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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푸른 꽃, 노발리스

2005.12.30 23:5412.30





pilza2@gmail.com

1. 판타지의 조상 낭만주의

판타지의 기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몇 개의 분기점을 만나게 된다. 물론 크게 잡아 신화, 전설, 동화, 민담에서 이어져 왔다고 하면 설명은 간단하지만 인류 예술과 문화의 총체적 기원인 신화를 판타지로 잡아버리면 설명하기 난처해진다. 소설의 조상은 시요 시의 조상은 노래이니, 문자가 생기기 이전 예술은 다 같은 곳에서 출발한 때문이다.

그러니 크고 간단하게 잡아서 판타지의 할아버지를 로망스로 잡고 아버지는 고딕소설, 어머니는 로맨티시즘(낭만주의) 소설 정도로 보면 좋을 것 같다. 고딕소설의 중심지가 영국이라면 낭만주의의 중심지는 독일이다. 독일 낭만주의에서 장르 판타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라면 E.T.A. 호프만을 드는 게 좋겠지만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작과 작가를 뽑으라면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드는 게 정설처럼 되어 있다. 이로써 장르소설 서평란에서 본서를 다루는 이유가 (간신히) 성립된 셈이다.

2. 푸른 꽃

주인공 하인리히는 꿈 속에서 아름답고 신비로운 푸른 꽃을 본다. 꿈에서 깨고도 황홀한 감정에 도취되었던 그에게 아버지는 자신도 예전에 비슷한 꿈을 꾸고 푸른 꽃을 본 적이 있다며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한다.

얼마 후 하인리히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함께 떠난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여행 도중 신비로운 시인을 만나기도 한다. 마침내 외할아버지댁에 도착한 하인리히는 마틸데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인리히는 마틸데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 꿈에서 푸른 꽃을 봤을 때와 비슷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 그를 위하여 살아가겠노라 결심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미완성작이다. 작가 노발리스는 2부로 구성한 전체 작품에서 1부를 완성하고 2부 도입부까지 쓴 상태에서 사망했다. 결국 그 이후 내용은 그의 친구가 생전에 나눈 이야기와 남긴 몇 편의 시와 짧은 글을 모아 추측한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3. 자연과 예술과 사랑의 지고(至高)함에 바치는 헌시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시에 가깝다. 물론 서사형식의 태동기에 나온 작품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 자체가 하나의 시요 노래다.

더 나아가 이 소설은 그 내용 자체가 시(로 대표되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하인리히와 여행도중 만난 시인을 통해 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사랑과 자연을 노래하는 것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그 지고한 경지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푸른 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 그리고 꽃을 통해 연상하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 이 모든 게 하나가 되면서 시인은 예술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시에 대한 태도와 시인의 자연관은 동양의 사상과 일치되는 부분이 있다.

“사람이 충심으로 자연과 친숙해지면 그 자연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중, 하인리히의 대사)

자연과 친해져서 자연에 대해 알았는데도 자연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많은 이들이 저 문장을 보고 도가사상을 떠올리는데 동의할 것이다. 도(道)는 정의할 수 없고 가리킬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노발리스가 말한 자연은 도가에서 말하는 자연과 흡사하다. 또한 이 소설이 말하는 시인의 자연관, 혹은 시인과 자연과의 합일의 경지는 이문열이 [시인]에서 김삿갓을 통해 드러낸 모습과도 흡사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주인공 하인리히의 아버지다. 푸른 꽃을 본 신비한 꿈을 꾼 하인리히에게 그는 자신도 똑같은 꿈을 꿨지만 그저 꿈일 뿐 무의미하다고 면박을 준다. 그 역시 어쩌면 젊었을 때는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 그는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여 시인의 꿈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계속 그 꿈과 이상을 품은 채 시인으로 자라났다. 2부 첫머리에서 등장한 나이를 먹은 하인리히의 모습에서 짧으나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원래 이 소설 자체가 전설적인 대시인(大詩人) 하인리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는 외적 배경에서 유추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하인리히는 아버지와 달리 푸른 꽃에 대한 꿈을 품고(그의 연인은 죽은 것 같다……. 미완작이므로 내용 유출은 아니다) 위대한 시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 자체가 시인에 대한 소설임과 동시에 시에 대한, 자연과 사랑에 대한 찬미가이다.

4. 사족

본서의 원제는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 주인공의 이름을 붙인 평범한 제목이지만 번역본은 [푸른 꽃]으로 붙였다. 마치 동화 [파랑새]와 흡사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역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목은 일본의 번역제목 [푸른 꽃(靑い花)]을 그대로 따왔을 가능성이 높아, 최초 소개되었을 때 일본어판의 중역으로 들어왔음을 증명하기도 하는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다(*).

번역은 현재 구할 수 있는 출간본만 4종이나 되어 다 비교하지 못했으나 민음사판이 좋다는 의견이 많다. 개인적으로 책의 크기나 모양, 가독성 등은 열림원판(만 제목이 [파란 꽃]이다)이 좋다고 생각한다(표지도 단순명료하지만 이쪽이 제일 나은 듯). 범우사판은 전체적으로 책이 크고 표지가 투박해서 중고등학교 교재처럼 보이는 관계로 소장하기엔 좋지 않아 보인다. 다만 범우사판은 해설이 가장 길고 상세하며 아내를 잃고 쓴 장시 {밤의 찬가}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는 가장 높다. 남은 판본은 접하지 못해서 비교하지 못했음을 양해바란다.




일본어판 [푸른 꽃(靑い花)]은 1949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 번역되었는지 아시는 분은 가르쳐주시길.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먼저 나오고 일본에서 그 번역제목을 따왔을 가능성은, 서운하게도 없다고 봐도 된다. 80년대까지 우리나라 번역소설의 태반(특히 추리와 SF)은 영미를 위시한 외국 소설을 일본에서 번역한 걸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중역본이니까[그 때문에 원제와 다른 독특한 번역제목의 태반은 알고보니 일본어판과 같다는 비극(?)이 생겨났다].

관련자료
http://homepage1.nifty.com/ta/sfn/novalis.htm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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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로스 05.12.31 09:30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정말 제 수명을 몇 년 주고서라도 2부를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