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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타마하리트], 김희정

2005.07.30 03:0707.30



readingfantasy.pe.krylpatae@hyosung.com김희정 씨의 글을 처음 보았던 게, 3회 황드 문학상에 감상단으로 참여했을 때였군요. 지금은 <거울 Mirror>에서 연재하고, 특별히 김희정 씨와 거울의 운영자께도 부탁하여 저희 홈페이지에서도 연재하고 있는, [테라의 마법사]가 바로 그것인데요. 이 글에 대한 감상도 월말에는 저희 홈페이지에 올려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작이라서, 글을 읽고 난 느낌을 적기는 부담이 적을 듯 하군요.


즉, 타마하리트는 부담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단, 이게 끝이 아니더군요. 무언가 암시를 남기면서 끝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듣기에는 1부 종결이라고 하더군요. 열린 결말이라는 것도 있고, 또한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결말도 있겠지만, 어쨌든 텍스트를 <읽는> 입장에서는 끝나는 느낌이 시원하지요. 그래서 요즘은 부쩍 연작이 많아보이는 느낌입니다. 저도 소소하게 연작을 하나 그적거리고 있고, 연작은, 연재 중단에 대한 부담도 없으니까요. 굳이 테라의 마법사를 의도에 둔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끝이 아닌 것에 대한 독자의 부담은 비단 타마하리트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실은, 글쓰는 이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글을 중간에서 닫어버리곤 하지요. 특히, 인터넷을 도구로 하여 자신의 글을 발표하는 경우는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인터넷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를 쉽게 결단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대신에 글에 대한 책임까지도 쉽게 만들어버리지 않습니까?

이영도 씨의 폴라리스 랩소디를 언급하겠습니다. 국내 굴지의 언론재벌이 발행하는 모 스포츠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하였던 폴라리스 랩소디는, 딱 100회 연재되고 종료되었지요. (잠시 이모티콘을 사용하겠습니다) -_-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봐도 끝날 타이밍이 아니었으며, 뭔가 뒤에 더 이어질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보이지 않는 손의 횡포에 의해서 하나의 세계가 그냥 종료되는 듯하는 그런 어이없는 느낌...... 그런데, 이영도 씨는 약 1년 안되는 때부터, 하이텔에 그 뒷이야기를 연재하더군요. 하마터면, 그렇게 끝나고 말았더면, 그냥 슬프고 말았을 내용들을 쏟아내더군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다섯 질 중 하나는 바로, 폴라리스 랩소디입니다.

저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글은 완결을 봐야지요. 그것은 어찌보면, 완결되어 출판의 형식으로 나오는 책들 밖에는 찾을 수 없던 때부터 독서를 시작한 제게는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인터넷으로 글을 발표할 수 있게 된 어느 때인가부터, 출판의 형태가 바뀌더라는 말입니다. 일단 글을 올리고, 그 글이 인기 좋으면 <적당한> 퇴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바로 출판에 들어가는 것 말입니다. 그런 형태로, 독자들은 우롱당하고 농락당하고 있지요. 절대로 끝을 보지 못할, 유명한 모 환상 소설 작가의 지루한 연재기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끝을 향해 함께 공명하고 달려가는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타마하리트에 대한 악덕은 이게 첫번째 입니다. 글쓴이가, 어떤 사정에 의해서 자신의 글을 줄이게 되었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이라는 습작 발표장은, 기회의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작가의 글을 받아먹는 수동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딱 그만큼의 무게로, 작가를 분기시키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작가가 또다른 이야기를 토해낼 수 있는 원동력을 던져주기도 하는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타마하리트가 완결을 보기를 바랍니다. 이게 끝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환상 소설은 그닥 읽기 쉬운 소설 부류는 아닙니다. 다른 소설들과 비교해서, 환상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일단 그것이 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에서 커다란 생경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독자는 작가가 끌어오는 환상적인 세계 (더 좋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군요. 이 단어 말고 더 좋은 게 있을 듯한데 말입니다) 를 수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 환상 소설 독서는 무의미합니다. 독서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테니까요. 많은 이들이, 환상 소설을 읽으면서, 어이없어하는 이유도, 비현실에서 자신들의 독서가 막히는 사실에 대해서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된다. 그러나 말이 안되는 소설이 환상 소설 아닙니까? 허수아비가 왕이 되고, 양철통 인형이 말을 하며,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포효를 잊고 여자 소녀와 대화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환상 소설에서는 독자가 작가에게 더욱더 수동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거친 문법으로 말한다면, 개인만이 알고 느낄 수 있는 세계를 <강요>하는 것이 소설 혹은 문학이라는 장르가 아닙니까? 독자들은 작가의 거친 애무에 오르가즘을 강요당하지만, 독서행위 내내 느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기실, 독자는 작가의 책 속에서 작가와 공명한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책>이라는 단위를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그 단위가 조금씩 세분화되어서 장(章)으로, 혹은 쪽으로, 또는 단락이나 문단, 혹은 문장이나 단어, 어절이나 음절에까지 이르면, 독자와 작가가 공명하는 시간은 그닥 크지는 않을겝니다. 왜냐하면,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경험을 문학이라는 도구로 객관화시키려 시도하지만, 객관화라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지, 실은 어느 문학도 객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궤변은 그만 두고, 환상 소설이 (소위) 본격 소설에 비해서 더 큰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독자가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독자들, 떠서 먹여주는 것만 먹으려고 합니다. 이빨로 짓이기거나, 손/칼/삼지창 같은 것으로 찢거나 하는 예비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그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동일선상에, (소위) 이세계청소년깽판물도 있습니다. 타성적으로 읽는 것이죠. 어떻게 환상에 공식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발전적인 계승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 조금 다른 표현으로 오마쥬, 는 어떨까요? - 환상에는 공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글쓰는 이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어찌보면, 환상이 일상이 되어버린 기괴한 현상 너머에 이세계청소년깽판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환상 소설인가요? 당연히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환상은 더이상 환상이 아닌 것이니까요.


이야기가 조금 빙둘러서고 있지만, 타마하리트는, 환상과 동행한다는 느낌보다는 환상을 쫓아간다는 감정이 앞섭니다.

이영도 씨의 소설을 읽는 이들이 사용하는 표현 중에, 모닝스타,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책인,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무기라고 하더군요. 조금 투박한 흉기 같은 것을 생각하시면 좋겠는데... 마치 아침에 머리를 두드려맞고 반짝 빛나는 별을 보는 것처럼, 책을 읽다가 작가가 내지르는 반전에 한 대 두드려맞아 정신이 몽롱한 느낌이 드는 상태를 모닝스타라고 하나보더군요. 같은 맥락에서, 스포일러라는 것도 있지요.

환상 소설은 반전이 중요한 장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손쉽거든요. 일단 환상 소설의 세계는 작가가 만들어갑니다. 켜켜이, 촘촘히, 오지게. 독자는 작가가 주는 세계를 받아들이면서, 작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입니다. 독자는 작가와 함께 걷다가, 그가 옆으로 내두르는 발길질에 깜짝, 놀랍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통해서 이미 반전을 모조리 담습니다. 환상 소설만이 주는 매력이 아닙니까. 익숙하지 않은 것이 주는 놀라움. 만약에 현실을 배경으로 한 글이었다면, 조금 다르겠지요. 익숙하니까, 쉽게 알아차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경한 이야기들이라면, 당연한 귀결임에도,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잖습니까?

이런 손쉬운 부분 때문에, 많은 환상 소설 습작가들은 반전을 쓰고 싶어합니다. 솔직히, 글 읽는 이들이, 아아!, 오오!, 우오오오!, 같은 괴성을 지르는 장면을 보는 것이 얼마나 짜릿할까요. 그런 반전이 타마하리트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툽니다. 아니, 반전이 없는 글도 있습니다. 반전을 보여주면서 독자를 데리고 가는 글도 있지요. 글의 말미에 글이 뒤집힐 것을 예상하면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말을 되짚어 나가는. 그러나, 타마하리트는 어중간합니다. 데리고 간다고 암시를 던지려는 듯하지만, 뭔가 머뭇거리고, 그러나 계속 뭔가 있는 것처럼 유적의 앞에 검은 안개를 끊임없이 드리우고.

둘 다 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잘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타마하리트는 뭔가 끊임없이 목덜미에 뭔가를 걸리운 채 작가에게 끌려가는 안타까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이야기는 안개 저 편으로 묵묵하게 사라져갑니다.


2000년에 출판된 타마하리트를 보면서, 그 당시를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김희정 씨보다 한 살이 어리니까...... 2000년이면, 두 번째 대학교 3학년 때. 정상적으로 학교를 마쳤으면 직장 3년차였겠지만. 아무튼 보통의 제 동기들은 한참 4학년으로 취업 준비를 하던 때였고, 나어린 제 동기들은 군입대 준비를 하거나 신림동에 쳐박혀서는 열심히 공부를 하려고 폼을 잡던 때입니다. 그 어느 때라도, 10대의 감성을 노회하게 표현할 나이는 되어도, 20대를 그적거리기에는 아직 벅찬 나이일겝니다.

드래곤 라자의 주인공 - 아무튼 - 이 17세라는 것에 일단 주목하게 됩니다. 세월의 돌에서는 10대 남녀가 청춘을 불사르지요. 하얀 로냐프 강의 두 주인공은, 아무리 많이 쳐주어도 20대 이상을 상상할 수 없으며, 퇴마록의 박 신부님은 조금... 생경하게 표현되지요. 다른 청소년들에 비해서 말입니다.

타마하리트의 감성은 20대에 접어드는 감성입니다. 마야의 감성에는 쉽사리 몰입할 수 없고, 콘라드는 마치 20대 같은 품성을 지닌 중늙은이로 나오고, 외려 죠니는 좀 어리고...... 다른 이르카스의 아이들은, 몰입할 수 없는 - 원래 그런 존재들로 그려진 것이니까 - 감성들을 지니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어떤 등장인물을 따라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비평 목적으로 글을 읽은 것이 아니라서 - 물론 써야한다는 압박은 있었지만, 그걸 내내 가지고 읽을 수도 없고, 읽지 못하게도 만들더군요 -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누구 하나에 포커스를 맞추고 갈 수가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는 산만하게 흐트러지고, 등장인물들은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안타까운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결국, 이런 이야기밖에 쓸 것이 없느냐. 지금까지 간단하게 쓴 타마하리트의 감상은, 그 반대항에 테라의 마법사가 놓여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교항은 테라의 마법사입니다.

작가는 모든 부분에서 타마하리트보다 나은 글을 써내었습니다. 저는, 김희정 씨가, 타마하리트에서 보여준 - 아니, 제가 테라의 마법사를 먼저 읽었기 때문에, 더욱 더 도드라지게 보인 - 소소한 악덕들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테라의 마법사를 먼저 보았으니까 타마하리트가 그렇게 보인 것이지, 기실 이 책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흥미롭게 읽은 책 중에 하나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환상 소설의 주제/내용에 대해서 감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너댓번은 읽어야 할 듯 싶은데...... 제게 주어진 시간은 20일 남짓이었군요. 테라의 마법사와 함께 읽어가다보니까, 그 시간이 더 짧은 것이 아쉬웠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틈틈히 글을 읽는 평범한 독자에게는, 적어도 책을 읽을 시간이 서너달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테라의 마법사는 조금 더 흥미로운 글이기 때문에, 조금 더 예쁘게 감상을 써 볼 요량입니다. 당연히, 모처에만 감상글을 올릴 터이니, 그 감상을 보고싶으시다면, 플루토 님, 오세요. :)

그리고...... 제발 2장을 시작해주세요.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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