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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정을 모르고 『가스라기』를 맨 처음 집어 든 독자는 이렇게 묻는다. “진산, 민해연이라니, 둘이 공저한 거야?”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무협 작가 진산과 로맨스 작가 민해연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진산이라는 이름으로 낸 책 중에는 『색마열전』, 『정과 검』, 『대사형』, 『사천당문』, 『결전전야』 등의 무협 소설이 있으며, 민해연이라는 이름으로는 일명 셰익스피어 떼아뜨 3부작이라고 하는 로맨스 소설『커튼콜』, 『오디션』, 『리허설』을 출간한 바 있다.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톡톡 튀는 대사를 제외하고는 이 작가가 쓴 무협과 로맨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낸 작품은 그 두 이름을 함께 썼다. 어째서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가스라기』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 중국과 한국의 신화와 민담을 뒤섞어 새롭게 만든 환상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이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와 가치관은 가히 무협적이고 환상적인 반면, 그 모든 틀을 지배하는 중심 줄기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가스라기』는 그동안 작가가 쌓아온 커리어를 모두 쏟아 부은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어느 쪽에 더 치중했느냐고 묻는다면, 이 작품은 민해연보다는 진산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중심 이야기는 한 남자와 한 여자와 그를 둘러 싼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이지만, 그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건 『가스라기』가 하나의 세계를 친절하고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입문편이라는 사실이다.


가스라기의 스토리라인
천도봉과 연화봉의 주인이자 진선인 천군과 지한은 쌍둥이 형제이다. 그러나 지한은 천군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증오하며, 두 사람은 곧 천선이 되어 승천해야 하는 화영의 뒤를 잇는 궁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라이벌이다. 사도를 휘두르는 지한은 천군을 기습하고, 천군은 큰 부상을 입은 채로 인간 세상으로 떨어진다.
부상당한 천군을 주운 것은 가스라기라는 소녀였다. 가스라기는 큰 죄인을 일컫는 말로, 가스라기의 자식은 계속 가스라기라는 이름을 이어받으며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천하며, 친구도 혈육도 없는 가스라기는 자기만 아는 특별한 샘에서 천군을 간호한다. 천군은 가스라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심을 품지만 어쨌든 부상이 완치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가스라기가 사는 숲은 신선의 피가 떨어진 탓에 까맣게 죽어 가기 시작하고, 천군은 환주에서 내려온 관리 울지영소에게, 환공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라 한다. 천군을 간호하고 함께 지내는 동안 가스라기는 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임으로 사랑하게 된다.
몸이 낫고 진선의 힘을 되찾아서 돌아가려는 천군에게 가스라기는 살려 준 은혜를 갚으라고 떼를 쓴다. 목숨을 구한다는 것은 깊은 인연을 맺는 것이고, 진선은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의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가스라기는 천군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인연을 원했고, 천군은 가스라기와 하룻밤을 보내 그녀에게 징표를 남겨 준다. 다음 생에서나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가스라기는 삶의 힘을 잃고 빨리 죽고 싶어 하지만, 뱀 앞에서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토끼를 보고 크게 깨닫고 일어난다. 그냥 죽기만 바랄 게 아니라, 이번 생에 천군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고 말겠다고 결심한 가스라기는 그 토끼를 벗 삼아 여행을 떠난다. 긴 여행 끝에 가스라기가 알아낸 방법은 무한계를 밟아 선계에 올라가는 것. 하루에 한 발밖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계단을 천 개나 밟으면 선계에 갈 수 있다. 천군을 만날 수 있다는 일념만으로 가스라기는 무한계에 발을 내디디고, 끝내 선계에 올라선다. 그러나 그것은 업을 극복한 완성의 발걸음이 아니라, 업보를 대면하고 극복하기 위한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가스라기는 천군을 하늘 밑으로 떨어뜨린 지한을 만나고, 자신에게 예비된 운명의 실체를 보게 된다.

삼라의 세계
『가스라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뜻으로 삼라라고 일컬어진다. 인간이나 요괴가 수행을 하면 신선이 되고, 신선으로서 더 수행을 하면 진선이 되는데, 이때부터는 하나의 궁을 받고, 천계로부터 천녀를 배필로 받는다. 진선으로서 오랜 세월을 보내면 진선 여럿을 거느린 궁주가 되며, 여기에서 다시 수행의 극에 올라 천선이 되면 자신의 이름을 따라 새로운 세계를, 별을 다스리게 된다. 이는 삼라라는 세계가 말 그대로 사실상 무한히 펼쳐진 세계라는 뜻이 된다.
엄정한 법칙에 따라 마련된 세계이지만 그 기반은 넓다. 평소에 동양 철학과 신화, 민담을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쉽게 기원을 알 수 있을 법한 설정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일단 수행을 통해 인간의 티끌을 버리고 승천하는 것은 불교와 도교에서 보이는 사상이지만, 그 뿌리인 인도와도 맞닿아 있다. 체계 자체는 불교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그러한 수행의 결과와 세계를 묘사하는 방법은 상당히 도교적이다. 특히 다스리는 자의 마음에 따라 세계의 양상이 결정되는 부분은 하늘과 사람이 하나인 유교적 정치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세상만물이 마음에 달렸다는 도교의 핵심을 떠올리게 한다.

배경과 인물의 조화
『가스라기』가 가치 있는 부분은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철학적인 세계와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스라기, 천군, 지한, 화영, 환공 기백, 울지영소,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모든 조연들은 삼라라는 세계를 돌리는 수레바퀴에서 모두 자유롭지 않다. 그들이 사는 삼라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천국과 지옥이 바뀔 수 있는 수행의 세계이며, 자신이 저지른 짓과 자신이 한 결정이 업보로 돌아오는 인과율의 세계이다. 실제 세계에서는 복잡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법칙이 그대로 재현된 세계이다. 『가스라기』의 등장인물은 모두 자기가 선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을 규정하고 결정한다. 천군과 화영은 큰 세계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기울어질 수 없는 외로움을, 지한은 단 하나만을 바라보고 무슨 수단이든 써서 아등바등 기어오르려고 하는, 끓어오르는 원한을, 울지영소는 하늘을 대면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환공 기백은 하늘과 인간 사이에 선 자로서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가스라기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천수 때문에 괴로워하고 시련을 맞이한다.
분명한 자기 이야기를 가진 주연 외에도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조연들도 톡톡히 감초 역할을 해내고 있다. 가스라기가 무한계를 걸어올라가 선녀로서 수행하게 됐을 때 그 스승이 되는 여진선고와 가스라기의 동료가 되는 운교와 백화는 스스로의 이야기는 비중이 적지만, 가끔 새로운 개념이 나올 때 가스라기나 인간에게 삼라의 이치를 설명해 주어, 더불어 독자들도 세계에 대해서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돕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온라인 게임의 튜토리얼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나, 이들 역시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로서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말해 준 삼라의 이치가 본 이야기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보는 쾌감 또한 대단하다.
분명히『가스라기』의 중심에는 가스라기와 임의 사랑이야기가 있고, 그 주위로 다른 여러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있으므로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와 인물이 밀착되어 인간의 복합적인 세태와 양상을 보여 주고 독자가 세계와 운명의 무게를 다른 눈으로 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스라기』는 사랑이야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사실은 그 인간과 세계의 이야기가 『가스라기』의 가장 큰 독자성이자 가치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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