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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거울의 첫 번째 단편집에 대한 간략한 감상을 이야기 한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거울의 두 번째 단편집을 손에 들고 있게 되었다. 서문에서 진산 님께서 쓰셨던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환상문학단편을 주로 취급하는 사이트가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단편집까지 내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울 일이다. 작품의 수나 분량, 그리고 작품의 수준 역시 다른 아마추어 문학 사이트들의 작품집 무엇과도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이니, 한 발이나마 담그고 있는 사람으로서 으쓱한 기분이 된다.

   첫 번째 단편집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의 매호 업데이트를 보면서 여(余)는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디서 이 많은 작가들이 숨어 있었을까. 입소문이 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편집자께서 열심히 홍보를 하신 덕인지, 단편을 들고 나타나는 작가들도 늘었고 독자 단편란에도 꾸준히 단편들이 올라오게 되었다. 시일이 지나면서 자연히 쇠퇴하지 않을까 하는 체념이 빗나가 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매호 업데이트 되는 시간을 기다려 작품들을 하나씩 곱씹어 읽어 내려가면서 여는 때로 기뻤고 때로는 슬퍼하며 거울과 함께 시간을 보내어 왔다고 자부한다.

   이렇게 또 한 해가 흘러 거울의 작품들을 모아 만들어낸 두 번째 작품집이니만큼 버릴 작품도 거의 없고 많은 작가의 작품 하나씩을 뽑아낸 덕분에 개성도 강한 멋진 물건이 되어 주었다. 단편집에 실리지 않은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작품도 몇 편 있었으나, 일단은 단편집 감상이라는 임무를 맡은 만큼 단편집의 글에 한정을 하도록 하자. 모든 글을 짚어 가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그 중 몇 작품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글 들 가운데 절반 정도만을 이번 호로 나누려고 한다. 초청 단편은 거울에서 평하는 것이 예가 아닌 듯하여 일단은 제외하겠다.


   1. 우수한 유전자 - Ida

   거울의 2005년 중단편선이 다른 환상문학 계통의 아마추어 작품집들과 구별되는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다른 곳이라면 SF로 분류되었을 법한 이야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환상문학의 범주를 넓게 잡는 편이므로 이런 글들 모두가 이 중단편선에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이트의 대표적인 글들을 모아 만드는 작품집에 이런 글들이 상당량 실려 있다는 것이, 거울에 실리는 단편 원고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처음 실린 이 글은 올 한 해 거울에 실린 글들 가운데 가장 격렬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던 글 중의 하나다. 고딕체로 된 서간문체의 글과 3인칭의 글이 나란히 이어지면서 극적인 반전까지 독자를 ‘오인’하게 만드는 방식이 놀랍다. 복선을 정밀하게 숨기고 어쩌면 고전적인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병렬적인 서술을 통해 마치 같은 시점의 사람이 다른 시간대에서 한 사건을 서술하고 있는 듯이 이끌어 나가다가 가장 극적인 순간에 독자가 읽어온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이 스쳐 지나온 많은 복선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의 괴리가 극단에 달했을 때, 양자의 극단에 서 있는 두 세계의 갈등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녹여낸 작가분의 솜씨에 대해서는 여전히 경의를 표한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등에서 다루어 진 적이 있는 이런 대립구조는 자칫 진부할 수도 있는 소재이지만, 이 글은 그 진부함을 뛰어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1인칭의 서간문과 3인칭의 서사는 모두 감정적으로 다소 고조되어 있다. 그래서 1인칭의 어투가 다분히 여성적이며 3인칭에서의 중심 인물인 젊은이가 남자라는 이질적인 부분을 독자는 쉽게 무시하고 읽어 내려간다. 글의 말미에서 이 구조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 순간, 그래서 다시 글의 초반을 훑었을 때 쉽게 발견하게 되는 차이점이다.

   독자를 착각하게 만들어서 끌고 가다가 글의 후반에서 강렬하게 뒤집는 구성이 바로 이 글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반면 이것은 또한 이 글의 발목을 잡는 방식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해두고자 한다. 지난 번 이 글이 거울에 게재되었을 때에 밝혔다시피 글의 서두에서 독자는 이 글이 낙후된 지역과 발전된 지역의 이야기임을 전제로 하고 글을 읽게 된다. 그래서 ‘키바’를 방문한 ‘스카이돔’ 젊은이의 안타까운 절망을 주제로 하는 글을 계속 읽을 것인가 갈등하는 시점이 올 수도 있다. 독자가 글의 말미까지 읽어 내려가게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글의 진가를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게 된다. 단편에서 글의 반전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 반전의 시점까지 독자를 끌고 갈 수 없다면 곤란하다.

   글의 주제면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지난 번 거울 게재 시에 이야기했으니 이번에는 줄인다. 만일 글의 주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단편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이렇게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단편 역시 하나의 독립된 글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근거할 때에 주제를 알 수 없는 글은 독자를 탓하기 전에 작가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여는 2005 거울 중단편에서의 첫 글로 이 글을 다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기뻤다는 말을 드리며 이 글에 대한 짧은 감상을 줄인다.  


   2.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 - fool

   fool 님이 거울에 처음 필진이 되셨던 2004년 11월, 이 글을 처음 읽으면서 느꼈던 강렬함을 다시금 떠올렸다.

   비 장르 문학의 세계에서 글 속의 ‘이야기’라는 것은 이제 처음 소설이라는 장르가 나타났던 시기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느냐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시기를 지나 지금은 소설에서 이야기라는 것이 반드시 꼭 필요한가 하는 논의까지도 지나온 시점이다. 소설과 시의 경계, 소설과 수필의 경계를 짓기 어려운 글들도 많다. 어떠한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설은 이러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어려운 시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장르문학의 세계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아마추어의 글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급급하고 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서사구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거나, 혹은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 자체를 알려주는 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이 방식이 과연 효과적인가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장르의 필수적인 부분인가. 환상문학이라는 범주를 조금 좁혀 소위 말하는 ‘판타지’라는 장르로 한정 지었을 때에 소설은 반드시 어떠한 새로운 세계를 근거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사람들이 공장제 소설을 폄하하는 이유는, 그 세계가 비슷비슷하고 독창적이지 않기 때문인가. 그들의 이야기가 다 비슷비슷하고 독특하지 않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 소설 역시 높이 평가할 이유가 없어진다. 인간이 기계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를 다룬 것이 어디 이 소설뿐이었는가. 인간이 기계로부터의 해방을 이루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인류가 수정란을 실은 우주선을 탐사 목적으로 파견하는 세계는 그렇게 독특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독자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 더 나아가 단편 작가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단편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유심히 보아야 할 글이기도 하다. 인간이 기계로부터 독립해나가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독립하는 아들의 이야기로 겹쳐진 순간 이 글은 단순히 흔한 우주 탐사선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태고 적부터 다루어진 평범한 주제가 신화적인 모티브와 중첩되면서 풍성해진다. 작가는 ‘페넬로페’(거울 21호 수록)에서도 이와 같이 신화를 SF와 결합시켰는데, 이런 원형적인 부분이 글을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이 글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플롯의 구성이다. 과거의 중첩, ‘기계’의 목소리와 짧고 간결한 서술이 건조할 만큼 핵심만을 짚어 내려가면서도 인간의 분노는 모자라지 않게 담겨 있다. 기계의 목소리는 어머니가 자식을 보는 집착과 겹쳐지고, 인간의 반항은 아들이 어머니께 느끼는 반항과 중첩된다.

   지나치게 마지막까지 복선 하나 없이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것이나, 인간의 행동을 단순한 반항으로 치부할 수 있게 만드는 건조함이 이 글에서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젊은이가 처음 바깥 세계를 보았을 때만이라도 바깥이 ‘어머니’가 보여주는 내용과 다른 상황임을 알 수 있는 힌트를 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읽은 8월의 ‘화성의 십자가’ 이후 작가의 신작을 보지 못했다. 많은 작가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신작을 기대한다.


   3. 입적 - 정소연

   ida 님의 ‘우수한 유전자’와 같은 19호에 실렸던 글이다. 전반적으로 글투가 비장르문학에 가깝다. 장르라고 해서 꼭 그러라는 법칙은 없지만 글투는 작가가 읽어온 글들에게서 영향을 받기 때문인지, 판타지나 SF쪽으로 분류되는 글들은 대개 건조한 번역체에 가까운 문투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가 무협을 잘 읽지 못하는 이유는 무협 특유의 글투 때문이기도 하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 예전부터 무협을 잘 읽지 않았기 때문에 글투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점점 더 읽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글은 여가 매우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다. 전반적으로 따뜻한 시선이 흐르는 글에, 이야기조차 따뜻하다. 전쟁과 살육에 관한 이야기,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총부리가 겨누어 지는 이야기인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긴박함보다는 막막할만큼 처연한 무언가가 이 글에 흐른다. 인간적인 시선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르 귄을 읽을 때처럼 유려하고 화려한 느낌은 아니지만 정갈하고 단정하게 글을 써 내려가는 작가의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글이다.

   글은 그렇게 높낮이가 없이 부드럽고 유려하게 흘러가, 마지막의 결말까지 닿는다. 이 글의 마지막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총구를 들이대는 친구 남편의 모습에서도 놀라지 않았던 심장이, 한 줄의 대사로 쿵쾅거리며 뛰었다. 여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이것은 작가가 중단편집의 소개글에서 밝혔듯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용기이지만, 개인적인 것만은 아닌 용기다.

   이 책의 초반 세 글이 모두 다 그렇게 특이하지 않은 소재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앞서 말했던 두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페이아 인’, 지구에 섞여 살아가는 장수 종족이란 얼마나 많이 다루어졌는가. 이미 여가 단편 감상란에서 밝혔듯이 우리나라의 장르물이나 외국의 장르물 할 것 없이 오래 사는 종족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다루어진다. 이미 판타지에서 한 전형으로 고착화 되어 버린 것 같은 ‘엘프’ 들도 그렇다. 작가의 개별적인 취향이 곁들여지기는 해도 자연을 사랑하며 고결하게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종족은 이미 서양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 종족 자체와는 달라진 후다. 요정같다는 말은 원래 서구에선 미인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특이하고 기이하게 생겼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엘프같다는 의미는 세상을 초월한 아름다운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일본 전설에서 등장하는 ‘인어’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서구에서 이야기하는 인어와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보다 오래 살며, 때로 탐욕스럽고, 그 살점은 불로불사를 보장한다. ‘다카하시 루미코’가 ‘인어’ 시리즈를 통해 형상화시키면서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 냈다. 이미 존재하는 환상적인 존재로부터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시킬 때에, 불로불사라든가 장수라든가 하는 것은 작가들이 쉽게 매력을 느끼는 소재다.

   하지만 원래의 소재들이 매력적이라고 해서 2차적으로 탄생되는 것들이 매력적이라고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판타지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엘프들이 다 매력적이었는가. 똑같이 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톨킨의 엘프와 미즈노 료의 엘프와 이영도의 엘프는 서로 독자적으로 팬들을 만들어 냈고 그 아류 엘프들을 탄생시켰다. 여러 게임에 등장하는 엘프와 수많은 공장제 장편 판타지 소설과 만화에서 등장하는 엘프들, 그 많은 엘프들 중에 매력적인 것은 몇이나 될까. 중요한 것은 원래 어떤 소재에서 출발했느냐가 아니라 작가가 그 소재를 얼마나 자기의 것만으로 가공해 내고, 글 안으로 완전히 녹여 내느냐의 문제다. 깊은 슬픔으로 죽어 버리기도 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위해 무한의 생명을 포기하는 톨킨의 엘프, 별을 바라보면 별빛이 되는 이영도의 엘프. 그들은 글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생기있는 존재들이었지만 아류들은 그렇지 못했다. 독특함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와 함께, 글 안에서 그들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종족을 고유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페이아 인’은 그런 존재였다, 고 감히 말한다. 단지 오래 살 뿐이고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하는 나약한 존재들, 수백 년이고 수천 년이고 모든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페이아 인의 기분을 우리가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차라리 공포에 질려 총을 겨누는 정희의 남편이 아닌가. 그렇지만 우리는 그저 살아남으며 모든 것을 지켜보는 페이아 인 지윤이나 전쟁을 지나오면서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주부인 정희가 살아있고 생생하다고 느낀다. 페이아 인의 설정이 독특해서가 아니고, 이 글에서 페이아 인은 마땅히 필요한 존재였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은 기적을 위해서는, 나약할 수 밖에 없는 고아를 자기 아이로 거두어 키우려는 지구인의 용기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페이아 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윤은 페이아 인이기 때문에, 그 정희의 용기까지도 기억할 것이다 라고, 그러니 그들의 사랑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라고.

  거울 단편 감상에서 드렸던 말씀을 다시 덧붙인다. 소재가 글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글의 내용이나 소재는 그것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르라는 한계에 매어 있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이미 세계문학에서는 비장르에서도 장르적 성격이 혼재된 글들이 늘어나고 있다. 장르와 비장르를 초월한 작가의 감수성이 빛나는 글을 보았으면 한다.

  아쉽게도 거울에 게재된 걸은 이 글이 전부였다. 차기작을 쓰지 않으시는 것인지, 혹 계속 다듬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목을 빼고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


   4. 밤 너머에 - jxk160

   거울의 15호에 올라왔던 글이다. jxk160 님은 거울의 필진들 가운데서도 가장 불친절한 분들 중의 한 분이다. 독자들에게 글을 던져줄 뿐 뭔가 설명하거나 해석해주지 않는다. 문장 역시도 불친절하기는 마찬가지어서, 때로는 문장 중간이 툭 하고 잘려나가거나 지시어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독자가 글을 읽게 만드는 흡인력은 다소 부족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상징들과 복선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글을 읽는 초반에는 글이 산만하다고 느끼기 쉬우며, 인물들은 대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늦어서 인물간의 차이를 파악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조금 인내심을 가지고 읽다보면 재미있어 질 거라고 말할 수도 없다. 여의 주변에는 작가를 지망하거나 이미 아마추어 작가인 사람들이 많아서 여는 종종 친우들에게 거울의 글들을 읽어 보라고 권하는데, 이 분의 글은 추천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읽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힘들어서,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앞에서 말한 작품 셋이 소재보다는 구성과 주제로 빛나는 글이라면 이 글은 사실 소재 자체의 매력이 가장 큰 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독립된, 철저하게 만들어진 가공의 세계 속에서 인간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들이란 존재론적이고 때로 철학적이며, 때로는 종교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단편이라는 양식에서는 다루기 힘든 복잡한 이야기를 작가가 선호하다보니 글은 대개 중편의 분량을 가지게 되지만 그나마 중편으로도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추상적이어서 선명하게 잡히지 않고, 작가는 단지 독자에게 미루어 짐작하게 할 뿐이다.

   이성이 강조된 사회,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혼자 살고, 2명까지는 불법이 아니지만 3명은 함께 살 수 없다. 부부와 그 자녀라는 3인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인물들의 집착이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감정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하며 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철저하게 이성적인 부분, 재능과 성과에 의한 것이다.

   외부의 생산으로 이루어지는 다분히 비생산적인 사회라는 설정 자체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하늘에 떠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이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 보통 생산 사회의 사람들은 피나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사회 내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당연히 생각하고, 외부 세계를 멸시하거나 혹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똑같이 이런 근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의 설정이 독특하게 된것은 이 세계가 그렇게 낙원처럼 보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이성만으로 평가받는 이 세계의 인물들은 서로 기대어 살아갈 수조차 없고,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위원회의 인물들도 그다지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약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나약한 사람들도 있다. 무채색의 옷을 입고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은 그림자처럼 옅어서,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결말은 종말 외에는 없어 보이기조차 한다.

   이러한 잿빛 세상에서 개성도 그리 강하지 않은 인물들은 존재론적인 의미에 부딪힌다. 삶과 죽음. 무거운 이 주제에 대해서 작가는 예상 외의 결론을 내려놓았다.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가,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죽음이란 전제는 옳은가. 이 사회에서 죽었다고 판정받은 샤뮌이 후계자도, 종교도 구원해 주지 못했던 셴을 속죄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는 죽음의 판정 이후에 비로소 기다리게 되었고, 누구에게도 응답받지 못했던 셴은 그에게 응답했다. 이 결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늘 그러했듯이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자칫 단순해지기 쉬운 단편과 중편이라는 장르에서 jxk160 님의 서술 방식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평이하게 읽어내려가는 글에 식상하고 있는 독자라면, 장르란 그저 쉽게 한 번 읽고 넘기는 글이라고 폄하하는 독자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하다. 이 글은 난문이다. 툭 던져지는 심도깊은 질문에, 독자들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5. 어떤 미운 오리새끼의 죽음 - bluewind

   성형수술이 일반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여서인지, 외모 지향주의가 TV나 여러 매체를 통해 날로 팽배해가기 때문인지, 거울 중단편에서도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소재를 유전자와 성형이라는 소재와 결합시킨 내용이 두 개 나란히 실려 눈을 끌었다.

  bluewind 님은 글을 상당히 평이하게 쓰는 분이다. 문장을 깊이 꼬아놓는다거나 심각한 상징을 넣는 법이 없이 독자가 읽기 쉽게 편하게 써내려간다. 서술 구조는 명쾌하고, 1회독 했을 때에 내용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난해함과는 거리가 멀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일수록 독자는 파악하기가 쉽고, 그만큼 글의 단점이 더욱 부각될 위험이 있긴 하지만 글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도록 하는 흡인력이라는 면에서 생각해보면 bluewind님의 글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단편은 짧은 글이다. 하지만 그 짧은 글이라도 마지막까지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힘을 갖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긴장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휘몰아칠 것인가, 간결하게 리드미컬하게 진행할 것인가, 혹은 담담하게 감정을 따라 이어질 것인가, 그걸 선택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bluewind님은 1인칭의 시선에 따라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는 가장 평범한 쪽을 택했다. 읽는 사람도 부담 없고 쓰는 사람도 괴롭지 않은 방식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주인공인 ‘나’의 행동이 자신이 받아온 피해 때문에 터지는 반발이라고 하더라도, 결말인 파국으로 이르는 데 필연성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선택한 파트너들이 자신의 미래를 망칠 수 있다는 점을 주인공은 간과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 글은 한 인물이 피해의식으로 버둥거렸지만 결국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다고 해석될 위험이 있다. 자신을 괴롭혀 온 ‘친구’들을 테러의 희생양으로 삼아 하나씩 죽여갈 정도의 잔인함, 그러면서 그 돈으로 자신이 그 ‘친구’의 자리에 서려는 것은 주말 드라마의 악역과 상당히 닮아있지 않은지.

   해피엔딩이 당위적인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좀 더 명확하게 출발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작가는 혹시 이러한 세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유전자 조작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시대에 뒤쳐진 퇴물로 그리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일까. 주인공의 비극에 가슴 아파 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주인공의 행로는 달라졌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물론 스토리의 전개는 작가의 몫이다. 여는 단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맞게 스토리의 전개를 해 나가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말하는 것뿐이다. 유전자형을 결정해서 아이가 태어나는 세계를 긍정하고자 했는지 부정하고자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잘 알 수 없다. 작가분의 건필을 기원한다.


   6. Jumping Child - crazyjam

   책에 실린 페이지로 10페이지 정도, 213페이지에서 226페이지까지의 이 단편소설은 단연코 말하지만 이번 중단편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 중의 하나다. 특히 점핑 보드를 타고 날아오르는 장면들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해서, 정말 이런 보드가 있으면 빌딩과 빌딩 사이를 날아서 넘고 싶다는 느낌까지 갖게 한다. crazyjam님의 여러 글 중에서도 이 글은 독보적이다.

   두 개의 사회인 테라와 바나마가 있다. 문명화 된 테라는 이름처럼 지구를 암시한다. 그리고 바나마는, 아직 문명화되지 않아서 낙후되었다는 느낌이 강한,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물과 소금으로 가득한 바다가 있는 곳이다. 테라의 사람들이 스피릿을 잃고 물질 문명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반면 바나마의 사람들은 낙후된 세계에서 테라를 동경하며 살아간다. 이런 양자의 대립구도는 단편에서 주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이며, 또한 제대로 사용했을 경우 매우 효과적이다. 자칫 잘못하면 진부해 질 수 있는 방법인데도 작가들이 종종 이런 구조를 사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쿤’은 지금껏 등장했던 많은 소년들 가운데 가장 소년답고, 또 가장 아름답다. 바나마를 찍기 위해서 찾아온 ‘데릭’은 청년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이미 성년이라는 느낌을 가지는 반면 ‘쿤’과 그 주변의 바나마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소년에 가깝다. 그들은 바나마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모르고 ‘데릭’이 그 곳의 사진을 찍으려는 것에 의아해하지만 그들 자신은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기꺼이 이웃의 수술을 위해 없는 돈을 쪼개어 나누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날개를 버렸지만 날아오르는 법을 알고 있다.

  작가는 쿤의 감정에 완전히 동조하듯이 밀착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종일관 쿤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날개가 돋아나는 ‘병’을 가지고 있는 쿤이 수술을 받아 날개를 잃게 되는 것이 비극적인 결말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 속 신화에서 말하듯이 바나마인들은 스스로 땅으로 내려섰다. 그들은 하늘을 날아오르며 땅에 발을 디디지 않는 생활을 버리고 땅 위의 인물을 택했다. 그것은 포기라거나 패배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하늘을 나는 날개 대신 땅 위에 발을 디디면서 날아오르는 쪽을 택했다.

   fool 님이 작가를 르 귄과 닮았으면서도 르 귄과 다르다고 평하신 적이 있다. 여 역시 그 점에 동의한다. 충분히 따뜻하고 촉촉한 목소리로, 그러나 눅눅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솜씨도 훌륭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부드럽게 녹여내는 능력이 더욱 놀랍다. 그래서 여는 압도적으로 화려한 문체도 아니고 웅장하거나 세밀한 묘사를 내밀지도 않는 이 글이 단편집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고 감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년다운 풋풋함으로 하늘을 동경한 ‘쿤’이 지금의 소년다움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작가분의 신작을 고대한다.


   7. 고양이의 언어 - 아르하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애완동물이라면 역시 개 쪽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 그것도 장르 소설에서 가장 대중적인 애완동물이라고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등장하는 비율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개보다는 고양이쪽이 훨씬 대중적인 것처럼 보인다. 독립심이 강한 동물이어서인지 창작자들의 집에는 고양이 쪽이 더 많은 듯하고, 그를 반영하듯이 글에서 고양이가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멸망한 고양이를 새로 번식시키기 위해 시간여행을 반복하는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생각해 보면, 작가들에게 고양이나 개와 같은 동물들은 이미 가족과 비슷한 동반자로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르하 님의 글에서는 종종 지나친 구어체 표기들이 눈에 띄곤 한다. 일문이나 영문 번역투의 문장도 종종 생경하게 드러나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도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반하게 되어 글을 읽곤 하는데, 이 글도 그랬다. 함께 지내던 고양이 지지의 죽음 때문에 쓰게 되었다는 이 글에서는 시종일관 고양이라는 존재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묻어 있다. 고양이는 멸망한 뒤고 사람들이 흉내내어 만든 전자고양이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 인물들은 존재할 리 없는 고양이가 실제 있다고 믿는 쪽을 택한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들은 실망하기보단 아아 역시 그랬구나 하고 체념한다. 그들 역시 이미 마음 한 구석에는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사라진 것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 이미 아무리 그리워해도 고양이는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 글이 좀 더 다듬어져서 완성도를 높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작가분께 바라는 것은 이 글을 쓰실 때와 같은 그 시선을 잃지 않아 주십사 하는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설사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더라도 꿈을 버리지 않는 마음을 말이다. 작가분의 건필을 기원한다.


   8. 달과 육백만 달러 - 곽재식

   평범한 남자가 맞이하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새로운 국면. 작가분의 말대로 공포와 경악은 아니더라도 한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남자가 만나기에는 충격이 클 이야기가 이 글의 출발점이다.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의 딸을 낳았고, 그 딸이 지금 자신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는 그래서 여자를, 자신의 젊은 시절의 사랑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연구와 일에 전력을 다해온 남자를 1인칭 주인공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지 글은 전반적으로 구어체이고, 남자의 감정을 거의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낸다. 이런 방식은 가독성을 높여주는 점이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글을 산만하게 만들 수 있다. 사건 하나하나를 주인공과 같은 시점에서 보다 보니 스토리가 일관되게 흐르지 않고 이리 저리 뒤숭숭하게 흘러가다가 끝나는 느낌을 줄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10대 소년 소녀들의 소설 중에 1인칭 주인공 시점, 그것도 이 글처럼 작가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느껴질 정도로 주인공에 밀착되어 있는 글들의 비율이 높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그냥 감정에 따라서 흐르면 될 것이라고, 쓰기 쉬운 방식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실상 주인공의 시점에 일치되어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도 글의 배치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인공이 모르는 것은 독자도 모르는 것이지만, 주인공이 무심히 넘겨보는 시선 안에는 복선이 깔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된 척 하면서 주인공 주변의 세계를 세밀히 구성해 나가야만 한다. 또한 자칫 결말까지도 평이해 질 수 있는 문제를 딛고 글을 마무리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이 글은 1인칭 시점을 사실적으로 구사하면서 인물을 생동감있게 구성하는 데는 성공했다. 단지, 어른에 한해서다. 작가가 바라보는 아이는 그 나이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어색하다. 어쩌면 어른 남자가 허용할 수 있는 고민 수준의 어린 아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아이를 제외하면 다른 어른들은 짧게 등장하는 인물들까지도 무척이나 사실적으로 생생해서 놀라웠다. 오히려 ‘내’가 회상하는 그녀가 덜 사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개인적으로 여는 최근의 거울에 올라온 ‘낙하산’을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다. 작가분은 글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흡인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이 글 역시도 우수 단편으로 선정되었을 때 이미 편집장이 말한 대로 뒷부분을 기대하게 만들면서 글을 읽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글을 마지막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의 결말이 때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 글은 과거의 연애 경험을 근거로 미래라는 양념을 입혀 그럴싸하게 포장한, 무늬만 소설인 수필에 지나지 않을 위험을 가지고 있다.

   독자를 사로잡는 흡인력이 있으신 분이니 좋은 결말을 내실 능력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낙하산’이나 ‘하얀 이빨’ 등에서 보여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더욱 좋은 글을 써 주시길 부탁드린다.


   9. 맺으며

   일단 전반의 글들 가운데서 몇 가지를 추려 이야기했다. 지난 거울 단편집때도 말한 바 있듯이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다른 글보다 미진하다는 의미는 아님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나머지 후반의 글들은 30호를 기약하려고 한다. 어떻게 하다보니 차례 란에서 앞부분만을 골라 낸 듯 되었지만 다음 호에도 어쩌면 전반 글이 하나정도 포함될 지도 모르겠다. 한 호에 원고를 줄여 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이야기를 뺄 글들도, 짧게 언급하기만 할 글도 거의 없어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 해의 단편집 단평을 썼을 때를 생각한다. 그 때 여는 필진들이 점차로 늘어가고 있는 사실에 기뻐했으며 몇 개의 글들이 다음 단편선에 들어가지 않을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 정말로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글도 있고 빠진 글들도 있지만 그만큼 거울의 글들이 풍성해 지고 있다는 의미겠다.

   할 말의 대부분은 30호로 미루어 두고, 이 말만 일단 해 두겠다. 필진들도, 이 사이트를 찾아온 사람들도, 모두들 찬찬히 이번의 단편선을 읽어 주십사 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읽는 글과 책으로 묶여 나온 글은 느낌이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거울에 여태 올라온 많은 글들을 천천히 맛보시길 바란다. 어쩌면 단편선에 올라오지 않은 보석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고, 거울 단편선에서 처음 만난 작가의 팬이 될 지도 모른다. 읽을 만한 장르 단편이 여전히 많지 않은 지금, 거울에서 그런 기회를 만난다면 그건 분명 굉장한 행운이 되지 않을까.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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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xk160 05.10.30 12:07 댓글 수정 삭제
    거울 중단편집을 어떤 분께 드려봤다가, 우수한 유전자 중간까지만 읽고 뻔하다고 그만 두시려는 걸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런가? 그래도 끝까지 한번 봐...' 설득시켜서 읽게 만든 기억이 납니다. 역시 끝까지 읽고는 우와! 하는 반응이 나왔습니다만... 맞아요. 이거 중간에 접는 분들도 계실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 때 했습니다 T.T

    하지만, 거울 단편집에서는 혼자 나왔지만, 원래는 연작 중의 일부라 혼자 있는 작품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번 전자책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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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5.10.31 17:02 댓글 수정 삭제
    정정합니다.
    필진 성함이 잘못 표기되었었습니다.
    이리스님이십니다.
    이리스님과 해당 필자분, 이미 읽으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