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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지의 고백

본서에 관련한 부끄러운 일화를 고백하며 소개하고자 한다. [2004 세계 환상문학 걸작 단편선]이 출간되었을 때 무척 기쁘면서도 한편 이 기회를 노려 잘난 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 필자는, 이 책이 엘런 대틀로와 테리 윈들링의 선집을 최초로 번역출간한 것이라며 판타지가 유행인 우리나라에서 왜 이렇게 늦게야 나왔냐며 제법 훈계하는 투로 글을 적었다(인터넷 어딘가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지만 대틀로와 윈들링의 선집 [은빛 자작나무 가지, 핏빛 달(Silver Birch, Blood Moon)]이 [마법에 걸린 동화]라는 제목으로 이미 2000년에(일부지만)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떤 분야든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잘난 척을 하게 되면 단순한 스노비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이 책은 1999년에 출간되어 세계환상문학상을 수상했는데, 다음해인 2000년에 번역되었으니 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른 편이다.
최근에야 장르소설 붐이 일어 신간이 바로 소개되는 바람에 가령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같은 경우 번역 출간된 뒤에 휴고상과 세계환상문학상 수상소식을 듣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놀라운 일도 벌어지게 되었지만…….


2. 동화 패러디

우리나라도 동화 재창작 관련도서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잔인하여 삭제된 원본을 복원하거나, 기존의 상투적인 내용을 비꼬아 패러디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수정하거나, 기괴하고 독특하게 재창작하는 등 소설을 비롯한 예술의 원형인 동화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늘 있었다.

본서는 장르소설쪽의 작가들이 동화를 뒤집고 패러디하여 재창작한 글을 모은 선집이다.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 동화]를 위시한 동화 재창작 도서의 유행이 본서의 빠른 번역소개의 이유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출판사의 소개와 '옮긴이의 말' 역시 동화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작가와 편집자의 면면을 봐도 그렇고 그 내용 역시 장르 판타지의 수작(秀作)을 모은 걸작 단편선의 이름을 걸 만한 판타지 단편집임은 분명하다.


3. 수록작 소개

마녀의 딸 인어 공주(The Sea Hag) - 멜리사 리 쇼> '인어공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마녀가 주인공이다. 더구나 왕자에게 반해 육지로 올려가겠다는 인어를 말리고 나서는데…….
마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현명하고 강인한 여성상을 그려낸 좋은 여성소설이다.

후회스런 입맞춤(Kiss Kiss) - 태니스 리> '개구리 왕자'를 뒤집었지만 개구리가 덩치만 커진다든지 공주도 개구리가 된다든지 하는 인터넷 개그 만화식의 뒤집기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보다 훨씬 품위있고 섬세하며 유려한 글이다. 반전의 내용은 역시 직접 읽어봐야…….

행복한 미녀와 야수(Skin So Green and Fine) - 웬디 휠러> 현대판 ‘미녀와 야수’? 세련되고 현실적이며 개연성이 있는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가 되었다.

잃어버린 목소리(The Shell Box) - 캐러윈 롱> 동화의 몇 가지 원형적 소재(우리의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와 유사한 부분도 있을 정도)가 보이지만 일단 순수 창작동화인 듯 하다. 무력한 희생자로 그려지던 여성의 시점에서 보물의 획득과 소실, 남편과 아내,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마지막 어머니의 제안에 머웬이 한 선택은 동화를 벗어난 현대 여성소설의 한 방향을 보여주는 듯 하다.

럼펠스틸트스킨(The Price) - 패트리샤 브릭스> ‘럼펠스틸트스킨’이란 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 구조는 원형적인 ‘주인공의 위기―――주위의 조력―――시련의 극복’ 순서를 따르고 있는 듯 하다(심지어 ‘콩쥐팥쥐’도 이와 같으니). 하지만 결말부분의 뒤집기와 파격은 ‘후회스런 입맞춤’, ‘잃어버린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동화의 상투성과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로 느껴진다.


4. 불만사항

본서에 대한 큰 불만은 21편씩이나 담긴 원서에서 겨우 다섯 편만 발췌하여 번역출간한 점이다. 기껏 비싼 저작권료 내면서 책낼 바에야 좀 더 싣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하비 제이콥스, 낸시 크레스, 닐 게이먼 등 유명작가의 글이 누락되었다니 아쉽다.

그 다음에 제목 대부분을 바꿨는데 그리 마음에 들지 않게 바꾼 것도 불만사항. 원제보다 더 멋지고 좋지 않는 한 원제를 살리는 게 좋다는 입장을 가진 독자로서는 이 역시 불만사항이 될 수밖에.

엘런 대틀로와 테리 윈들링이 편집한 동화 앤솔러지 시리즈는 6권이나 나온 유서깊은(?) 대작 시리즈다. 이번작은 다섯 번째 선집으로, 전부 번역출간되면 물론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일부라도 더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기회를 빌려 번역출간을 이 연사 목청껏 외치고 싶지만…….

원서를 읽을 능력이 못되는 뜨내기 장르독자는 이렇듯 열등감과 시기, 질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구원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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