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소설 저주받은 자, 딜비쉬

2005.06.25 03:2706.25





latehong@unitel.co.kr

얼마 전인 6월 21일, 낙원동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미국 감독 로버트 알드리치의 회고전을 맞이하여 특별 심포지엄 자리를 마련, 알드리치의 열렬한 팬인 박찬욱 감독과 오승욱 감독을 초청한 뒤 두 시간짜리 수다의 장을 열어주었다. 알드리치와 박찬욱 모두를 좋아하는―――오승욱 감독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킬리만자로]를 아직 보지 못했다―――나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에 참여하여 수다를 즐겼다.

   심포지엄 도중에는 (당연히) 두 감독들에게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가 끼친 영향에 대한 언급이 나왔는데, 나는 그 언급이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자로 나선 김영진 평론가는 박찬욱, 오승욱 감독의 영화들이 지닌 정서가 알드리치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고, 두 감독 역시 직접적으로 그 사실을 시인했으나, 심포지엄을 나와서 알드리치의 열기를 털어낸 뒤 돌이켜보자니, 나로서는 즉각적으로 박찬욱의 영화와 알드리치의 영화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를 이어줄 수 없었던 것이다. 박찬욱의 영화를 보며 바로 ‘아, 이건 알드리치?’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광으로서의 박찬욱(팬을 자처하고 다니다보니 어느새 이것저것 그의 과거 작업들을 훑어볼 수 있게 됐다. 영화광 시절의 비평 같은 거)과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은 꽤나 다르다. 내가 알기로 그는 창작과정에서 항상 남들이 한 걸 피해가려고 애쓰는 사람이고, 실제 결과물도 그렇다. 그러니까, 그에게 영향을 준 대상들은 무수히 많되, 결국 작품 자체는 박찬욱 자신의 것이다. 그 지점에서, 확실히 팬심(fan心)은 필심(筆心)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 달라야 하며, 다른 작가들이 좋은 작가들이라는 생각도. 같은 땅에서 자라도 종이 다르면 꽃이 달라야 하는 법이다. 제대로 된 꽃이라면.

   그런데 작가는 때로는 그냥 같아지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모양이다. 성공한 소설가(영화보다 소설이 제작비가 훨씬 싸니까)는 종종 그런 마음을 표출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그런 경우에 관한 이야기다.



   6월 초에 출간된(정확한 출간일은 5월 30일이지만) 로저 젤라즈니의 팬터지 [저주받은 자, 딜비쉬]가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킨 반응은 생각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은 나 역시 이 작품을 그렇게 대단하게 평가하고 싶지 않다. 아마 국내의 젤라즈니 팬 대부분은 이 작품이 그 동안 우리나라에 출간된 젤라즈니의 모든 작품 중 가장 떨어지는 작품임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인정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저주받은 자, 딜비쉬]는 필심보다는 팬심으로 이뤄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젤라즈니는 이 작품에서 소설보다는 차라리 설화집에 가까운 일련의 영웅 모험담을 늘어놓고 있는데, 기존에 출간된 그의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무대와 인물 갈등 사이의 명료한 연결점(앰버의 우주관이 없는 코윈의 갈등, 신권주의와 촉진주의/제1세대와 인류 사이의 분리가 없는 샘의 갈등은 상상할 수 없지 않은가)은 좀처럼 보이지 않으며, 작가는 그저 영웅적인 인물의 활극 자체에만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로저 젤라즈니의 본격 팬터지 복수극이라는 (젤라즈니 전담 역자) 김상훈 씨의 (해설을 통한) 오랜 광고 덕에 또 한 편의 [앰버 연대기]를 기대했을 독자들로서는 이 단순한 모험극이 아무래도 불만스럽게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젤라즈니의 실패작으로까지 간주할지도 모르겠다(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굳이 반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작품은 그렇게 걸작에 대한 욕망을 안고 탄생한 작품이 아니다. 정말이지 젤라즈니는 고전적 영웅 팬터지의 팬으로서 딜비쉬 연대기를 쓴 것처럼 보이며, 때로는 정말 그런 입장에서 쓰기 위해 문장을 자제하거나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는 듯하기도 하다. 기존에 소개된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비교적 평이해 보이는 [저주받은 자, 딜비쉬]의 문장은, 이 작품이 젤라즈니의 초기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역량 부족의 증거처럼 간주되는 듯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각 중단편들의 발표 시기를 고려해보면 사실이 아니다. 김상훈 씨의 말에 따르면 총 열한 편의 작품 중 네 번째 작품인 {메라이사의 기사}가 이미 1967년에 발표되었는데, 1967년은 젤라즈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내 이름은 콘래드]가 출간된 다음 해이다. 또 나머지 일곱 편은 1979년부터 발표된 것으로, 이때는 이미 [신들의 사회], [앰버 연대기],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까지 출간된 다음이다. 따라서 현란한 비유를 자제하고 상황의 전개 자체에 주력하는 듯한(물론 후기작의 문장이 좀 더 보기에 즐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언어적 즐거움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수록된 중단편에서 구사했던 언어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 연작 중단편집의 스타일은 젤라즈니가 의도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며, 나는 그 의도가 설화적 영웅 무용담의 형식을 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젤라즈니는 [저주받은 자, 딜비쉬]가 고전적 영웅 팬터지의 영향을 받은 젤라즈니 식 팬터지가 되는 것보다는 그냥 고전적 영웅 팬터지 자체가 되길 바랐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김상훈 씨의 지적처럼 주인공 딜비쉬는 젤라즈니식 ‘복수자’의 계보를 잇는 인물이긴 하지만 복수의 불꽃을 불태우기보다는 고전 영웅적 도덕률에 따라 삼천포로 빠지는 데에 좀 더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행보는 이 같은 느낌을 좀 더 확실히 해준다.

   그런 맥락에서 표제작이자 이 중단편집의 마지막 작품인 {저주받은 자, 딜비쉬}의 유머는 꽤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길을 가던 중 딜비쉬와 그가 탄 말(의 형상을 한 정체불명의 생명체) 블랙이 어느 강도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전체 열한 편의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딜비쉬와 블랙의 만담 농도가 가장 짙은 작품 중 하나인데, 그 만담은 대부분 딜비쉬의 ‘영웅적 호기심’에 대한 블랙의 투덜거림으로 이뤄져 있다. 딜비쉬 연대기의 제2작 [변화의 땅]을 읽지 않더라도 이 단편에서 벌어지는 촌극이 마법사 젤레락에 대한 딜비쉬의 복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그런 고전적인 영웅담에 딜비쉬의 이름을 사용한 제목을 붙인 뒤 이야기 전체를 블랙을 통해 비평하는 구조는 젤라즈니 자신이 딜비쉬 연대기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써 나갔음을 보여주는 자의식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작가로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작품 세계의 원형(原型)에 대한 빚을 팬의 입장에서 갚아나가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자의식적 태도가 [저주받은 자, 딜비쉬]를 [신들의 사회] 급의 걸작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그 정도면 투덜거리기보다는 같이 즐겨줄만한 명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명분 하에서, 어쨌든 이 작품은 명분에 충실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젤라즈니 스스로에게는 충분한 ‘성공작’일 것이다). 장편 소설이라는 딜비쉬 연대기의 제2작 [변화의 땅]이 여기서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단행본 자체는 [저주받은 자, 딜비쉬]보다 [변화의 땅]이 1년 더 일찍 나왔음을 생각해 본다면 큰 변화는 없을 듯도 하다), 딜비쉬의 이야기는 지금 이 자체만으로도 썩 즐겁고 세련된 설화 무용담이 아닌지.



   “정말 그럴 작정이오? 이건 고전적이다 못해 해묵은 수법 아니오. 저 여자 뒤를 따라가면 매복하고 있던 무장한 사내 두어 명이 당신을 덮칠 거요. 그자들을 처치하면 여자는 뒤에서 당신 등을 찌를 거고. 이런 것을 소재로 한 발라드까지 나와 있지 않소. 어제 그런 경험을 하고도 당신은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단 말이오?”

   ……그러나 배우긴 했어도 실천하지 않는 게 때로 소소한 즐거움을 주기도 하는 법이다. 항상 실천하지 않는다면 문제겠지만, 잠시 그런 건 잊고 놀자고 할 때 같이 놀아주는 것도 독자가 동참할 수 있는 재미의 한 유형이 아닐까 싶다. 그 정도면, [저주받은 자, 딜비쉬]를 읽기에는 충분하다.
댓글 1
  • No Profile
    날개 07.03.11 16:1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때론 아쉽게 읽히던 부분들이 이런 글을 통해 새삼스럽게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