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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멀리 가는 이야기

2005.10.29 18:5910.29





zelaznied@yahoo.co.kr

일찍이 아시모프가 갈파하신 바 독서에 최적화된 테크놀러지인, 종이책으로 읽지 못하는 게 무척이나 안타깝고 아쉬운 책이었다. 한 장 한 장 캡처해서 인쇄해다가 묶어버릴까, 그래서 두고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척이나 즐겁고 포만감으로 가득한 독서 경험이었다. 아마 부활한 인간을 본 로봇들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SF의 S도 모르면서 목소리만 큰 짝퉁들의 범람 속에서, 찬란한 오오라에 감싸인 채 침묵하고 있는 원본을 대했을 때의 느낌. 그 느낌을 되새기며 부끄러움을 이기고 두서없는 감상을 무딘 펜끝으로 주절거려 보았다.

*

1. <촉각의 경험> : 反인본주의를 통한 인본주의의 추구
과학이 인간의 허구적 전통적 존엄성을 산산조각 낸다면 과학소설은 그 속에서 깨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근대 과학의 눈으로 본 인간은 탄소 화합물을 기반으로 한 유기물질의 혼합체에 불과할 뿐이다. 신의 숨결도, 魂魄도, 아트만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한다고 일컬어지던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제하고 났을 때, 오히려 인간 자신은 그 안의 고귀한 무언가―――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무언가를 꺼내어 보인다. 어둠을 향해 홀로 중얼거리는 밤 인사가 그렇고 기억의 마지막 조각까지 파괴된 사나이의 더듬거림이 그렇고 오로지 자기 손가락의 자기 손바닥 더듬거리는 촉감만 느끼던 한 고깃덩어리의, 죽기 직전의 폭발적인 기쁨이 그렇다.

그것은 아마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약하고 보잘것없고 하잘것없고 비천하고 한 마디로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들어 별을 보고 귀를 열어 노래를 들으려 노력하는 존재, 즉 그 한없이 가련한 유한함 때문에 오히려 무한히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나 할까.

인간의 유한함은 두 번째 단편에서 감각의 제한으로 나타난다. 여섯 번째 감각이 아니라 다섯 번째 감각이다. 하지만 이 감각의 제한, 감각의 부재는 곧 감각의 확장-인식의 확장의 역전물이다.


2. <다섯 번째 감각> : 의식의 확장
과학소설은 일상 속에서 제한받는 인간의 의식을 인식의 한계 바깥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다른 장르에서 줄 수 없는 감동을 담아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웰즈가 이미 1)에서 반박한 명제―――과연 장님 나라에서 애꾸가 왕이 될 수 있을까―――의 변주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그러나 종국에는 시각 장애인과 정상인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마치 우리가 4차원 이상의 세계를 2차원-3차원의 사고 실험을 통해 유추하듯이, 현재 우리가 갇혀있는 감각/인식의 테두리 바깥을 향해 말문을 연다.

그리고 그 순간 SF는 서구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의 한계에 대해, 그 바깥에 대해, 종교에 대해, 철학에 대해, 아니, 과학이건 종교건 철학이건 그런, 이름을 가진 무언가의 틀로 잡을 수 없는 이름 없는 전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정교하고 탄탄한 논리적/과학적 정합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세계 전반에 형이상학적 혹은 신비주의적 기운이 감도는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작가 자신이 유물론보다는 유심론 혹은 관념론의 손을 더 들어주고 싶은 건지도.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유비추론에 의한 인간 인식의 확장 혹은 능력의 진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초인물이 자아의 발견과 회복에 관한 언급이 될 수 있겠으나, 다수의 초인물들이 말 그대로의 超능력-확장된 능력의 화려함에 가려 그 의미가 무색해지는 면을 극복하기 힘들었던 데 비해, 현실 세계-독자들에 비해 하나의 감각이 감해진 세계 속에서 그 잃어버린 감각을 찾아나서는 이 소설은 한 인간의 자아 회복 과정을 그야말로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재미는, 일상과 다름없이 느껴지는 소설 속 세계가 사실은 정교하게 구축된, 하나의 감각이 제외된 세계임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데에서 오는 인식의 전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수록작들 면면에서 느낄 수 있는, 치밀하게 조율된 서술의 힘이다.


3. <우수한 유전자> : 인식의 전환
이 작품이 빛나는 이유는 내용과 형식이 오로지 주제를 향한 순수한 융합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뜩이나 제한된 우리의 의식은 이데올로기 혹은 담론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제한되어 있다. 일시적인 것을 영속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화자의 소속에 대한 독자들의 오해 역시 서구 근대 과학의 시선에 뼛속까지 물든 우리들로서는 당연한 일, 그런데 그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순간, 화자의 은폐와 폭로라는 기교가 불러일으키는 아찔한 충격-화자와 대상, 상부 계층과 하부 계층 사이의 위계적 역전-의 에너지는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 진정한 진보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작품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독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내키고야 만다. 아마도 마지막 문단을 읽고 난 독자는 한동안 두개골이 활짝 열리는 듯한 아찔하고 아연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으리라.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관념론 혹은 유심론, 뭐라 부르든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라는 작가 개인의 취향이 이 작품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 뉴에이지나 신과학, 그 아류들을 통해 진부해진 그 비전이, 독자의 머릿속에 불러일으켜진 실천적 반성의 불꽃을 감하는 듯한 느낌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4. <종의 기원> : 역전과 낯설게 하기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기형도, <소리의 뼈> 中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식의 전환은 세계의 역전으로 이어진다. 역전된 세계는 대상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동반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생명과 非생명이 역전된 세계에서 생명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지금까지 결코 서보지 못했던 관점에서 그 본질을 조망하게 된다.

유기물 기반의 생명이 과연 성립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회의하는 로봇들의 모습에는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손으로 만지고 혀로 맛보는 것 외에 다른 감각이 존재할 수 있을지 회의하는 <다섯 번째 감각>의 일반인들의 모습이 겹치지 않는가? ‘길 양쪽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밭 사이사이마다 성냥갑처럼 납작한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고 '지붕은 밀짚으로 덮여 있었고 벽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반쯤 벌거벗은 아이들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도랑을 맨발로 뛰어다니’는 키바의 삶에 대해 연민을 넘어 절망하는 스카이돔의 양복쟁이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는가?

그러나 이제는 감각의 문제, 행복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세계의 기반이 생명이라면, 생명과 비생명이 역전된 회색 도시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뒤집혀 있다. 이 역전된 거울상 속에서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事相들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뒷면들을 보여준다. 로봇과 인간, 기계와 생명, 생물과 무생물, 오염과 보존, 과학과 종교, 학문과 비학문, 사실과 공상, 신념과 편견……. 낯설게 하기란 기실 섬세히 보기. 이미 청각이 빠진 세계를 정밀하게 그려냈던 필력은 현실 세계의 거울상을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기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차갑고 어두운 도시 한 복판에서 작가는 생명의 불가사의함을 이야기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이라는 우주적 원리에 홀로 대항해서, 조그맣고 나약하지만 동시에 위대한 떡잎 한 장을 피워 올리는 풀씨의 모습.

<멀리 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작품은 앞의 <다섯 번째 감각>과 뒤의 <종의 기원: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그건 사실 이 작품은 <회색도시>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던 웹진 거울에서 이미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중단편집의 백미는 단연 본작이다.

아직도 처음 거울에서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을 생각해보면 심장이 살며시 두근거린다. 하위 요소의 치환이 아니라 계 전체의 역전인 세계, 넌센스의 영역으로 내몰린 속에서 그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홀연히 그 본질을 펼쳐 보이는 생명.

(물론 후속편에서 보다 심화되는 ‘창조주의 피조물로서의 존재’라는 주제 의식이 소설의 주요 의미항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앞선 작품들―――이어서 이야기할 <미래로 가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과는 달리 정신우월주의랄까, 유심론적 주관주의의 편린 없이 객관적인 시선으로 종교적 영역까지 파고들었다는 점은 수록작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고, 특히나 (후속편이 있긴 하지만) 가장 나중에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작품들에 대한 배가되는 기대로 환희작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로봇에게는 치명적인 ‘생명의 환경’과 생명에게는 치명적인 ‘로봇의 환경’ 두 상반된 세계 사이의 갈등이 스토리 전개에서 치열하게 반영되지 않은 점. 후속편에서 케이의 반항을 통해 소설 속 갈등은 첨예해지지만, 그것은 신학적 철학적 차원에 경도되어 있어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이데아의 강림으로서 인간의 모습 앞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열광하는 로봇들의 모습을 보면 자신들의 차갑고 어두운 세계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을 위해 넘겨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은 전편에서는 가능했던 갈등의 발전은 아니니까.


5. <미래로 가는 사람들> : 칼 융과 주역
작가의 정신우월주의적 취향의 단서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작품 중간에 팔괘가 언급되는 부분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주역의 향취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연작의 제목들에 대한 작품별 서두의 짧은 인용들이었다. 한자어 특유의 함축적 의미의 다양성에서 출발하는 주역의 풀이와 궤를 같이하는 이 기, 승, 전, 합의 제목들은 연작 전체 속에서 각 작품의 위치를 나타내는 동시에 작품별 주제를 암시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우주의 끝을 향해 나아간 끝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우주의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영원회귀 테마는 부실한 국내 창작/번역 SF 서가에서도 낯설지 않은 모티프이지만, 아광속 추진 수단으로서의 에키온이라는 도구―――(비행기와 자동차의 비유는 조금 수긍할 수 없지만) 차원 변이를 통해 에너지를 고정한 채 질량을 줄인다는 신선한 발상은 기묘하게도 의지를 가진 생물 에키온을 통해 나타난다―――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수행을 많이 한 수도승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공중에 뜨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는 거예요. 그 역시 4차원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만의 고유한 개성이 종합 선물세트처럼 가지런히 담겨져 있다.

아래는 각 작품에 대한 짤막한 단상들 :

1) 기 : 생성과 사멸을 반복하는 지구로의 귀환은 마치 평행 우주의 여행처럼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평행 우주적인 감각이 뛰어난 작품. “생각해 봐라. <우주가 팽창할 리가 없잖아.>”에서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앞서 <다섯 번째 감각>이나 <종의 기원> 등에서 보였던 치밀한 세계 구축은 이제 평행 우주에서의 대체 우주론까지 선보이고 있다.

2) 승 : 종교―――혹은 창세 신화―――의 기원에 대한 이다式 사변. 집단 무의식에 대한 신뢰가 조금 과도하게 느껴진다. 어떤 면에선 젤라즈니의 <12월의 열쇠>를 떠올리게 하는, 신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종교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에 관한 질문과 대답. 에키온의 특성이 처음 설명되며, 이것은 이후 두 작품에서 보다 발전된다.

3) 전 : 에키온과 사람 의식 간의 상호작용이 언급된다. 덧붙여 에키온을 매개로 자연과 초자연이 다시 교차한다. (“사람이 죽을 때에 저런 것을 본다고 하지.”) 그러나 기묘하게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몇몇 일본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전복―――사고의 돌연한 도약에서 오는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과학과 종교의 교감은 참으로 화목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지구는 죽었다. 영원한 방랑자처럼 보이는 주인공일지라도 지구라는 닻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닻을 잃어버린 연작 스토리는 이제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우주는 종말로 줄달음치고 우주선은 광속에 근접한다. 폭주하는 거대 우주선 선내의, 빛으로 가득 찬 초현실적 풍경은 마치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떠올리게 한다.

4) 합: 結이 아니라 合이다. 맺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다시 열리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주가. 영혼의 순례가.

*

수록작들 전반에 흐르는 미의식을 찾자면 아마도 우아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차분하고 안정된 어조도 그렇거니와 자아와 세계의 대결보다 자아의 회복, 세계의 회복을 강조하는 주제 의식도 그렇다. 세계의 역전과 그에 따른 낯설게 하기를 주기법으로 삼고 있으나 역전된 세계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완결을 이루고 있으며 기괴함이나 비정상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지 않는 것 또한 그렇다. 역전된 세계는 무언가를 결핍한 세계이지만, 작가는 결핍된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탐구 여정에서 작위적이거나 억지스러운 느낌 없이 순탄하고 순조롭게 회복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은 작가의 강점인 동시에 아마도 약점이 아닌가 싶다. 삶은,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다정하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록작들은 중심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으며, 치열하게 끝을 향해 달려 나가지 않는다. 개개인의 실존적 판단의 문제일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대해서 어때야한다, 무엇이 더 필요하다, 등등 옆에서 이야기하는 건 개인적으로도 불필요하고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감각―――감각의 확장―――인식의 확장(역전)―――역전(진화론)―――통시적 고찰로 나아가는 작가의 창작 여정에, 조금 더 그림자를 끌어들인다면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동시에 단조롭고 평면적인 세계가 보다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세계로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한 마디 덧붙여본다.



1) 국내에는 [마술 팬티](호암출판사, 1993) 등에 {장님나라에서는 애꾸라도 왕이다} 등의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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