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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지난 번 2005년 거울 중단편선에 대한 반쪽짜리 감상을 올리고 나서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책의 후반부, 인덱스 뒤쪽에 해당하는 글들 중에 몇 개를 추려 이야기하려고 한다. 여전히 부족한 감상이 되겠지만 책을 읽고 나신 분들에게 조금의 기억이라도 되새길 수 있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1. 심연 - 가연

   온라인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가연 님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는 것은 누차 말한 바 있다. 이매진에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를 게재하여 수상하셨을 당시와 이 ‘심연’만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간결하게 사건의 진행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쓰던 방식이 ‘아도니스’ 즈음에 이르러서 완전히 변했다. 사실적인 대사들이 속도감있게 진행되던 기존의 글쓰기가 서술 위주, 압축된 대사의 글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양쪽의 글 가운데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 하는 것은 독자들의 취향 문제이기도 할 것이므로 접어 두겠다.

   ‘심연’은 작가분의 여러 글 가운데에서도 특히 묘사가 돋보이는 글들 중의 하나다. ‘아도니스’ 등에서 보이는 현상이기도 한데 정작 ‘심연’과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전설의 대마법사’ 에서는, 여가 21호 감상에서도 밝혔듯 묘사의 양이 줄어든 현상을 보인다. 작가로서는 글의 성향이 하나로 정착이 되는 것보다 다양한 시도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지만, 독자로서는 안정적인 글을 읽고 싶다는 희망을 품어 본다.
  
   묘사와 서술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한쪽에 치중한 글이 꼭 잘못되었다고 볼 수도 없다. 즉 묘사가 너무 많다, 라고 하는 것은 양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글에서 요구되는 만큼 이상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심연에서 아름다운 물속 장면이 과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양이 글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닌 것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글에서 힘주어야 하는 부분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중단편선에서 이 글을 다시 읽고 ‘심연’이 인쇄 매체에 어울리는 글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웹페이지에서 읽은 것과 그대로, 출력해 읽은 것과 그대로인 부분도 종이 위에 책이라는 형태를 띤 것만으로 의미가 생생해졌다. 글의 단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손을 많이 보았다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그래도 가끔 튀어나오는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이나 지나친 생략문은 확실히 글의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유영하는 다이버 ‘닐’과 전직 게임개발자 ‘나’ 사이에 서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성립되는 교감을 따라 가는 것만으로도 이 글을 읽을 가치는 있으리라고 본다.

   조금 아쉬운 것은 글을 읽는 내내 여가 ‘나’를 여성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닐’과 ‘나’의 교감을 이성간의 감정으로 읽어낸 모양이다. 작가가 동성애적인 코드를 넣을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작가의 성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입관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분의 건필을 기원한다.


   2. 차를 드시겠어요? - 아비게일

   아비게일 님의 글을 몇 편 이상 읽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비게일님이 음식에 대한 글을 많이 쓴다는 것을 알 것이다. 2004 거울 단편선에 실렸던 ‘마법사의 아침식사’에서도 글의 중심은 음식이었다. 이번 글은 더 나아가 주인공의 행동 중심에 음식을 두었다. 찻집을 운영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찻집을 ‘빵집’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분노하며 침착하게 그 대상에게 복수한다는 것이 내용이라고 한다면, 먼저 주인공의 분노의 원인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대부분 여 자신을 위한 요리지만, 애써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준비했는데 그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분명 상심할 것 같다. 모처럼 누군가의 취향을 생각해서 원두를 브랜딩해서 드립했는데 마신 사람이 별반 감흥이 없다거나 악평을 내리거나 해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차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자신이 끓이는 차에 자부심이 있는 주인공이 자신의 차를 격하시킨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만약 이 전제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 글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비정상적인 집착을 가진 주인공의 병적인 행동에 대한 글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물며 ‘그’는 주인공의 케이크를 격찬하기까지 했고 글의 말미에서 보면 그가 주인공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복수를 준비하는 것이다.

   단순히 짧은 글에 너무 급진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의 길이와 상관없이 완성된 하나의 글은 그 안에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아비게일 님의 글은 음식이라는 소재에 지나치게 가두어져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 물론 한 가지 소재에 몰입하여 그 분야에서 뭔가를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제 혹은 소재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차나 음식에 대한 레시피로, 먹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소중한 재능이지만, 더 나아가 TV에서 다루는 요리 프로그램 이상의 무언가, 비유하자면 “대결 맛 대 맛” 이 아니라 “대장금”을 보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작가분의 신작을 본 지 오래 되었다. 건필을 기원한다.


   3. 판타스틱 권총 - 정대영

   판타스틱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거울에 게재된 글 가운데 하나다. 여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시리즈물이다. 하나 하나를 따로 떼어서 읽어도 괜찮은 글이지만 가능하면 시리즈물을 모두 곱씹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판타스틱’이라는 이름이 이 글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등장인물의 대부분은 여자들이다. 화자는 물론이고 등장인물도,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 여자가 많다. 여자 두 사람의 거리도 자주 다루어진다. 이 글에서는 동창인 두 명의 사람이 등장인물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동경하던 친구여서 결혼조차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여성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빛나는 곳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상. 이미 친구의 범주를 넘어서서 사춘기 때 좋아하는 연예인과 비슷할 정도가 된다. 이성인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 상대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죽음을 택하려 한다. 죽음을 택하려 하는 사람에 대한 대처방법은 이후에 게재된 ‘판타스틱 용서’에서도 다루어졌다. 판타스틱 권총에서는 말리는 길을, 용서에서는 그대로 두는 길을 택한다. 그 어느 쪽도 적극적인 개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권총에서조차 죽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고, 삶을 일 주일 연장시킬 이유를 만들어 줄 뿐이니까.

   작가의 관점은 그렇게 관조적이다. 어느 누구도 가해자라고 말할 수 없는 ‘판타스틱 평행선’에서도 그렇다. 최근에 새로 거울에 게재된 ‘그녀’ 시리즈에서도 이런 시선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해진 느낌이다. 인물의 감정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때로 서늘하게 날선 느낌이 들 정도로 강조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인물의 행동은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하지 않으며 한 걸음 물러나 있다.

   작가가 ‘판타스틱’ 시리즈와 ‘그녀’ 시리즈에서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녀’ 시리즈가 좀 더 나온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일상적인 이야기와 비일상적인 이야기라는 차이 외에 무언가 더 큰 목적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품어 본다.

   작가의 장편에서 일본 라이트 노블을 연상시킬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나고 선명한 스토리가 나타나는 것에 비해서 단편은 스토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장편에서 다루는 스토리가 워낙 스케일이 크기 때문에 단편에선 처음부터 담지 않으시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 시리즈에서는 동일한 주인공이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옴니버스식 이야기가 되는 것인가 하는 기대도 해 본다.  



   4. 스타벅스 기행문 - 로비

   만약 단 한명의 작가와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하루 종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아니 단 한 명의 작가의 머릿속을 완전히 들여다보고 글을 쓸 때의 생각이나 관점 같은 것을 알아볼 수 있다면, 여는 로비님을 들여다보고 싶다. 글 간의 간극이 큰 정도가 아니라 가끔은 동일인이 썼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여가 로비님의 원고를 거울에서 만날 때마다, 여는 긴장한다. 어떤 선입관도 갖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글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다. 그런 중에 이 글을 만났다. 선입관을 갖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음에도 제목에 대해서 선입관을 가지고 말았나보다. 글을 읽으면서 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스타벅스 기행문이라기에 서울에 있는 스타벅스들에 대한 소개문과 감상문이라도 들어 있나보다 하고 어느새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글은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글이다. 인정을 별로 받지 못하는 작가가 글을 쓰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자문하는 이야기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스타벅스 기행문’으로 대표되는 ‘글쓰기’ 자체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스타벅스 기행문을 써 보라고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는 ‘아이’는 검은 외투를 입고 뿔테 안경을 쓰고 군청색 가방을 맸다. 아이라기 보다는 청년에 가까울 외양이다. 그것이 ‘아이’인 이유는 그가 가장 순수한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고, 현실적인 제약도 생각하지 않고, “세상 모든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다”고 말한다. “너에겐 스타벅스 기행문을 특별하게 할 수 있는 욕망이 있어”라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 혹은 유혹, 어떤 이름을 붙여도 좋다. ‘아이’는 그 모든 순수한 동기의 결정체다. 작가가 아이를 만나면서 나누는 대화는 그래서 어른과 아이의 대화가 아니라 ‘순수한 열정’과 ‘현실적인 장애물’ 사이의 충돌이 되는 것이다.

   글에서 스타벅스 자체를 소개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스타벅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앉았다 가고 또 일을 하고 가는 그 곳은 인생의 축약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화자의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힐끔 보고 지나가는 여자처럼 스타벅스 안에 있든지, 혹은 창가에서 친한 성도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수녀처럼 스타벅스 안에 있든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스타벅스라는 배경 안에서 인간들의 여러 가지 삶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스타벅스 기행문’ 즉 사람들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신이 써야 하는가, 쓰고자 하는가, 쓸 수 있는가, 가치가 있는가.

   “세계는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라 이야기들의 총합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라든가 “정말로 글을 쓰게 하는 게 욕망이야? 내가 글을 쓰는 데는 욕망 이상의 것이 필요했어.” 라는 주인공의 말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과 거의 같은 무게로 닿는다. 그래서 아마 작가는 “스타벅스 기행문”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5. 키리에 - 루나벨

   동호회에서 펴내는 작품선에는 어떤 것이 실리는 것이 좋을까. 동호회에서 엄선한 작품이 실려야 한다는 것에는 다들 공감할 것이다. 거울에서는 필자들마다 한 편의 작품을 싣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각자의 작품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추리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지만, 여는 작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실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2004년에 실린 루나벨 님의 글은 4편, 2005년이 2편이다. 그 6편 가운데 작가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난 글은 무엇일까?

   키리에는 예전 21호 감상에서도 이야기 했듯, 중세와 비슷하지만 중세와는 다른 세계의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절대적인 존재에 닿으려 하는 마음을 다루기에 수도사들이란 분명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제례의 순서, 그러나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배경이 이 글에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마치 실제 있을 듯한’은 거기에서 멈추어질 뿐, 정말 실제로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 하게 만들고 만다. 여의 종교가 기독교여서 실제 성당에서 이런 의식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아니 그보다는 이 세계에서 묘사되는 제례와 성전과 수도사들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롭기만 하다는 것 때문이 아닐지.

  현실이 아름답거나 신비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림으로 그려낸 듯이 아름다움이 아닌, 사람들을 압도하는 위압감,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 냄새가 이 글에서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편집에는 실리지 않은 ‘약속’에서도 보여지는 문제점이다. 탁월한 묘사에 놀라워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사람들의 삶이 마치 한 번 체로 걸러낸 듯이 이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주인공 뿐 아니라 다른 인물들까지도 성스러운 ‘신전’을 중심으로 하여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파스텔 화 안의 요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적이다. 하나 하나 이어지는 노래의 분위기나 예식의 분위기, 인물들의 대사, 독백 모든 것이 파스텔처럼 흐릿하게 환상적으로 걸러져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오히려 성스러움과 성적인 것의 아슬아슬한 경계처럼 느껴지는 부분까지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다만 이미 거울 게재시에도 지적한 바 있듯이, 높은 차원에 도달하려 하는 자가 택하는 길이 성적 행위라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의 대리자처럼 느껴지는 고결한 존재를 취하려 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가벼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다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이 글이 가지고 있는 몽환성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성적이기까지 한 위태로운 아름다움은 그래서 양날의 검이 되고 만다.

  많은 연습을 하시는 분이니만큼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건필을 기원한다.


   6. 안개 속에서 - askalai

   여행자의 이야기는 판타지에서 두루 다루어지는 소재다.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충사’도 매력적인 세계관 안을 폭넓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주인공 깅코가 여행자의 신분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키노의 여행’이나 그 외 많은 작품에서도 여행자의 주인공이 세계를 관찰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이런 경우 작품은 옴니버스식 장편이 되기가 쉽다. 한 편 한 편 다른 지역을 보여주면서도 전체적인 세계의 틀은 유지하고, 더 나아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로 아우르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여행자 이야기가 갖추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거울에서도 ‘아홉개의 붓’ 이야기가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옴니버스보다는 장편의 틀에 더 가까운 듯하다.

   안개 속에서는 특이하게도 여행자의 이야기를 하는 ‘단편’이다. 많은 지역의 특이한 곳을 보러 다니면서 어느새 출발지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 여행자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어느날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능청스럽게 자신이 보아온 풍경을 이야기한다. 그 풍경 하나하나가 마치 독립된 에피소드로 다루어 질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다. 그러면서 슬슬 독자는 작가가 결말 부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만나는 것은 ‘안개고등어 떼’의 비행. 신기한 것을 보아 왔던 사람이 이 평범한 마을에는 왜 왔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글에서는 오히려 중간 부분, 주인공이 다른 지역의 이야기를 할 때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의 글투가 워낙 담박하다보니 글이 잔잔하게 격정 없이 흐른다. 어디가 결말인지 어디서부터 긴장해야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찬찬히 읽어가다보면, 안개고등어떼의 비행이라는 경이로운 풍경 앞에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정작 마을 사람들은 안개 고등어 떼의 비행에 대해서 무심하다. 오히려 그것이 가져다 주는 불편함에 대해서 투덜거릴 따름이다. 나그네는 그들의 반응에서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가 지금껏 지나쳐 온 기이한 현상에서도 그 고장의 사람들은 그렇게 반응해 왔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글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사람들이 그저 보고 스쳐 지나가는, 때로는 귀찮아 하는 무언가가 실은 아주 특별한 것이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 글은 작가가 구상하는 큰 장편의 일부분인 것일까.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는 독자로서는 후자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중간 부분의 기이한 마을에 대한 설명이 다소 과한 양념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 글은 편하게 읽어 내려갈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신작을 손꼽아 기다리며 작가분의 건필을 기대한다.


   7. 낙오자 - 은림

   은림 님의 글을 최초로 접한 것이 ‘할머니 나무’였다. 황금 드래곤 문학상에서 단편상을 수상한 그 글은 처음 게시판에서 발견했을 때부터 강렬한 인상으로 닿았고, 작가분의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그 뒤의 작품들에서는 ‘할머니 나무’의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는 최근에 와서야 작가분의 작품 경향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 작품에서 여가 작가분의 특징이리라고 여겼던 것은 그 작품의 특성이었고, 작가분의 장점은 실상 다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전제를 하고 출발하자면 ‘낙오자’는 작가분의 최고 수작 중의 하나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 글은 거울 21호 때 게재되었을 때와는 수정된 부분이 있는데, 이미 완성된 작품이라 해도 과감히 칼을 대어 제련하는 작가분의 용단이 놀랍다.

   상당한 분량의 글인데도 쉽게 읽히는 것은 대사가 글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산만해 질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으면서도 작가분은 자주 이러한 구성을 택한다. 대사가 많으면 읽기에 쉬워지기 때문에 글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은 손쉬워지지만, 서술 부분에서 다룰 수 있는 깊이 있는 접근이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다. 이 글이 ‘열매’로 상징되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심각한 서술 대신 대화를 택한 것은 자칫 이야기가 무거워지면서 독자로부터 멀어질 것을 염려한 것일까.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데다가 이야기의 구성도 복합적이지만 이 글을 읽고 어렵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은 확실히 이런 구성의 덕이다.

   메이든-이그노, 독서가-어머니 의 양대 대립구조가 거울에 게시되었을 때에는 결말 부분에서 어머니가 개입되면서 뭉그러지더니, 이 부분을 옆집의 쟌이 수습하는 것으로 변경하면서 매끄러워졌다. 쟌은 양쪽 어디의 대립 구조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메이든이 또래 친구들에 대한 시각을 수정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쟌은 이 세계의 질서에 가장 순응하며 적응하고 있는 인물이면서도 이그노 쪽이 아닌 메이든 쪽까지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절충적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결말에서 쟌이 수습자의 역할을 맡은 것은 탁월한 안이었다는 생각이다.

  작가분은 21호에 이 글을 실으신 이후 새 글을 거울에 내지 않고 있다. 태양을 삼키다에서 서술면을 보완할 능력이 되심을 보여준 이후가 되므로 여는 매우 아쉽다. 상당히 편차가 큰 작가인 것도 사실이지만 매번 다음 글을 기대할 수 있는 작가라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신작을 기대한다.


   8. 맺으며

   2005년 거울 중단편선의 뒤쪽에 속해 있는 작품 중 7개에 대해서 다루었다. 다른 글들도 개성적이고 멋진 글들이 많은 것은 여가 꼭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

   두툼해진 2005년 중단편선을 받아 들고 다소 당황했었다. 중편이 실려 있다는 걸 생각해도 이 정도라니. 영미판의 페이퍼백 이상의 두께가 아닌가. 어떤 웹페이지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작품집을 이 정도의 양으로, 이 정도의 수준으로 낼 것인가. 자화자찬하는 것이 아니다. 감히 지금 우리나라는, 장르 문학의 단편이 이 정도의 아마추어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이라고 어깨를 세워도 되겠다고 생각해 본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이 필진들 가운데서 신작을 내지 않은 작가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슴 뛰게 만들었던 글들이 오직 거울에서만 알려져 있다는 것도 아쉽다. 작가진들도 20세 이상이 많다 보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서 글을 쓰실 시간이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 독자로서는 아쉽지만, 그저 목을 빼며 기다릴 밖에.

   그리고 더 나아가, 작가분들이 조금 더 자기 글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졌으면 한다는 것을 덧붙인다. 많이 읽고 많이 쓰시고, 심장에서부터 솟구친 글을 써 주시길 바란다. ‘스타벅스 기행문’에서 이야기하는 말투를 빌리자면, 세상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넘쳐 나지만 그 중에 작가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이야기는 일부다. 그 이야기들을 다듬고 다듬어서 하나의 글로 만들어 내 주시기를 바란다. 특별한 무언가, 특별한 하나의 아이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란다.

   앞부분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덧붙인다. 바라건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거울에 게재된 글들 중에 놓친 것이 없는지 한 번 읽어 보십사 하고. 거울 단편선에서 마음에 든 글의 작가도 좋고, 그저 손 가는 대로 글을 잡고 읽으셔도 좋을 것이다. 거울에는 드러나지 않은 많은 글들이 빛을 숨기고 있다. 작가들 중에는 자신의 글이 얼마나 빛나는지 알지 못하고 글을 쓰는 걸 중단하고 계신 분들조차 있다. 아쉽지 않은가.

   2006년 거울 중단편선이 혹시 2권으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기분좋은 우려를 해 보며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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