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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편에서 단순히 방관자 역할로 중요하지 않게 등장했던 인물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나를 괴롭혔다. 그 사내는 “내 이야기를 써. 나는 로캐넌이라고 해. 난 내 세계를 탐험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바람의 열두 방향] 머리말 中

   그래서 그 사내는 그의 세계를 탐험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모르는 비극적인 신화가 살아 숨 쉬는 땅에, 완전한 이방인으로서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로캐넌, 광활한 우주나 연맹의 크기에 비해 본다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과학자입니다.

   국내에는 이미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최용준 역, 그리폰북스)에 {셈레이의 목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단편 {목걸이}를 프롤로그로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연맹의 인류학자 로캐넌은 연맹에서 붙여준 형식적인 이름을 가진 행성에서 날아온 아름다운 외계인을 보고 문득 자신이 알지 못하는 비극적인 신화의 한 부분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책임감과 호기심으로,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의 일에 끼어들어 마음대로 산업을 발달시키고 전쟁 물자를 차출하는 연맹의 행태를 비난하고, 스스로 이 세계에 날아와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한 조사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연맹과 대립하고 있는 미지의 적은 함께 이 행성을 조사하고 있던 로캐넌의 동료들을 모두 죽이고, 이 세계를 점유하기 위해 주민들을 공격합니다.

   이 세계에 고립된 후로 로캐넌이 떠나는 여행은 통신기, 아니면 적어도 그를 도와줄 사람들과 소통할 무언가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자와의 의사소통’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발견하게 됩니다.

   1부 ‘스타로드’에는 로캐넌과 상당히 닮은꼴인 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선 그들은 모두 동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미지의 적에게 잃었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자기들의 것이 아닌 언어를 말하면서,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다른 존재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는,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않다고 느끼게 만들지요. 쿄의 경우, 부분적인 군체 텔레파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족들 곁을 떠나, 이제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타인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한편 로캐넌의 경우, 그가 원래 속해 있던 세계와 그를 갈라놓는 것은 시공의 벽입니다. 말 한마디를 전하는 데에만도 8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고립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 그가 가지게 된 이름인 올호르, 즉 ‘방랑자’라는 말은 그의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지요.

   하지만 과연 계속해서 그럴지 어디 볼까요? 이 작품 속에서도 매우 충격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기 있습니다. 일행이 날개달린 종족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이지요. 천사같은 외모와 아름다운 조형물 때문에 로캐넌은 그들이 고도로 발달한 지성과 너그러움을 갖춘 종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퇴화한 두뇌를 달고선 동물의 진액을 빨아먹으며 사는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위기에 처한 로캐넌 앞에 나타난 갈색 짐승은 인간의 언어를 말하며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지요. 일전에 로캐넌은 우주 곳곳에 인류와 닮은 종족이 있고, 나머지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짐승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기준은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적 또한 그의 감정과 상황을 인지하고, 심지어는 ‘말을 걸어올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소스라치는 기분 속에서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귀에 들리는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럼 난 굶어죽겠군.”)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로캐넌은 비록 이방인이지만―――혹은 이방인이기 때문에―――타인과 소통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다른 종족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쿄의 종족인 피안들은 나쁜 일은 쉽게 잊습니다. 그들의 오랜 전설과 민담 속에는 친구는 있어도 적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어둠이란, 일종의 터부인 거지요. 그들과는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결국은 정반대의 모습을 지니게 된 그데미아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밝고 아름다워도 그들 역시 ‘반쪽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 터부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다른 종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적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의 대화는 이해를 수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로캐넌은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깨달은 사람이지요. 그런 면에서 이 장편의 제목이 [로캐넌의 세계]라는 사실, 다른 이들이 그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도 있는 이런 점들은 차치하고라도, 이 작품은 르 귄 자신도 인정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성향이 강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목걸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단편으로서, 동화같이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전설을 들려줍니다. 고풍스러운 말을 하는 영주들과 빛과 어둠으로 갈라진 두 종족들, 하늘을 나는 바람말들은 북구 신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처럼 낭만적입니다. 영주 계급(Angyar)의 사람들은 오만하며 호전적이고, 어찌 보면 이기적인 이들이지만 르 귄은 이들을 중세 기사도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같이 고풍스럽고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비록 쇠락한 영주들과 신화시대의 몰락, 외부의 개입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발달한 산업 따위가 읽는 이에게 다소 슬픔을 안겨 주더라도 그 아름다움까지 퇴색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최근 들어 건조한 글들을 읽으신 분, 낭만적인 글을 좋아하시는 분, 르 귄이라면 우선 읽고 보시는 분들 모두에게 추천하는 바입니다(훌륭한 책 광고가 되어 버렸군요, 결국은).

   ※이 작품은 르 귄의 유명한 ‘헤인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으로, [유배 행성], [환영의 도시]로 이어집니다. 이 작품들은 [로캐넌의 세계]와 함께 이수현 씨의 번역으로 출판되었으니 순서대로 이어서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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