들이 잘만 돌아다니는데 혼자서 헤엄을 못 쳐서 물 먹고 있는 새를 상상해보시라. 아무래도 그 새는 수중세계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이 펄럭펄럭 노닐던 세계와는 다른 그 새로운 세계를 즐기고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건 우리 종족의 여러 가지 다양한 특성 중에서도 제법 내세울만한 것이 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서인지 그럭저럭 이 문제를 해결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세계사라든가 풍속사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내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아마도 프랑스의 독자들만큼이나) 즐겁게 읽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자면 스스로가 참으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19세기 프랑스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즐기고 있는 21세기의 한국인이라니.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 종족의 적응력에 대해서 좀 더 자부심을 가져 봐도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종족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자끄 데리다 옹의 사상 체계를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체화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좀처럼 그런 적응력에 만족하질 못하고 자꾸 인간 본연의 적응력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해체의 본질 아니랴(아니라고? 뭐 어때. 신경 쓰지 마시길. 여러분은 이 글이 [디스크월드 시리즈 1: 마법의 색](이하 [마법의 색])에 관한 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일부 반동적인 성향을 지닌 인간들은 자기네들 스스로도 없다고 믿는 걸 자꾸 만들어내서 선량한 나머지 부류를 혼란에 빠뜨려 인간 세상을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다. 용과 기사, 지평선 너머에서 나타나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황야의 총잡이, 트렌치코트를 입고 담배를 꼬나문 사립탐정, 길을 걷다가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오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춤추며 노래 부르는 건달들, 폭포를 거스르며 솟구쳐 올라 기암절벽에 장풍을 갈겨 시를 써 내리는 백의청년, 이런 게 정말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다.

   다행히 인간의 다수(로 보이지만 실은 소수)는 이런 거짓말을 한 눈에 꿰뚫어보는 심원한 통찰력을 갖춤으로써 인간 사회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의해 원활하게(정말?) 돌아가는 데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일부 무지몽매한 이들은 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이들이 바로 ‘다차원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 좀 더 고급스럽고 학술적인 용어를 원한다면, 장르 문학 독자들이라 불리는 무리들이다.

   이 히치하이커들이 하는 일이란, 일반적으로 해외여행 중독증에 걸린 행객들(물론 골프 여행, 도박 여행, 매춘 여행, 이런 거 말고 학기 내내 노동력을 착취당한 끝에 벌어들인 돈을 일거에 쏟아 붓는 순진무구한 대학생들로 대표되는 배낭 여행객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이 하는 일을 정신적으로, 혹은 다차원 우주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과 같다.

   삶의 터전, 혹은 조국을 등지는 일에 익숙한 여행객들은 크게 두 가지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하나는 자기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가 던져주는 충격(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킨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세계에 익숙해져서 이방인이자 원주민으로서 그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이들의 확대 재생산 버전인 장르 문학 독자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즐거움을 찾아 헤맨다. 다만 그들이 헤매는 세계는 좀(실은 많이) 더 기괴해 보인다는 게 다를 뿐.

   그리고 여기, 영국의 작가 테리 프래쳇이 1983년 이래 지금까지 스물아홉 권의 책을 통해 안내하고 있는 세계, 디스크월드는 그 수많은 다차원 우주 중에서도 가히 압권이라고 할만한 곳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금세 혼백이 아스트랄계로 날아가 버릴 수 있으니 집중하시라. 여긴 발 딛고 사는 땅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다. 광활하여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어딘가, 거대한 거북이가 걸어가고 있다(혹은 헤엄치거나, 기어가거나, 우주유영 하거나. 아무려면 어떤가). 운석에 난타당한 흔적이 수없이 남아있는 이 거북의 등 위엔 코끼리 네 마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코끼리들의 어깨 위에는 커다란 원판―――디스크가 올려져 있다. 이 디스크는 천천히 회전하고 있고, 그 위엔 물과 대륙이 얹혀져 있다. 물은, 물론 디스크 가장자리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테폭포를 형성하고 있다. 자, 지금까지 사용된 어휘 중 어떤 것도 은유법을 위해 사용된 게 아니다. 지금 여러분이 떠올리고 계실 그 우스꽝스러운(그러나 최대한 장엄하게 떠올려주시라!) 모습이 바로 디스크월드의 ‘기본’이다.

   전체 세계가 생겨먹은 게 그런데 하물며 세부사항은 어떻겠는가? (1권만 봤을 때) 이 세계의 최강자는 주인공이 끌고 다니는 다리가 무수히 달린 짐짝(제발, 은유가 아니다!)이며, ‘죽음’이라는 이름의 신은 목표를 놓치기 일쑤인데다, 바빠서 자기 부하인 질병―――그 이름도 위대하신 ‘연주창’―――에게 대신 일을 맡기기도 한다. 아아, 게다가, 한국의 팬터지 독자층에게 특히 감명 깊게 다가오겠지만, '투명드래건'도 나온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광고 문구로 쓰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매거진]의 문구를 재인용 하자면,

   “일관되게, 독창적으로 미쳤다.”

   상상하기 난해할 정도로 황당하기에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기에 충분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디스크월드의 세계는, 사실 기존 장르 팬터지에 대한 패러디로서 존재하는 세계이다. 단지 감옥에 갇힌 ‘용사’가 “이제 어떻게 될까요?”라는 동료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아, 곧 문이 활짝 열리고 난 신전 경기장 같은 곳으로 끌려 나가 거대 거미 몇 마리 아니면 발이 여덟 개 달린 클라치 정글 출신 노예와 싸울 것이고 그런 다음 제단에서 왕녀나 그 비슷한 여자를 구해서 호위병이든 뭐든 몇 놈 죽일 것이고 그러면 이 여자가 이곳에서 나가는 비밀 통로를 가르쳐줘서 함께 말을 몇 마리 강탈하고 보물을 챙겨 탈출하겠지”라고 대꾸하는 것만 가지고 패러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디스크월드 시리즈는 장르의 보편적인 규범을 놀려먹는 거친 패러디에는 사실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그 존재 자체가 이미 패러디이기 때문에!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 사람도 잡아먹는 최강의 짐짝, 상상으로 죽였다 살려내는 드래건, 평면 세계,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등장인물들을 조롱하는 신들, 그 신들의 실수, 그런 모든 캐릭터, 모든 사건들이 사실상 장르 팬터지를 제법 익숙히 읽은 독자들과 만날 때 적극적인 웃음을 유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디스크월드는 그렇게 장르 팬터지의 어떤 부분은 과장하고, 어떤 부분은 깔아뭉개면서 패러디인 동시에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외 이 작품을 더글라스 아담스의 코믹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와 맞먹는 코미디 소설로 만든 데에는 테리 프래쳇이 보여주는(발 빠른 독자들이라면 이미 작년에 나온 테리 프래쳇ㆍ닐 게이먼의 코믹 팬터지 [멋진 징조들]을 통해 그의 유머 감각을 맛본 바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마법의 색]을 보고 나니 [멋진 징조들]의 유머 감각 상당수는 테리 프래쳇에게서 나왔으리라는 심증이 간다) 영국식 유머 감각과 영미 문화에 대한 패러디의 공헌도 상당하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보면서 판단하시길. 특정 문화권의 유머 감각을 강요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분명한 것은, 그런 유머 감각을 차치하더라도 이 작품은 장르 팬터지로서 극한까지 치닫는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이미 충분히, 장엄하게 웃긴다는 사실이다.

   자, 디스크월드는 이런 곳이다. 가급적이면 다른 세계에 뛰어들어 몸을 풍덩 적시는 방법을 제법 익힌 히치하이커들에게 권하고 싶은 장소이지만, 혹시 적응력이 남달리 강해서 모르도르 쯤이야 집 앞 공터로 보이고 등하교를 라마를 타고 하시는 분들이라면 디스크월드를 찾아보시는 것을 말리지는 않으련다. 머리를 싸매고 그 기괴한 풍경을 그려내고자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아, 끝으로, 그래도 아직까지 순수한 ‘다차원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되질 못해서 여전히 시장경제 원리에 묶여 있는 양식 있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이거 잘 안 팔리면 나처럼 외국어 못하는 여행객은 스물아홉 번째 권은커녕 당장 세 번째 권(일단 광고 때렸으니 두 번째 권까지는 분명 나올 것이다)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부터가 위태로울 지경이다. 대한민국은 아직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장이 활성화 되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부디, 제발, 당장 사라. 사서보고 돌리고 한 권 더 사라. 난 이 세계에서 보다 오랫동안 노닥거리고 싶다. 읽어보신다면 여러분들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기실 터이고.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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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s 05.01.31 15:35 댓글 수정 삭제
    한권 사보고 테리 프래쳇에게 푹 빠져버렸습니다. ^^
    절대적으로 30권까지 나오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