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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체셔의 책 이야기... 1

2006.02.25 00:2802.25





ferdica@hanmail.net

아더왕과 양키
마크 트웨인 지음, 조애리 옮김 / 미래사
나의 점수: ★★★★

많은 약점들도 지니고 있지만 그걸 넘어서 많은 뛰어난 점들도 지니고 있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에는, 대체역사를 다룬 SF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아니면 시간여행을 다뤘겠지라고. 그래서 흥미를 느꼈고 이제야 찾아 읽게 되었지만, 읽고 나서의 느낌은 상당히 달랐다. 오히려 이것은 유토피아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어느 날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쓴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본 내용은 그의 책―――일기 형식의―――의 이야기다. 주인공 행크는 19세기 코네티컷의 미국인이었지만 어쩌다 6세기, 아더왕의 시대에 떨어지게 된다. 그는 당황하지만 빨리 사태에 적응하고 마침 일어나기로 되어 있던 일식을 이용하여 자신이 위대한 마법사라고 주장하며 수상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얻는다. 그리고 그 6세기를, 진보된 기술과 사고의 세기,19세기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의 시도는 성공하며, 대부분의 내용은 그가 6세기에서 겪는 일들과 어떻게 기술발전을 해나가는가, 사람들을 바꾸려 하는가 하는 일들과 이런저런 모험이다. 그 이야기들은 이런저런 유머, 풍자 독설들로 꾸며져 있으며 여러 에피소드들이 나열되어 있어, 좀 정신이 없다. 너무 많은 얘기를 다루려 하다 구성을 잃은 점, 그것이 이 책의 큰 약점 중 하나다.

하지만 작가는 더 중요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평을 약간 참고하자면―――행크는 6세기의 자의적 권력구조, 사람들을 그저 복종하게 만드는 종교, 구속들,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사고와 제도들(예를 들어 노예제도라든가)를 없애려 한다. 그는 19세기, 효율적인 기술문명을 목표로 삼고 움직이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다. 그는 민주주의와 신교를 도입하려 하고 그를 위해 기술문명을 도입한다. 하지만 그 기술문명은 화약, 무기 등으로 대표되며 결국 파괴의 기술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위하여 그는 수만 명의 기사들을 손가락 하나로 죽이며, 그가 세운 공장들과 문명은 결국 모두 파괴된다. 또한 그는 자신이 몰아내려던 자의적 권력을 손에 쥐고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행크의 시도는 실패한다. 작가는 6세기뿐만 아니라 19세기도 함께 비판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 명확한 답변은 하지 않는다. 선악은 모호하다. 인간의 내적 가능성―――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믿었지만 그 인간에 내재된 악―――기술문명의 폐해, 무지로 인한 악 등―――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이 스스로 발전하게 놔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그렇다면 여러 타임머신 소설들에 나오는 원칙들―――과거의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도 이런 사고를 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행동이 야기할 결과를 막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있지만).

19세기의 인간이 과연 진보했다고 볼 수 있을까? 과학과 민주주의는 진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 내부의 악이다([갈라파고스]에서 커트 보네거트는 뇌란 사악한 계략을 꾸미고 실행하는 데 한계를 모르는 치명적 결함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인간 내부의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히려 원시 생활로 돌아가는 시도도 많았다. 하지만 물론 거기에도 폐해가 있으며, 그런 생활에 대한 참고할 만한 이야기도 있으니, 바로 마이크 레스닉의 [키리냐가]다.



키리냐가 1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나의 점수: ★★★★

잃어버린 유토피아와 그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삶, 실패에 관한 이야기.

배경은 미래. 문명 세계의 이런저런 폐해에 질린 노인 코리바는 지구 밖의 한 소행성에서 문명과 기술과 동떨어진, 자연 그대로의 낙원을 만들고자 한다. 처음 그와 뜻을 같이하고 문명 세계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에게 그곳은 유토피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에게도 과연 그럴까? 그 아이들은 그런 삶에 동의하지 않았고 선택권도 없었다. 그래서 글들(연작들이다)은 그 유토피아의 환상이 깨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보여준다.

주인공 코리바는 예전 아프리카를 모델로 한 그 사회에서 주술사로서,외계―――문명 세계―――와의 접촉을 전담하며 그 세계를 유지시키려 한다. 하지만 접촉이 없을 수는 없다. 접촉 덕분에 사회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또한 강요되는 전통에 많은 사람들이 저항한다. 코리바는 애써 유토피아를 지키려 하지만, 과연 그곳이 유토피아인가?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처음에는 그런 시도가 그르다고 생각하지만은 않았지만, 글을 읽어갈수록 코리바는 독선과 아집에 가득찬 노인네로만 보였다.

여자는 글을 배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절망하여 자살하는 소녀(이 에피소드가 개인적으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정식판이 나오기 전 인터넷 번역본으로 이것만 먼저 접했었다). 주사 한 방이면 나을 병들로 고통받고 죽어가는 아이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전통이 유지되고 고립되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의 선택으로 이주해 왔지만 이런저런 ‘지켜지기 위해서 지키는’ 전통들로 고통받고 결국 다시 문명 사회로 떠나는 부부. 코리바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가 지금까지 지켜온 것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문제를 던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런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아이들은 선택하지 않았고, 부모의 선택으로 인해 살아가는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라고.

그리고 이번에는 과학기술과 자연이 결합된 유토피아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보자.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금지된 섬]이다.



금지된 섬
올더스 헉슬리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나의 점수: ★★★★

글쎄. 과연 유토피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섬 팔라. 기자인 주인공 윌은 목숨을 걸고 그곳으로 향하고, 배의 난파로 섬에 다다르게 된다. 그의 주목적은 원유가 풍부한 팔라와 계약을 체결하려는 사업가 갤러하이드의 밀사 역할. 그래서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실권이 없는 왕자 무루간과 그의 어머니, 왕비 라니를 만나 이런저런 계획을 꾸미게 된다.

하지만 그는 기술과 자연(팔라는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천연자원이 풍부한 농업국가이다), 그리고 행복하게 공존하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팔라에 점점 동화되고, 이를 파괴하려는 기술과 무기(팔라를 손아귀에 쥐려는 렌당 제국의 독재자 디파 대령으로 상징되는), 그리고 자본을 도입하는 자신의 역할에 회의를 느껴 그 일을 그만두기로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화를 추구하는 팔라 국민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무루간과 라니, 그리고 디파 대령의 합작으로 팔라에는 군대와 탱크가 들어오며, 반역자(지금까지의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들을 처형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데…….

사실 소설적인 면으로는 많이 빈약하다. 그저 이런저런 대화들로 작가 자신이 생각한 철학과 이론들을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사실 재미도 좀 떨어지고, 어려운 부분들도 많다.하지만 기술과 자연이 결합하고, 자아를 찾아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상당히 짜임새 있게 그려지고 있다. 불교와 힌두 교, 최면, 모크샤, 사랑의 요가로 상징되어 자아찾기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그려지는 섹스, 그리고 과학기술의 결합은 상당히 묘한 느낌을 준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외부에서 교육을 받은 무루간과 라니는 그런 삶이 비효율적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탱크와 총소리 뒤에 찾아드는 새와 벌레의 울음소리, 그리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애니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바람 계곡과 군사국 토르메키아의 대립이 떠올랐다).

이 책들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다. 과연 유토피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래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키리냐가와 금지된 섬의 실패 요인 중 하나는 외부와의 접촉을 100% 차단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안에서는 행복할 수도 있지만, 외계와 교류하면서 그 행복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완전한 차단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내부 자체에서 그런 삶을 원치 않는 사람들을 벗어날 수 있게 해 줘야 된다는 점에서는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시 유토피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건가. 유토피아는 수많은 작가들(과 사람들)이 집착하고 다뤄온 문제이다. 그만큼 충분히 생각해볼 가치가 있고.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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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02.27 20:23 댓글 수정 삭제
    현대문명은 너무나 파괴적이라(종교와 신화와 모든 전통적 가치 부정...) 현대문명에 접한 원주민사회는 순식간에 파괴되어버린다. ..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 서구인들이 흔히 상상하는 유토피아적인 사회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지금도 현대문명이 닿지 않는 곳에 소규모 원주민사회는 많아요. 사유재산도 없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고... 하지만 보통 현대인이 TV도 없는 그런 데 가서 타잔처럼 살라고 하면 미쳐 버리겠죠.

    유토피아가 실패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유토피아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

    시골 와서 살면서 느끼는 건데, 시골에만 있으면 숨이 탁탁 막힌다는 사람이 있고 도시에만 가면 숨이 탁탁 막힌다는 사람이 있습디다. ... 똑같은 환경인데 말이죠. 그래서 요즘에 사람이 태생적으로 도시사람이 있고 시골사람이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 No Profile
    06.02.27 20:34 댓글 수정 삭제
    좋은 글이네요. 이런 식으로 관련된 책을 같이 소개하는 것. 다음에도 기대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