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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를 넘어서
원제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Have Space Suit: Will Travel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SF의 해설이나 역자의 말 같은 부분을 잘 살펴보면, 두세 권에 하나 꼴로 꼭 나오는 문구가 있다.

“SF하면 이러저러한 유치한 걸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 글은 이래저래 뛰어나고 우수하여…… 결론적으로 이 글(만?)은 보통의 SF와는 다른 좋은 글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에 나온 SF가 전부 그냥 SF와 다른 뛰어난 글인데 SF에 대한 인식이 왜 이 모양이지? ……라는 의문을 품은 이가 나 혼자만이 아니길 바란다.

사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SF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가 우주선과 외계인을 다룬 유치하고 천박한 모험물이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물로 알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SF 장르의 오랜 팬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르가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하며 뛰어나고 특출난지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여러 수단을 동원했다. 동서고금의 알려진 거장과 문학작품이 사실 SF였다는 식으로 자기편 끌어들이기 수법을 쓰기도 하고, 경이감·사변소설 같은 학구적이고 난해한 용어를 동원해서 권위에 대한 호소를 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팬덤의 이야기에 빠져들다보면 또 의문에 빠지게 된다. SF란 게 이렇게 대단하고 고상한 존재였던가? 그럼 외계인이랑 광선총 쏘면서 싸우는 이야기는 SF가 아니었던가? 우리가 알고 있던 SF는 뭐고 우리가 좋아하는 SF는 뭐지? 이른바 청소년기에 겪는다는 정체성의 혼란도 아니고, SF라는 장르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게 된다. 어떤 이는 그게 너무 유치하고 형편없어서 읽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수준이 높고 지적이라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두 가지가 모두 참이라면,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인정할 수 있는 SF란 무엇인가? 우주도 나오고, 외계인도 나오고, 지구도 위험하고, 이런저런 모험도 겪지만, 유치하고 않고 심오하기도 하면서 그렇다고 난해하거나 지루하지도 않은 그런 작품은 없을까? 그런 글을 쓰는 작가는 없을까?

물론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출간된 작품 중에서 찾는다면 조금 어렵다. 여기에 본 필자가 찾은 답을 제출하겠다. 제목은 [은하를 넘어서](원제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작가는 로버트 A. 하인라인.

이 소설은 청소년을 위해 쓰여진 글답게 심각하고 어렵게 생각하고 읽을 필요가 없다. 주인공 소년이 나오고, 지구를 침략하는 흉칙하게 생긴 외계인이 나오며, 우주를 넘나드는 모험이 펼쳐지고, 마침내는 지구를 구하기 위한 주인공의 최후의 시련이 닥쳐온다. 기본적으로 재미있고 신이 나는 모험소설이다. 주인공에게 공감도 하고, 그와 함께 위기를 겪으며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시련을 극복할 때는 가슴도 쓸어내리며 롤러코스터를 타듯, 긴 영화를 관람하듯 즐겁게 읽으면 된다.

하지만 ‘미스터 SF’ 하인라인의 내공은 이 소설에서도 빛난다. 클리셰의 극한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을, 곤충처럼 생긴 못된 외계인이 나오면서도 이야기의 곳곳에서는 과학적 고증과 현실적인 상황설명이 들어 있어 결코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엔 인류의 역사와 과오까지 성찰하게 만들어준다. 이 어찌 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인라인의 글은 영미권에서는 장르를 넘어 청소년들의 애독서로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빅3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낮고 번역된 글도 적은 편인데, 작품 수는 클라크가 더 적지 않냐고 반문할 이도 있을지 모르나 하인라인의 작품은 대부분 아동용 축약본으로 소개되었고 현재로는 구할 길이 없다. 현재 장편으로는 재간된 [스타십 트루퍼스]밖에 없으나 다행히 최근 [프라이데이]가 최초로 번역소개되어 명목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표작인 [『The Moon is a Harsh Mistress]가 재번역되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르 카레의 소설 [러시아 하우스] 중 한 문구(개인적으로 좋아한다)를 패러디하여 인용하자면, “SF팬의 일이란 기다림이다.”


덧1. 하인라인은 일본에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가 ‘로리콘 작가’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SF치고는 드물게) 어린 소녀가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그 이유인데, 이 작품에서도 ‘젓가락과 같은 몸매를 한’ 천재 소녀 피위를 보며 (영미권 B급 SF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파 금발 미녀보다도 더 마음에 들어한 사람들에게는 과연 그렇게 대접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 피위는 속칭 오타쿠라 불리는 사람들이 츤데레(ツンデレ)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유형의 캐릭터가 아닌가.

덧2. 이 소설은 현재 ‘책 없음, 독서 불가능’이다. 절판된지 오래된 책을 소개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낀다(이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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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onism 06.03.02 15:08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재밌다, 재밌다를 연발하며 읽었던 책입니다. 그 즐거움이 다시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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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i0 06.03.28 11:40 댓글 수정 삭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과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고전 <겐지 이야기>는 따지고 보면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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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nnon 06.05.26 20:17 댓글 수정 삭제
    여름으로 가는 문, 달은..., 스타쉽...,스트레인저,이 작품, 하늘의 터널, 역시 한뜻에서 나온 쌍둥이 어쩌고... 결코 적은 수가 아닌데요? 아시모프보다는 적은가? 물론 저도 하인라인이 더 나오기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