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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en-box@hanmail.net한 작가가 출간한 단편집을 보는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것, 작가의 지향성을 단 한 권의 책으로 관측할 수 있는 것, 한 작가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 그리고 한 작가의 성장과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 등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장편을 읽는 것과는 다른, 단편집만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개중에서도 한 작가의 성장을 단편집 하나로 보게 되는 것은 유난히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작가 fool이 북토피아에서 E-Book으로 묶어낸 ‘전직 흡혈귀의 회고’가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총 여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전직 흡혈귀의 회고’는 여섯 편 모두가 일종의 패턴을 갖추고 있습니다. 세계는 암울하고 주인공은 밝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습니다. 무겁고 폐쇄적인 세계 속에서 주인공들은 세계와의 갈등으로 인한 괴로움에 짓눌려 있으며 그러한 갈등에 지쳤거나 변화시키고 싶어 주인공이 움직였을 때 희망이 다가옵니다만 결코 희망은 홀로 오지는 않습니다. 파멸과 등을 맞댄 채 다가오는데, 그 희망을 주인공이 반드시 거머쥐는 것도 아닙니다. 희망은 독자의 것이거나 혹은 세계의 것입니다.

단편집의 첫번째 단편인 ‘전직 흡혈귀의 회고’에서의 이 패턴은 아직 거칠고 서투릅니다. 이야기가 작가의 주제의식을 드러낸다기보다 작가의 강렬한 자아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암울함을 보여주는 문장들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과 동시에 작가의 자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단편, 또 다음 단편으로 점차 넘어가면서 주제의식은 변주되며 작가는 점점 세련되게 자신을 감추고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를 높여갑니다.
언뜻, 암울하고 냉정한 인식을 말하는 문장들 속에서 “천랑성의 투명한 별빛”(전직 흡혈귀의 회고)과 같이 반짝이던, 작가의 따스한- 어쩌면 “조용히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바람에게 말하노니) 바람과 같이 갈등과 괴로움을 가련하게 여기는 듯한 정서를 플롯에 끌어들여 온기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식이 절반쯤은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으로도 보입니다.
그것은 공혈을 거부하고 흡혈귀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수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나’처럼, 세계에 홀로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못하는 ‘소년’의 고독처럼 차가운 이성에서 비롯된 인물들의 갈등이- 긁어서 살점이 떨어지는 피투성이 손가락에 대한 연민으로 갈등이 시작되는 ‘소녀’처럼, 똑같은 사랑의 상처에 흐느끼며 오는 여인에 대한 애틋함으로 갈등이 시작되는 ‘나’처럼 따스한 감성으로 인한 갈등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또한 작품이, 작가가 성장하고 있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마지막 작품인 ‘레디메이드 보살’에 이르러, 작가의 의식과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균형을 이룹니다. 작가는 이성으로 사유하는 갈등에 로봇을 끌어들이면서 오히려 인간적인 감성을 부여했고, 세계 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개인 쪽으로 기울기도 하던 갈등의 해법을 세계도 개인도 아닌 제 3의 방향을 선택하면서 터득했습니다. 작가는 이로써 한 단계를 넘어서면서 한 작가의 성장을 보는 기쁨과 흥분을 안겨주었습니다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이 균형은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함이기도 하려니와, 작가의 의식과 이야기의 은유적인 성질이 완벽에 가까운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균형은 보기에는 완벽하고 아름다워도 깨지기 쉬운 법이니까요.

이 이후의 행보가 어떠할지 진실로 궁금하다는, 상투적인 말로 이 리뷰를 마감합니다. ‘거울’에 ‘레디메이드 보살’ 이후로 작가는 여러 단편을 발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작가는 모색 중입니다. 기술은 안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련의 단편들이 보이는 불안정성은 다음 단계로 보다 나아가기 위한 방편 자체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듯도 보입니다. 작가는 세계와의 갈등에서 여전히 투철한 자아, 날카로운 의식을 갈고 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갈등을 겪는 개체에 대한 가련함을 버리지 않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가 가진 이 불안정성이 작가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모릅니다. 퇴보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작가는 ‘레디메이드 보살’이 이미 정각을 성취하고 태어나 스스로를 버렸듯이,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다음 성취를 이룰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 [전직 흡혈귀의 회고: 2097년부터 2202년까지]는 북토피아에서 출간된 전자책입니다.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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