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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식물의 역사와 신화

2005.12.30 23:5712.30




은림 (silvaf.zio.to fenner7@hanmail.net)



식물이 살아 있는 지적 생명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결국에는 지금 지구의 주인이라고 하는 인간을 넘어서고(사실 처음부터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모님의 단편에서처럼 우리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그럴 필요도 없는―――주인 있는 집에서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주인이라고 호통치는 격일 수도 있다) 진짜 지구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이 책은 그 가능성과 우리가 무지했던 전혀 다르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신화와 역사 자료, 실증적 예시를 들어 쉬운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구가 생겨나고 최초의 생명체는 식물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도 식물이다.’ 작가는 이런 내용으로 책의 머리를 연다.

최초의 혼돈의 지구에 첫 생명체의 빛을 밝히고 산소와 오존을 만들어 다른 생물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낸 것도 남조류라고 하는 식물(단세포일 수도 다세포일 수도 있으며 흔히 바닷물을 떠다니는 플랑크톤을 말한다)이고, 저물어 가는 노을처럼 태양이 더 이상의 활동을 멈추고 오직 적외선만 내보내어 다른 모든 생물이 멸망할지라도 남조류는 그 적외선만으로 버틸 수 있으므로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도 식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식물의 생명활동은 바다를 벗어나 육지로 퍼져 가게 되어 일부는 동물로 발전되고, 일부는 여전히 식물로 남아 생존을 위한 진화를 시작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모든 식물은 과거의 식물과 같지 않다. 우리가 개념으로 갖고 있던 식물―――수동적―――의 의미도 진짜 ‘식물’과는 다르다. 그들도 여느 동물 못지 않게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진화하고 성별을 나누고 함정을 파고 동물을 이용해 씨를 퍼트리고 때로는 직접(?) 이동하기까지 해 왔다.

책에서는 시종일관 식물을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고 영혼도 정신도 없는 단순히 ‘움직이는 것들을 위한 배경’이 아닌 생명체 자체로서의 현미경을 끼고 식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또한 식물이 동물의 먹이가 됨으로서 더 연약하고 발전 단개상 미개하며, 존재적으로 불완전하다는 보편적 개념에 큰 딴지를 걸고 있다. 오히려 최초의 생명체는 식물이고 동물은 식물의 퇴화, 결핍, 혹은 미성숙과 병든 세포에 의한 파생이며, 과거의 식물과 동물은 지금처럼 서로가 완전히 다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책의 내용에 흥미로운 점은 단지 옛 신화 속의 식물을 꺼내 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식물의 자신이 신격화된 신화적 해석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의 잃어버린 성기는 씨뿌리기에 해당한다. 거기서 비롯된 생명―――신의 희생에 의한 부산물―――식물을 먹고 인간들이 사는 것이므로 어찌 신―――식물에게 감사하지 않을 것인가?
또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현재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곡식 재배는 초기에는 땅에게 하는 가혹 행위였으며 신화상으로는 어머니 대지를 범하는 아들의 형태로 심각한 근친상간이었다. 초기에 재배는 원예나 휘묻이처럼 원래 있던 것에서 조금 더 친화된 협력 관계로 결과물을 얻는 것이므로 지극히 내밀하고 평화로운 교감이었다. 그러나 발전 단계인 경작물을 얻기 위해 땅을 갈고 씨를 뿌려 수확하는 방식은 같은 재배라도 전혀 다른 것으로 땅과의 교감이 아니라 폭력이며 착취라는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신화에서 신이 아벨의 제물을 받고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것은 단지 고기와 식물의 관계가 아니라 원래 자연 상태 그대로의 것을 받는 것과 땅-자연-신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얻은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라는 것이 신화에 대한 이 책의 해석이다.

책의 전반 부분은 이런 식으로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 대해 포괄적으로 훑어 가며, 후반 부분은 우리에게 낯설기도 하고 친숙하기도 한 몇몇 가지 식물에 대한 신화와 실재 쓰임새 등등에 대해 마술적이고도 과학적으로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솔직히 전반부보다 이쪽이 분량이 많아서 다소 아쉬웠지만, 식물의 사전적 생태보다 여러 가지 유래와 실재 쓰임에 대해 알고자 했던 독자들은 다른 어느 책보다 특별하고 만족스럽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책의 모든 주장이 신화의 해석과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느낌은 적잖이 들었지만, 오랫동안 식물을 단지 먹이나 표본으로 삼지 않고 식물 자체의 이야기를 포괄적이며 심도 있게 담아낸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장에 비슷한 맥락의 책들이 몇권 있어서 확인해 봤더니 아뿔사 [나무의 신화]도 같은 작가였다. 두껍다고 회피중이었는데 기꺼히 읽을 용기가 생겼다.)

차례...

<식물의 마술>
최초의 지구 생명체
천상에서 오는 생명의 에너지
식물에서 동물로
육지 정복: 녹색 옷을 입은 지구
성의 진화
나무의 일생
생존을 위한 진화
동물을 이용하는 식물
함정을 파는 식물
모든 시련을 견디는 불굴의 생명력
동물계도 식물계도 아닌 제3의 세계
인간과 식물의 힘
유용한 식물학
자연의 마술
쾌락의 정원
신의 희생
광란의 대향연
곡식과 역사
진보와 신성 모독
식물의 진정한 마술

<마술 식물>
하늘로 오르는 계단-광대버섯
대륙을 삼키다-양귀비
‘고요한 부동의 축복’, ‘놀라운 정신의 희열’ - 삼
신과의 성스러운 만남-페요테선인장
성인식의 역할을 수행하는 식물-담배
마녀들의 연회-벨라돈나풀
여우의 장갑-디기탈리스
성스러운 가지-마편초
최초의 정력제-맨드레이크
신비로운 만병통치약-인삼
동종 요법의 원조-키나나무
생명을 구하는 기적-샐비어
아르테미스 여신의 축복-쑥
남자들을 위한 쑥-서던우드
양념으로 쓰는 허브-타라곤
부활의 희망을 노래하는 풀-로즈메리
끈질긴 생명력, 영원한 부활-겨우살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백합
지극한 깨달음의 세계-연꽃
어둠을 무찌르는 빛의 전사-서양고추나물
천사가 전해준 ‘황금 사과’-오렌지
인간에게 음악을 선사하다-갈대
신의 열매-카카오
위대한 정신의 각성제-커피
깨어 있는 정신, 평온한 마음-차
생명의 술, 불멸의 술-포도
단맛에 대한 갈망-사탕수수
매혹적인 향신료-계피
화끈하고 강렬한 맛-생강
동양에서 온 가장 귀한 향신료-후추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연기-향
향기 어린 꽃봉오리-정향
신에게 바치는 향기-땅백리향
신기한 나뭇진-고무
신이 내린 선물-옥수수
문명의 씨앗-밀
세계의 절반을 먹여 살리는 곡물-벼
신데렐라의 꿈-호박
죽은 자의 영혼-잠두
마술사의 침-송로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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