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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ehong@unitel.co.kr

중편의 대가들이 펼쳐내는 솜씨를 맛볼 때는 두 번 놀라게 된다. 처음에는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그 거칠 것 없는 속도에 놀라게 되고, 다음에는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그 무자비한 속도 속에서도 필요한 모든 내용은 다 들어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즉, 대가들의 중편에서는 단편의 쾌속 무비함과 장편의 유장함 모두를 기대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중편 걸작들의 출간 정도는 그 만족감과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 길이 때문에 단행본으로도, 엮어내기도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케이트 윌헬름의 작품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축하해야 마땅할 일이다.

   물론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300여 페이지 분량의 장편으로 소개가 되었고, 휴고상이나 로커스상 역시 장편 부문에서 수상한 작품이지만, 역자가 밝힌 그 집필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현재의 1부에 해당하는 {아름답게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만이 발표되었다가 그 뒤에 2부 {셰난도아}와 3부 {정점에서}가 덧붙여져 장편이 된 작품이다. 각 부는 중편 소설 한 편의 길이에 해당하며, (지금은 절판되어 전설이 돼 버린) 시어도어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와 마찬가지로 각 부는 나름의 독자적 완결성을 갖춘 상태에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느슨하다는 표현은 애초에 한 덩어리로 나온 다른 장편 소설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며 각 부가 명백히 일관적인 정서를 타고 흘러가기에, 결국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읽는다는 것은 세 편의 훌륭한 중편과 한 편의 훌륭한 장편을 동시에 읽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적 포스트-홀로코스트 SF”의 중점, 혹은 작가의 뛰어난 솜씨는 1부 {아름답게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1장, 좀 부족하면 2장까지만 읽어봐도 분명히 드러난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어린 시절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인류 멸망의 전조를 포착한 데이비드의 가문이 생명 복제 연구를 시작하는 내용까지를 담고 있는 이 두 장(章) 속에서, 케이트 윌헬름은 작품의 중점을 잘 보여준다. (여전히 선입견 가진 독자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SF의 “S”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작가는 작품의 기반이 되는 생명 복제 “기술”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펜이 더 많이 가 있는 부분은 데이비드가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일화들이다. 심지어 작품의 과학적 배경 설명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2장조차도, 인상에 남는 것은 그 마지막 끝맺음이다. “저기 언덕 위 좀 보세요. 말채나무가 곧 꽃을 피울 것 같네요. 벌써 나온 꽃봉오리도 있어요”라는 데이비드의 말은, 그가 과거 집을 떠날 때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나는 네가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하며 떠날 것을 안다. 하지만 데이비드, 넌 돌아올 거야. 말채나무 꽃이 피기 전에 돌아오겠지. 네 눈에도 조짐이 보일 테니까”라는 말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이 데이비드가 돌아와야 했던 이유, 즉 인류의 절멸을 예고하는 위협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서서 자연을 통해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어떤 연결 고리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케이트 윌헬름은 SF의 “S”가 야기하는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도 이어지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난 이후의” 이야기라는 데에서 해볼 수 있는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재난 이후의 공간이 아니라 재난 이후의 시간이라고 하겠다.

   글머리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작품이 중편 소설로서 취하고 있는 빠른 전개 속도는 바로 그 시간의 흐름을 충실히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혹은 자연적인 지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기능을 한다. 한 장과 다음 장 사이의 시간 간격, 심지어 한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 사이의 시간 간격조차 크게 벌려두는 형식은 일견 이 작품을 냉혹하고 건조한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보이게까지 하지만, 냉정한 관찰과 조심스러운 절제는 다른 것이다. 케이트 윌헬름의 방법론이 후자라는 것은 이 무자비할 정도로 빠른 전개 속도 속에서도 작은 에피소드, 혹은 그 에피소드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지점에서는 아낌없이 유려한 필치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확신할 수 있다. 특히,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1부의 결말에서 우러나오는 뭉클함 역시 그 동안 절제해뒀던 감정들을 냉정한 대사 몇 마디와 자연에 대한 묘사를 대비하여 탁 풀어놓음으로써 이뤄지고 있으니, 이쯤 되면 클론이고 뭐고 간에 SF도 결국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을 이용해서 인간을 발견해내는 고유의 미덕을 지닌 예술품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과거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밝힌 바처럼, SF의 진정한 즐거움 또한 바로 그 냉혹하고 삭막할 것 같은 과학이 인간 존재를 들여다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바로 그 상이한 두 대상을 훌쩍 뛰어 연결해내는 것이야말로 소위 SF의 “경이감”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 (물론 방법론은 다르지만)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또한 그런 즐거움, 경이감을 충실히 전달해주는 작품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게 될 독자들 중에는 “내 인생의 책” 혹은 “내 인생의 작가”가 하나 더 늘었다는 기쁨까지도 함께 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심정임을 밝히는 데에 한 점 망설임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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