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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환상소설첩: 동시대편

2005.08.26 21:0708.26



pilza2.compilza2@gmail.com근대편과 같은 기획으로 동시에 나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엔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는 생존작가, 그것도 90년대 이후 데뷔한 젊은 세대 작가들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듀나나 이영도, 최현숙의 단편이 실렸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실망감만을 초래할 뿐이다. 앞서 근대편에서도 언급했듯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주류문단에서 활동하는 비평가가 만든 선집이기 때문이다.

또한 송경아, 이승우 등 비(非)리얼리즘 소설을 많이 발표한 이들의 글도 없지만, 대신 굵직한 논란을 일으켰던 작가 장정일, 『미실』로 장르에 가까운(슬립스트림?) 소설을 발표하여 인기를 얻은 김별아, 탈 리얼리즘의 기수로 자리매김한 김영하의 글이 실려 있어 주목할 만 하다.

펠리컨 - 장정일
>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레고리 독법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

삭매와 자미 - 김별아
> 고대 중국의 장수에 얽힌 설화적 이야기를 그린 거짓 사실주의 소설.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 - 이평재
> 전형적 한국소설(주인공은 소설가, 의미없는 섹스, 겉도는 인간관계)인가 싶었으나 막판의 반전으로 강렬한 환상소설로 마무리지어졌다.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 - 신경숙
> 유령과도 같이 나타난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만나는 이야기.

빛의 걸음걸이 - 윤대녕
> 어디를 어떻게 읽어도 그냥 회고담 소설이다. 막판의 환청만으로 환상소설이라고 주장한다면 엮은이의 환상소설에 대한 지식과 독서량을 의심해야 할 판국.

피뢰침 - 김영하
>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을 다루고는 있으나 미시적인 관점에서 한 개인의 체험담으로 풀어내었다. 테드 창의 「지옥은 신의 부재」와 비교해서 읽어볼 것.

내 영혼의 우물 - 최인석
> 그냥 (사실주의) 소설. 개 흉내를 낸 정도를 가지고……. 추리/공포쪽으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줄리안 시몬즈의 「꿈꾸는 것이 더 낫다」가 이보다는 훨씬 극적이며 환상적이다.

존재의 숲 - 전성태
> 죽은 존재와 만난다는 기이한 체험담을 다루면서도 환상적이지도 않고 제목도 뜬금없다는 느낌. 장르쪽의 기준으로 평하자면 좋은 소재를 제대로 써먹지 못해서 밋밋한 평작에 머물렀다고나 할까.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에 견주어본다면 이 소설의 제목이 그저 '겉멋'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벌레 - 오수연
> 본서에서 가장 환상소설다운 작품. 여성문제를 변신담으로 풀어낸, 사변소설의 애호가들이 주목할 만한 글이다. 기이한 육체를 통해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고민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사랑은 운명, 운명은 죽음」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결국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근대편보다 더 선집의 방향성에 의문을 품게 한 작품선정이었다. 이것은 엮은이와 독자인 나 자신의 환상소설에 대한 기준의 차이에서도 비롯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엮은이는 환상을 주제의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즉 엮은이는 환상의 유형을 메시지 표현, 현실에서의 탈주, 정신적 강박증 상징, 낭만적인 도피로 구분지었는데 이는 얼마나 혹은 어떻게 환상적인가를 따지는 장르쪽의 기준과는 다르게 왜 혹은 무엇을 위해 환상적인 기법이 쓰이냐를 기준으로 잡아 작품을 골랐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으니 엮은이는 듀나의 자극적인 과학소설보다는 개학교를 그리워하며 개처럼 짓는 광인이 등장하는 소설이 더 환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근대편에서 언급했던 말을 되풀이하자면 시도 자체만으로 주목해야 할 단편집이다. 다만 얼마나 한국문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덧. 개인적으론 최인훈과 박상륭이 실린다는 다음 선집을 기대한다(나올런지 모르겠지만). 한국 최초로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을 쓴다고 말했던(그런 성격의 작품은 이전에도 있을지 모르지만 작가 스스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최초) 이제하와 보르헤스식 글쓰기로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인성의 글이 수록되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

덧2. 지난 근대편에 대한 글에서 우리 문학에서 앤솔러지 성격의 작품집이 많이 없다고 불평을 했는데 헌정 단편집 중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최창학에게 바치는 후배 문인들의 문집 『마음의 연인』이 있고, 주제별 단편집이라면 노인문학을 다룬 단편과 비평을 모은 『소설, 노년을 말하다』가 나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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