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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생명 공학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 복제 가능성과 그에 대한 윤리적 논란은 굳이 언제부터라고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귀를 따라다니는 화제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낸시 파머의 [전갈의 아이]는 자칫 매우 식상할 수 있는 이 문제를 클론 소년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다룬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읽고 머릿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것이 의외로 인간 복제 문제와는 관련이 적다 생각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였습니다. 글쎄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던 어린 소년이 사실은 자신이 누군가를 대체하기 위해 태어났고, 결국은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모습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동화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은 잔혹할 만큼 침울했던 [A.I.]와 마찬가지로 얼핏 보면 해피 엔딩 스토리인 이 작품은 너무나도 어둡습니다.

   작품은 ‘아편국’이라는 흥미로운 미래의 가상 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이 나라는 말 그대로 마약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가문들이 지배하는 국가인데요, 이 가문들의 정점에서 거의 독재라고 할 수 있는 형태로 군림하는 사람이 바로 마테오 알라크란(이하 엘 파트론)이라는 인물입니다. 주인공 마트는 바로 이 사람의 복제 인간이지요. 엘 파트론이라는 특별한 인물의 클론이었던 덕분으로 그는 태어나자마자 지능 파괴를 당해야 하는 숙명을 벗어나 아무 것도 모른 채 요리사 셀리아의 보호 속에 자랍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을 ‘불결한 클론’이라 부르며 동물 취급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노출되고, 자신이 엘 파트론의 장기 이식용으로 암소에게서 채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불신과 정신적 고통으로 번민하던 마트는 아버지 같은 존재 템 린에게서 마음 좋은 엘 파트론이 사실은 아편국 사람들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악덕이라는 이상한 말을 듣게 된 후 조금씩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을 발견하게 되지만, 곧 주위의 악의에 찬 계략으로 유일한 친구이자 사랑인 마리아와 템 린을 잃게 됩니다. 마트의 인간적인 노력과 선량함으로 다시 그들의 사랑을 되찾게 되지만 갑자기 악화된 엘 파트론의 병세는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엘 파트론의 마약왕국은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됩니다.

   이 작품의 세계에서 클론은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채취된’ 암소의 사생아에 불과합니다. 태어나는 시점부터 지적 능력을 파괴당한 클론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원본인 인간에게 자신의 장기를 제공하고 비참하게 죽어갑니다. 그러나 다행일지 불행일지 지성을 파괴당하지 않은 마트는 보통 인간들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클론이고, 비록 주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작가는 이미 그를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곧 이에 독자도 동조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작가는 과학의 발달이 불러올 수 있는 문제들을 경계하기 위해 복제인간과는 또 다른 형태의 인간성 문제를 제시했는데, ‘이짓’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지요. 머리에 칩을 이식받아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 밖에는 인지할 수 없는 좀비 인간들에게 등장 인물들은 클론에게만큼 극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짓같다’는 말을 욕으로 쓸 정도로 그 혐오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짓들은 한때 지성을 가진 인간이었던 존재로, 장기 이식의 도구로 태어나 동물처럼 살아가는 클론과는 달리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자기 자신의 의지나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이들을 향해 작가는 작중 인물인 에스페란사의 입을 통해 반격을 시도하지요. 그들이 불행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영원히 행복을 느낄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아닌가, 인간으로서 그 자격과 가치를 강탈당한 것이 아닌가 되묻고 있는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까요?

   작가의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작품이 보여주는 사회의 모습 자체가 어둡기 그지없습니다. 한쪽에는 지배자가 아편을 팔아 배를 불리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의 소유인 아편국이 있습니다. 그 압제에 시달리다 못해 탈출하다 잡히면 머릿속에 칩을 이식당해 좀비가 되어 버리는 무서운 나라입니다. 이러한 생명 공학의 발달로 지배자들이 자신의 생을 연장하고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내면서 한편으로는 그 지배자들이 가진 보수성 때문에 여전히 농사에 소를 사용하고, 자동차 대신 말을 타고 다니는 등 오히려 모든 것이 정체되어 버린 상황은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누군가가 어디에도 없는 신을 감금해 버린 걸까요? (웃음) 또 한쪽에는 마트가 잠시 머물게 되는 고아원이 있는데, 공동선을 위한 노동과 자아비판 제도가 존재하는 이곳은 암울한 전체주의 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두 곳 모두에서 마트를 구해주는 어른인 에스페란사는 양심과 지각을 가지고 있으며 아편국의 부정을 폭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는 인물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고 분명치 않은 대안만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작품의 말미에서도 거대한 장례식의 분위기만이 느껴질 뿐, 밝고 희망찬 미래 따위는 전혀 감지할 수 없군요.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느낀 묘한 불쾌감은 어쩌면 만족스러운 해피 엔딩이 아니어서라는 유치한 이유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릅니다. 농담이지만, 주인공이 초인적인 힘을 얻어 어디론가 존트해 버리는 것으로 끝났다면 어쩌면 만족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확실한 다른 이유는 이 소설을 단지 어두운 미래에 펼쳐질 모험담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역자의 태도였습니다. (역자 후기에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나더군요. 읽지 않고 넘어갔으면 좋았을걸.) 디스토피아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역시 충분히 담아내고 있는 이 작품을 그저 재미있는 과학 소설 정도로 폄하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한번쯤은 이 작품이 던지고 있는 의문들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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