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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askalai@gmail.com)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면 감동받을 만한 책.

1988년은 나를 비롯한 대다수 한국인에게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해로만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 해, 수많은 아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전쟁의 시작을 선언하고 또 그 종결을 선언했던 천황 히로히또가 죽음의 병석에 누웠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그는 '빛나는 평화'라는 모순적인 시호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전후에 이루어낸 풍요 이면에 숨어있는 희생자에 대해서도 입을 다문 채. 일본의 여론은 천황의 죽음을 처리하는 데 있어 '전후 40년의 번영은 강하게 부각시키면서 전쟁 그 자체는 간주곡처럼 어물쩍하게 처리'하는 데 주력했고 대다수 일본인이 그 분위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어떤 이들에게 천황의 죽음을 앞두고 조성된 사회 분위기는 그때까지 망각 속에 묻어두려 했던 문제들을 환기시키고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저항의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모습은 힘겨웠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오끼나와에서 개최된 체육대회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려 불태운 슈퍼마켓 주인, 남편의 위패를 호국 신사에 봉헌한 일 -즉 남편의 죽음을 국가가 이용한 일에 대해 항의하여 15년간 재판을 한 야마구찌의 한 주부, 그리고 공식석상에서 천황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발언한 나가사끼의 시장. 저자는 '그들의 삶이 현재와의 연관성 속에서 역사적 책임을 지는 인간의 능력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세 사람의 행동은 모두 "천황", 그 이름이 상징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연결된다. 일본의 천황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라 국가 권위의 응집이며, 복종의 대상으로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 이전에는 군국주의의 모습으로, 그리고 전후 4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자본주의와 근대화의 모습으로 일본인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언론이 만들어낸 추모의 분위기에서 어느 때보다도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며, 그야말로 "죽음 직전의 군주에게 욕된 언사를 퍼붓"는다는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이들 세 사람이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천황의 죽음을 앞두고 고조된 긴장과 억압의 분위기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들 세 사람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는가를 따지거나 전적으로 동조할 필요는 없다. 이들의 행동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수많은 욕설과 죽음의 협박, 말도 안되는 비난과 또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진지한 성찰 안에서 나온 비판, 그리고 격려의 편지와 지지가 이어졌다. 지지와 격려는 이들의 주장 자체에만 호응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자체가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 외면했던 일들을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역사와 인간의 관계, 역사를 책임지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와 연결되는 것. 현재 안의 과거, 삶 속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런 것들을 망각케 하는 '현대의 풍요'에 대해 저항과 성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저항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소수, 약자, 차별받는 자들을 억누르는 권력의 문제, 은폐되어 있고 스스로도 깨닫고 싶어하지 않는 부당함의 문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일본이라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종종 일본의 왜곡된 역사와 막혀 있는 언로, 민주적이라 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를 비웃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 사회를 돌아보았을 때에도 과연 그들을 비웃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천황은 없다. 그러나 어중간한 보수 우익 외의 정당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상대주의 관점을 갖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압박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요미딴촌 촌장의 말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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