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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wonikcraft2@hanmail.net)



아래 글은 본인이 한 가지 책에 대한 비평을 가한 것이 아니다. 명시적으로는 두 권의 책을 병행하여 비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둘의 병행이 상호간섭하는 가운데 들뢰즈적 맥락이 총동원되기 때문에 이것이 엄밀히 말해 북 리뷰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미레유 뷔댕의 책 [사하라: 들뢰즈의 미학]을 읽고 들뢰즈의 미학적 형식과 몰정치성에 대해 쓰는 것이 리뷰를 쓰게 된 첫째 계기라 단 한 권(혹은 두 권)의 책을 위한, 그러나 모든 책을 위한 리뷰를 쓰는 것이라는 말을 변명삼아 하고 싶다.





사하라, 그 존재의 함성
-형식과 더불어 생성을, 다수(多數)성과 더불어 일자(一者)를-

이 책은 주목할 만하게도, 들뢰즈를 미학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 책이 변별적 가치는 바로 들뢰즈의 철학을 ‘삶의 정치’나 ‘정치의 삶’으로 성급하게 우리를 이끌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대신에 그는 표면에 존속하는 형식을 섬세하게 탐사하는 미학자 들뢰즈로 우리를 이끈다. 이를 재번역하자면, 형식을 생성의 와중에서 사유한 미학자 들뢰즈를 발견한다. 이런 들뢰즈-상에 대한 통찰력은 그다지 저자에 의해 전투적으로 제시되지 않지만, 이는 다질적 욕망에 대한 긍정과 탈주에 대한 분열증적 열망을 선포했던 들뢰즈의 정치적 이미지와 대립하는 것이다. 그런 정치적 이미지는, 오로지 생성만을 아는,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정신분열증적인 들뢰즈의 이미지, 대중에게 공공연히 유포된 들뢰즈의 이미지에 기초한다.
  
우리가 이 책을 비판적으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일의적Univocal 존재론과 ‘형식’/‘생성’의 이분법적 대립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긴장을 사전에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결국 그런 긴장과 대립은 들뢰즈의 일의적 철학에 거대한 균열을 내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차이와 생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 못지않게 ‘일의성과 내재성’이 중요하기에 그런 균열은 치명적이다. 우리는 실은 그 둘은 동일한 실체의 두 가지 양상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의성과 내재성의 원칙이 깨어질 때, 차이와 생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은 어느덧 상대적인 긍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들뢰즈를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와 더불어, 위대한 일의성의 철학, 오로지 내재적(Intrinsic) 지평으로만 생성을 사유하는 철학, 평평한 평면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철학, 반대로 어떤 간극과 거리도 불신하는 철학, 나아가 이데아와 모사물 간의 가로놓여진 이분법적인 심연을 부정하고 오로지 일자(一者)의 존재만을 긍정하는 들뢰즈로 알아본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들뢰즈의 급진적인, 생성에 대한 긍정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만 함정에 빠져, ‘형식’에 대한(against), 통일성에 대한, 수목적 체계에 대한, 생성의 흐름을 절단하는 전제적인 권력에 대한 집요한 반대만을 일삼다가 바로 그들 자신이 옹호했던 그의 철학을 스스로가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그러한 위기가 들뢰즈 철학 자체의 문제에서 연원하기도 하거니와, 실은 그 위기의 절반 이상은 들뢰즈에 대한 기존의 불충분한 독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생성의 침전물(무정형적 특이성들을 윤곽 짓고 배치하는 형식, 익명적 흐름 위에 떠오른 개체, 주체와 대상, 모든 재현의 형식, 유기체, 가족, 국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를 구분 짓는 계급적 전선)로 파악된 형식에 적대감을 가지다 못해 그것을 건너뛰기로 작정한 들뢰즈라는 이미지이다. 또는 전개체적이고 익명적인 우글거림, 특이성들의 강도적 배분, 다수적 생성 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항하는 사춘기 소년과 같은 들뢰즈라는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런 들뢰즈의 적대자들(정주민적인 것)이 들뢰즈의 긍정되는 것(유목적인 것)들과 한 쌍으로 다루어진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들을 명백히 ‘타자(他者)화’하지 않을 수 없고 종국에 가서는 들뢰즈적 일자(一者)에 외밀한(Extimate) 타자라는, 일의성과 내재성에 반하는, 외재적 범주를 도입하고야 만다. 즉 들뢰즈 스스로가 자신의 내재성의 왕국의 ‘바깥’에 추방된 타자를 설정한다는 결론인데 그것은 어떤 ‘바깥’이나 ‘거리’도 인정하지 않는 들뢰즈의 내재적(intrinsic) 철학과 모순되는 것이다. 그런 타자들은 들뢰즈 철학에서 공공연히 기각되었던 형식들, 체계들, 수목형 모델, 정주민적인 모든 것, 국가장치, 관료사회, 아버지의 법, 주체, 자의식 등 모든 절단적 형식으로 표현되곤 했던 것들이다.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은밀한 이분법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공공연한 사실이다. 기관 없는 신체 대 유기체, 전쟁기계 대 국가, 유목민 대 정주민, 몰적인 것 대 분자적인 것, 정신분열 대 편집증, 리좀적 모델과 수목형 모델 등등... 이러한 위계화된 이분법들, 적대적 이분법은 결국 일자의 절대적 내재성에 다시금 바깥을 도입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들뢰즈의 철학에 “‘차이’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낯선 ‘타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곤란한 상황을 막기 위해 들뢰즈의 이분법적 대립항 중 나머지 하나를 다른 하나만큼이나 동등하고 비중 있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그 두 항들(형식과 생성)이 맺는 관계를 외재적으로가 아닌 내재적인 관계로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내재성에 대한 빼어난 옹호자로서의 들뢰즈의 원래 모습에 훼손을 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간단히 말해서, ‘생성은 좋고 형식은 나쁘다’라는 동물농장식 구호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게다가 나중에 가서 다루겠지만, 그러한 동물농장식 태도는 실제 들뢰즈가 일컬은 분열증적 태도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 잭슨 폴록의 그림은 오늘날 들뢰즈의 분열증적 욕망 철학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분명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끈다.

이런 당위성은 실제로 우리 일상 경험에 비추어 볼 때도 타당한 것이다. 눈먼 들뢰지언들이 그 스스로 어떠한 매개도 거치지 않은 채 욕망을 위한 욕망에 사로잡힌 정신분열증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할지라도 그 스스로는 결코 주체의 심급, 가족의 심급, 오이디푸스의 심급, 계급의 심급, 국가의 심급, 자본의 심급을 현실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채 관념상의 탈주자, 분열증자로만 남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태도로는 상위의 전제적인 (생산하는 욕망에 대립되는)권력이 ‘실제로actual’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과정들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과정들을 단순히 무시하는 것이 위대한 긍정이자 자유로운 탈주라는 관념은 무언가 이상하다. 형식화-체계화라는 전제적 권력이 ‘실제로’ 매끄러운 표면을 경계 짓고 절단하고, ‘잠재적인virtual’ 욕망의 흐름을 착취하는 것이라면, 그 전제적 권력의 기원에 대한 ‘실제적’ 해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생성하는 와중에 있다는 명제를 실제적으로 해명할 필요성만큼이나 앞서 말한 전제적 권력장치의 실제성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그것이(형식) 우리가 그토록 반대할만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옹호하는 것(생성)들보다 실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속류 들뢰지언들은 들뢰즈 철학의 이런 저런 화려한 수사에 빠진 채 대개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과 반대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성찰하지 않는다. 그러한 그들은 대개 아Q와 같이 정신적으로 승리한다. 혹은 무의미한 탈주선을 그린다.

이런 상황에서 들뢰즈 철학에서 파면된 것으로 일컬어졌던 형식을 키워드로 다시 들뢰즈를 사유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형식을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생성의 와중에 사유하는 것이 상기한 (우리가 결코 건너뛸 수 없는, 건너뛰어서도 안되는) 전제적 권력에 대한 실제적 해명을 가능케 할 것이다 : 다시 말해 우리가 결코 권력의 심급들을 뛰어 넘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곤란함의 근원이 바로 우리가 옹호했던 자유로운 욕망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거꾸로 그런 권력에 대한 진정한 실천적 대응책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미레유 뷔댕의 책은 그런 가치 있는 일에 논의를 집중시킨다. 그러나 그 논의의 의의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이 책 역시 모종의 함정에 빠질 듯 말 듯 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타고 있음을 지적해야만 한다. 그러함으로써 우리는 역설적으로 ‘형식’의 중요성을 다시금 새삼스레 절감할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소 성급한 결론을 들어보자.

적은 바로 개념, 주체, 의미형성 혹은 유기체의 모습으로 있는 형식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이런 전제적인 분류에서 자유롭게 될 것인가? 초월론적 구도에서는 우리가 보았던 대로 “상위의 경험론” 곧 전개체적인(전형식적인) 강도적 특이성들의 세계와 그들의 자유로운 배치를 믿으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사하라: 들뢰즈의 미학] 55p

부연설명을 하자면, 여기서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경험적 초월론의 준말이다. 경험적 초월론이란, 기존의 초월론이라는 개념을 전용한 들뢰즈 특유의 용어로서, 개체를 넘어서는, 고정된 형식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유동적 흐름과 강도적 특이성들의, 가로지르는, 분배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실천적 견지에서 강도적 특이성(=singularity : 어떤 비교대상도, 척도도 전제하지 않는 단독적 단자. 그것은 양자역학의 원리처럼 존재론의 기본을 구성하는 입자인 동시에 측정/비교 불가능한 파동이기도 하다.)들의 자유로운 “배치”를 믿으라는 가르침은 어느 순간부터, 곧 이미 적으로 돌려야 했던 형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유연하게 긍정하라는 요구처럼 들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고한 형식을 다시금 자유로운 배치로서 사유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목소리를 말라르메의 목소리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그는 존재론을 일련의 접기와 펼침의 과정으로 빼어나게 사유한 철학자로서 들뢰즈의 사유의 벗에 추가된 이력이 있는 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천이나 종이에 잡힌 주름은 전개체/전형식적-존재론적 지평과 그 위에 형성된 주름 잡힌 형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직관적이고도 뛰어난 인식을 전달해 준다. 그 관계는 우리가 예견한 바와 같이 ‘내재적’이다. 말하자면 주름이란 표면의 외부자가 아니라 표면의 내재적 함입일 뿐이다. 주름 내부는 곧 절대적인 외부와 아무런 존재론적 차이도 없다. 통찰의 영역을 사막표면에 형성된 주름들로 확장해 보자. 우리는 곧장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사막을, 우글거리는 모래 알갱이들의 강도 높은 운동을, 그 표면에 새겨진 주름 없이 도대체 어떻게 사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결코 형식을 그런 모래알갱이들의 자유로운 배치로 바꿔 부름에 주저함이 있을 수 없다.


▲ 사막을, 우글거리는 모래 알갱이들의 강도 높은 운동을, 그 표면에 새겨진 주름 없이 도대체 어떻게 사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우리는 (알랭 바디우의 독해에 힘입어) 사하라에 이르러 사막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고독한 플라톤주의자로서의 들뢰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우선 (1) 다수적 환영, 형식, 주름들을 관조함을 통해 어떠한 개념적 매개 없이 내재적 지평을 그 자체로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2) 다수의 환영적 형식들을 오로지 일자를 통해서만 사유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것들은 이미 환영을 통해 일자를 직관하는 플라톤의 테제에 병합되어 있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완전히 들뢰주의자가 아니었던 들뢰즈는 이미 플라톤주의자였다는 바디우적 공식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미묘한 지점을 탐사해야만 들뢰즈의 플라톤적 이면뿐만 아니라 플라톤주의 자체의 이면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것이다. 말하자면 오로지 형식들만이, 환영들만이, 개별적 존재자들만이 “실제적”이고 우리가 “실제적”으로 고려할 바라는 사실이 그러하다. 뒤집어 말하자면, 일자는, 무차별적이고 아무런 외부를 모르는 생성의 내재적 판은... 오로지 형식만을, 환영들만을, 개별적 존재자들만을 알고 그 외에는 그에게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때 일자가 다수의 환영적 형식에 관계할  때의 시간적 양상에 대해 논하지 않으면 결국 전제적 체계, 통일성, 수목적 위계질서를 부활시킬 함정으로 빠질 수 있다(우리는 형식을 옹호하면서 여전히 이에 대해 반대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스피노자를 경유할 필요성을 느낀다. 앞서 플라톤을 거치며 재차 강조했듯이, 환영은 환영이라는 점에서 본성상 실제적actual이다. 우리에게 오로지 주어진 것은 다수의 실제적인 환영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들뢰즈가 그 자신의 생성의 철학을 사유하기 위해 언제나 이런 저런 형식들, 회화-형식, 음악-형식 영화-형식, 푸코-형식, 스피노자-형식, 베르그송-형식들로부터 출발하는 모습과 일맥상통 한다. 그런 다수의 실제적인 환영들은 결코 그것들을 전체화하거나 위계화하는 통일성과는 다른 무언가와 관계한다. 그 무언가가 바로 잠재적인 일자이며 마치 스피노자의 신이 각각의 속성에 대해 맺는 관계처럼 그러한 일자는 다수의 환영들에 대해 중립적이고 무관심한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고 다수의 환영들이 ‘동시에’ 그리고 ‘공평하게’ 일자와 관계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클리드적-뉴튼적 시공간관을 버려야만 한다. 오히려 다수와 관계하는 일자의 중립성은 각각의 다수들 간의 시간적/공간적 불균형함과 비대칭성을 끌어들인다. 일자는 여럿에 동시에 공평하게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번의 경우 속에서만 고유한 방식으로 간섭하는 것이다. 그것은 척도가 결여된a-measure 일자가 운동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일자는 오로지 무척도한a-measure 각각의 경우들 속에서만 사유될 뿐이지 결코 각각의 경우들이 전체로서 고양되거나 지양된 인식으로 도달하지 않는다. 야훼가 바로 그러한 무척도한 존재이기에 바로 그러한 본성상 그는 불타는 떨기나무로, 벽에 글을 새기는 거대한 손으로 표현되지만 각각의 표현된 신의 속성들은 결코 일정한 척도로 비교될 수도 측정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각각의 경우들, 환영들을 통해 일자를 사유하는 것이란 ‘오직 이 한 번의 행위에’ 모든 것을 걸며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랑 하등 다를 바 없다. 마치 다니엘과 요셉과 엘리야가 주사위를 던지는 심정으로 이적과 꿈과 같은 각종 환영들로 표현된 신의 본성과 의지를 직관했던 것처럼.



우리는 형식과 생성의 구도로 논의를 진행할 때 각각의 형식들마다, 접히는 주름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직 하나의 잠재적 생성의 순수흐름을 ‘재빨리’ 직관하는 들뢰즈의 철학적 플라톤주의의 새로운 판본을 얻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어찌 형식 없이 생성을 이야기하는 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생성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생성은 맹목적이다. 실로, 우리는 플라톤과 더불어 들뢰즈를 바라볼 때 비로소 들뢰즈의 철학의 내재적 평면을 어떤 간극과 거리도 두지 않은 채 직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진정한 분열증적인 태도에 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는 형식에 대해 옹호하면서도 여전히 수목적 위계화에 전제적 권력장치에 홈 패인 공간에 반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나쁜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나쁜 형식이기 때문이다. 나쁜 형식은 생성에서 절연된, 우리가 그토록 반복해가며 강조했던 생성과의 내재적 관계에서 일탈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런 나쁜 형식, 탈선한 형식을 내재적 형식만큼이나 ‘실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들뢰즈의 철학에 외부를 도입하게 되고야말 것이다. (전 존재를 망라하는 일자에 비해) 환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형식이 ‘실제적actual’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생성하는 일자적 지평과 내적 관계를 맺는 한에서이다. 말하자면, 영원불변히 고정된 형식은 단순히 형식에 대한 오지각 내지는 잔상에 불과하다. 생성하는 와중의 명멸하는 형식들을, 사하라의 모래 표면에 그때 그때마다 이미 다른 사구와 주름과 연결접속하고 분산되어 옮아가 버린 사구 언덕들을 고정된 것으로 착각하는 잔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플라톤이 격하했던, 진정으로 경박한 시뮬라크르, 환영 중의 환영, 완전히 기만적인 가상인 것이다. 환상 그 자체는, 형식이나 개체 표면에 잡힌 우연한 주름들은, 생성 와중에 있는 우연성으로 긍정될 때 ‘실제적actual’인 것이고 심지어 우리가 출발해야 할 유일한 지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생성과 절연시켜 볼 때 그것은 가장 최악의 거짓이자 기만인 것이다.
 
다시 분열증에 대한 해명으로 돌아가자면, 분열증이란 바로 위와 같은 형식에 대한 정치적 태도 표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분열증자는 오로지 “이미” 그어진 선, 형식, 내부/외부에서 출발하되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인 것이다. 진정한 분열증자는 결코 속류 들뢰지언들처럼 “유목민적인 생성/정주민적 형식”이라는 이분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은 정주민 그 자체가 아니라 정주민이 항상 정주민이라는 식의 착각인 것이다. 국가든 계급이든 사회든 유기체이든 주체이든 어떤 형식이든, 모든 잠재적 초월성은 바로 그러한 형식의 끄트머리 내지는 표면에 존속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내적인 분열에 이를 수 없다. 내적 분열이란 이분법과 외재성을 도입하고야 마는 외적 분열과 달리, 다수적 개체-형식 자체가 항상 이미 그 자신의 표상대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항상 생성적 탈주선의 도상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이자 긍정이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을 말할 때 우리는 여전히 (예를 들자면) 국가에서, 계급에서, 자본주의적 등가교환 체제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생성에 완고하게 고정된 형식이라고 들뢰지언들마저 착각했던 그러한 형식은 결코 성공적으로 그 자신의 완고성을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는(국가는 부르주아 시민사회는 자본주의는) 이미 그 자신이 되는 데 실패한다.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그 자신의 공리를 배반한 채 착취의 구조로 화하고, 국가는 어느새 사적 편견의 이익집단이 되며, 공평무사한 시민사회는 바로 파시즘적 떼거리로 돌변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투쟁과 내적 분열의 비밀이다. 들뢰지언이 바로 정확히 정치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실-형식은 결코 그 자신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을 직시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종류의 형식화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형식화의 완고하고 교만한, ‘자기 재생산 시도’ 실패의 산물로서 등장한 프롤레타리아성, 좌파성을 긍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계급투쟁을 외면하고서 진정한 정치성을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형식의 미학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의외의 들뢰지언 자신들이 생각했던 바(=계급적 투쟁을 모른 척 한 채 개인적 욕망의 해방과 탈주를 추구하는,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집합적임을 강변하는 바)와 정 반대의 정치성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가져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성급히 들뢰즈적 정치의 전망을 성급히 승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혹시 들뢰즈에 대한 오해가 바로 들뢰즈 자신이 그 자신의 형식을 재현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구조적 실패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매우 조심스럽게 들뢰즈적 지층을, 주름을, 선분을 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탐사가 자칫해서 정치적 기획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현상을 미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은가에 대한 불안은 단순한 기우인가. 실제로 예술, 사회, 과학, 정치를 넘나드는 들뢰즈 저술의 과도한 현람함과 우아함, 현상 이면을 가로지르는 우글거리는 특이성에 대한, 눈멀 정도로 섬세한 저술들(주름 등...) 그리고 그 속에서 반복되는 일자를 직관하는 아름다운 문체(차이와 반복 등...)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들뢰즈 철학을 하나의 미학적 시도로 평가하게끔 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 신학적 시도로 귀결 짓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거리감을 자아내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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