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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chizedek@naver.com
“에비터젠의 유령은 에 있는 죠!”

……가 갖고 있는 버전의 [에비터젠의 유령]은
서론과 결론이 없어요.
‘왜 그렇게 됐는지’와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없는 거죠…….
‘극단적인 환상’들 속에 뭔가 힌트가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 이상을 살펴볼 순 없었어요.

―――[에비터젠의 유령], 잭의 말 중에서



꽤 오래전(하지만 그리 옛날은 아닐지도 모르는 때에) 하리야 님과, 한국 판타지 소설과 인터넷 연재에 대한 의미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금붕어에 필적하는 나의 기억력의 한계 탓에 희미하지만 어쨌든 이제 한국 판타지 소설이 인터넷이라는 공간,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 등을 벗어나고 있다는 공통된 결론을 내렸다. 그 때의 대화는 나에게 참 많은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었고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히는 계기가 되었던 듯 싶다.
그 때 하리야 님은, 이미 대다수의 판타지 작가군이 아직까지 인터넷 연재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할지라도 인터넷이라는 공간적 시간적 개연 방식을 벗어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 지적은 현 시점에 이르러 더 극명해 보인다. 아직까지 인터넷 연재를 고수하는 기존 작가나 새롭게 통신 공간을 통해 데뷔하는 신진 작가들에게나 이미 연재는 목적 자체가 아닌 수단으로 변질된 지 오래인 듯 하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병아리가 자신을 키워준 달걀 껍질을 깨뜨려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우리를 보둠아 주던 아마추어와 팬덤의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삶을 위한-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일 테니까. 그것에 내가 일말의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아쉬움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로비라는 작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등장은 한국 판타지 소설에 상당히 재미있는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그래, 상당히 흥미롭다. 사실 처음에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만, 현재까지의 행보는 독보적이다. 앞으로의 일들이 무척 기대될 정도로 말이다. 로비, 김이환. 내가 이 작가를 조목하는 이유를 짧은 글줄로나마 이야기 해 보고 싶다. 부족한 솜씨로나마 엮어보련다. 내가 읽은 에비터젠의 유령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독자들이 많을 줄 안다. 그가 쓴 소설은 그리 많지 않고 출판된 것도 글쎄, 또렷한 업적(?)이라 할 만 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이 작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의―혹은 그의 소설의― 모습은 출간된 [에비터젠의 유령] 한 권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김이환이 쓴 모든 소설을 읽어보고 평가하라는 가혹한(!)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에비터젠의 유령](이하 에비터젠)이라는 한 권의 책에 대한 리뷰일 뿐이니까. (하지만…… 글쎄, 과연 ‘한 권’일까나.)
처음에 나는 김이환의 소설이 출판된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그러면서도 그의 첫 작이 에비터젠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작가가 책 말미에 써 놓았듯이 에비터젠에는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나는 에비터젠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작가가 처음 완결한 에비터젠의 유령. 이건 아마도 황금드래곤문학상에서 접했던 거라고 생각한다.(금붕어 기억력!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세 번째는 출판된 에비터젠, 그리고 그 중간 단계로서 과도기의 에비터젠이 두 번째로 존재한다. 내게 가장 크게 각인된 것은 첫 번째 에비터젠이었고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 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주목하고 있던 작가 로비의 소설 중에는 그 초작보다 훨씬 뛰어난 작이 많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신반의하면서 보았던 세 번째 에비터젠은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을지언정 실망감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두 번 읽고, 나는 그가 상당히 성공적이고, 그리고 꽤나 파격적으로 판타지 소설에 등단했음을 알았다.

언젠가 모 사이트에서 이런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에비터젠의 홍보 문구에서 너무 많은 것이 밝혀져서 스포일러성이 다분하다는 이야기였다. 일반적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에비터젠의 주 홍보 문구가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자의식을 얻어 소설 밖의 현실세계로 뛰쳐나와…’ 등이다. 이건 거의 소설 끝자락에 가서 밝혀지는-혹은 밝혀져야 흥미로울 만한 주요 반전 포인트이다.
만약 첫 번째 에비터젠이었다면 말이다.
에비터젠은 과도기를 거치며 변했다. 처음의 에비터젠은 재미는 있지만 출판작이라기보다는 재능있는 작가의 습작 정도로 보는 것이 적당했다. 결말도 상당히 자조적이었고 내용 자체도 너무 직설적이었다. 그리고 몇 년여가 지난 지금은―혹, 그 때 당시도― 초월적인 존재들의 이야기나 소설이 현실 속에 끼어든다는 설정 등은 별로 새롭지 않다. 작가는 아마도 이야기 자체로 승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차라리 처음부터 주요 설정 자체를 까발리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적어도 사람들이 반전에만 주의를 기울여 보고 있다가 맥을 탁 풀어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에비터젠은 사실, 소설로서 보자면 불합격점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단락단락이 끊어지고 그 자체로 흥미를 가지기 어렵다. 한 권으로 가지치기 당하면서 에비터젠은 모험픽션으로서의 재미를 상당부분 반감당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어긋난다는 주요 내용이 주내용이 되지 않는, 상당히 웃기는 구조가 된 것이다.
자아, 여기까지만 읽은다면 세 번째 에비터젠―즉, 출판된 에비터젠은 하자가 많은 소설처럼 보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단순히 출판물로만 보자면 범작이상은 되지 못한다. 머리싸움 좋아하는 독자라면 모를까, 나 같은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적어도 소설이라면 스토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말이다.
하지만, 나는 세 종류의 에비터젠을 모두 접했다. 그리고 그것에 기반해서 김이환이 꽤나 재미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이며, 현재 유일한, 그리고 진정한 통신 작가라고 생각한다.

김이환의 작품에 대해선 예전부터 조금 부끄러울 정도로 중언부언했으니 이 리뷰에선 길게 말하지 않겠다. 이 쪽 세계는 생각보다 좁아서, 아마도 많이들 곁귀로라도 들어보았을 테니 반복하지 않으련다. 그냥 예전에 나는 김이환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반복과 순환의 고리, 환원하는 소설 구조를 뽑은 적이 있다는 얘기만 살짝 흘린다. 에비터젠 또한 마찬가지여서 출판작에서도 심심찮게 그 모습을 옅볼 수 있다. 1장과 2장의 경우는 거의 극단적이게 눈에 잘 보이고, 3장에서도 곳곳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단순한 반복 구조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띄처럼 앞 뒤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소설 내적으로도 그렇지만, 여러 이본이 존재하는 에비터젠의 경우는 작품 외적인 면에서도 반복 및 순환 고리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을 찾아낸 독자라면 한 번쯤 음흉한 미소를 짓지 않았을는지 싶다. 그렇다, 에비터젠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무너진 소설이다.

에비터젠을 되풀이 읽으며 나 또한 꽤나 음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일반적 독서에서 얻을 수 있는 고양감 외의 또다른 만족감 때문이었다. 작가는 이 초보 열성 독자에게 여러 가지 부수적인 재미요소를 지켜주었다. 아마 인터넷본 에비터젠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꼈겠지만 말이다. 첫째, 둘째, 셋째 에비터젠은 각기 매우 다르다. 앞에서 나는 잠깐 한국 판타지와 인터넷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로비라는 작가의 등장에 대해서도. 왜 그가 저물어가는 한국판타지의 모태 -인터넷의 또다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런 다양성에 기인한다. 이제까지 인터넷 연재는 단순히 작가와 독자간의 의리와 고집, 혹은 소설을 알리기 위한 홍보수단으로서만 존재해 왔다. 이것은 연재 방식의 작품 게재에 태생적인 한계를 가져왔고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들은 통신 공간을 떠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조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비터젠에서 인터넷 연재는 또다른 읽기 수단이 아닌 소설 완성을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존재한다. 단순한 퇴고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에비터젠의 여러 결말을 보았지만 그것은 소설에 몰입하는 데 어떤 방해도 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야기 자체로 끌려들어가는 매력은 별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여러 이본은 순환하고 반복되는 로비 글 특유의 환원 고리 속을 헤메는 색다른 재미를 느끼는 단초가 되어 주었다. 소설 이야기를 읽으며 소설 그 자체를 인지하는, 말하자면 메타 독서라고나 할까. 독특하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에비터젠은 쓰여짐과 함께 읽혀지며 완성된 소설이며 그 과도기 자체가 소설이고 과정 자체가 한 편의 기-승-전-결을 이루는 소설이다. 이전의 인터넷 본과 연계해서 읽은 출판본 에비터젠은 끊임없이 내 안에서 조립되고 또 해체당했다. 출판본에선 보이지 않는 또다른 에비터젠의 흔적을 찾으며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재구성하게 된다.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서 말이다.
아마도, 그리고 확신하건데, 에비터젠을 읽은 독자들 개개인은 전부 다른 의미로 그 소설을 읽었을 것이다. 주제따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 자체가 달리 읽힌다. 에비터젠의 유령 중 한 명인 잭의 말처럼 우리는 각기 다른 버전의 ‘에비터젠의 유령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이본을 읽은 내가 에비터젠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가? 그럴 리 없다. 작가의 말처럼 출판본은 작가가 가장 최선을 다한 버전이며 그로써 완전한 완성작이다. 그것만 읽어도 독서에 하등의 문제가 없다. 인터넷상에서, 어떤 류의 이본을 읽었던지 또다른 버전을 읽었던 독자에게는 그것으로서 에비터젠은 완성된다. 이것과 그것의 비교는 단순한 작가의 퇴고상의 삭제와 보완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 그 에비터젠과 이 에비터젠은 완전히 다른 소설이기 때문이다!

자아, 이제 끝 맺으련다. 하나만 물으면서.

당신 마음 속에 있는 에비터젠은 어떤 버전입니까?




[에비터젠의 유령]은 재미있는 시도를 한 소설이다. 결말에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그 결말도 나름대로 작가의 성향이 드러나는 듯 싶어 가슴이 따뜻해진다. 로비는 이제까지 다루었던 거울의 작가들과는 좀 색다르다. 가연이나 은림 등의 경우, 형식적인 면에서 상당히 안정적이어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비교적 쉽게 풀어놓고, 독자에게 잘 이해시킨다. 그러나 로비의 경우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나는 작가 본인이 아니므로) 독자에게 잘 이해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때로 그는 아주 위태로울 정도로 극단적인 형식을 취한다. 소설의 서술은 불안정하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하는 말, 하고 싶었겠지만 하지 않은 게 더 나았을 말, 노력은 했지만 별로 효과적인 방식이 아닌 말들이 한 문장 안에서 엿보인다. 묘사는 대부분 단순하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시각적인 부분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풍요롭지 못하다. 로비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독특한 세계관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아슬아슬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때로 그가, 그리고 그의 작품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고흐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가는 독특한 작품관 속에서도 현 세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안정되게 한다. 작품의 주요 내용이 뽀족한 창날이라면 언듯언 듯 보이는 그런 상냥함은 창끝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그의 소설을 주목하는 일이 그리 위태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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