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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wonikcraft2@hanmail.net)



1. 서론

르네상스 이래로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으로 우울증은 사색의 병, 혹은 천재의 낭만적인 징후로 지각되어 왔다. 일종의 질환이 사회적인 기호로 받아들여진 것은 오직 우울증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는 결핵과 매독 역시도 소외와 부조리에 대한 치열한 항거의 부산물로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이러하듯 우울증을 비롯한 어떤 질병들은 류머티즘이나 골다공증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부여받곤 했다. 우울증과 관련한 천재들로 흔히 일컬어지는 인물들로는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반 고흐, 피카소, 디네센 등등이 있다. 흔히 이들의 삶과 우울증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우울증이 마치 그들 인격에 있어 하나의 속성이라도 된다는 양의 통념이 굳혀져 있다. 실제로 그들의 삶에서의 창작물들, 고뇌와 우울증이 추동한 듯해 보이는 삶에 대한 전반적 성찰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혹은 우울증을 감상에 젖는 유약하고 미숙한 과정으로 여겨 이를 반대하는 시각도 있었다. 흔히 “청승 떤다”라는 관용적 표현에도 이러한 시각이 녹아 있다 할 수 있겠다. 이런 시각은 앞서 소개한 우울증의 낭만화 시도와의 완전한 대립물이라고만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우울증에 걸맞는 인격, 지위, 창조성, 멜랑콜리한 외모, 데카당스한 유미주의적 아우라와 같은 사회적 지표들을 결한 단순한 생리적 증상으로서만 발현되는 우울증에 한해서 천박하고 궁상맞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에’ 평가절하 됐던 생리통과 다를 바 없는 위상을 차지했다. 사회적 의미가 결여된 질병은 단순히 기피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경멸되기까지 한다. 정신위생학적 관점에서 어떤 창조적인 매혹을 던져주지 못하는 우울증이라는 질병은 훈육(Discipline)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우울증을 창조성과 소외에 대한 저항의 증거로 보기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가령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인물은 우울증에 대한 통념의 양 극단을 동시에 드라마틱하게 체현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금각사와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그의, 상실된 모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곱씹음으로 점철된, 탐미주의적 정서는 우울증의 낭만적인 창조성의 사례를 극명하게 제공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에 반해서 그가 극우화와 마쵸화의 극단을 달릴 시기에 다자이 오사무를 향해 내뱉은 그의 유명한 발언은 정 반대의 시각을 웅변한다. ‘그 정도의 우울증은 하루에 15분씩 라디오 체조만 해도 극복이 가능하다!’

우울증에 대한 우리들의 일상적인 이해도 이에 대해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울증을 낭만화하든지 훈육의 대상으로 보든지 간에 그것은 기호로서만 다루어질 뿐 그 자체로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울증을 그 자체의 병리적인 구조로 고찰해 볼 때 그것의 심각성과 파괴성은 간과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우울증을 단순한 실존의 지표 내지는 기호 혹은 증거라는 위상에서 떼어낼 때어 탐구할 대, 그것은 생리적 원인에서 유발된 질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증적인 탐구를 전개할 때, 우울증은 결코 주위 환경에 대한 주체의 제스처의 ‘결과’가 아니라 유전적 기질과 신경전달물질 분비교란과 뉴런세포의 복구 메커니즘 파괴와 같은 물체적-실정적 ‘원인’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듯 해 보인다. 우울한 상태에서 주체의 마음상태의-중요해 보이는-내용이야말로 한갓 이러한 병리적 상태의 사후 효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울증을 앞서 고찰한 방식과 유사하게, 병리적인 것으로 주목하는 순간에도, 쥬류매체의 시각에서는, 단순한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실제 임상 실험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울증이라는 것은 경증이든 중증이든 간에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뉴런 세포의 회복 메커니즘에 심각한 손상을 안겨주어 기억력과 언어능력과 전반적 판단력의 감퇴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점과 더불어, 우울증이 진행성인 동시에 반복적적으로 발병한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우울증이란 단순히 연례적으로 앓는 단순한 감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감기에 걸리면 내성이라도 생긴다. 하지만 우울증의 경우 그것은 "진행성" 질병이라 횟수를 더할수록 심각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여타 질환과 견주어 볼 때 우울증은 진행성 동맥경화라든지 치매라든지 하는 것과 유사한 심각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그것의 병리적 심각성은 평가절하 되고 있다.

이러한 대중과 주류매체를 상대로 우울증에 대한 계몽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프로작에게 듣는다”에서부터, “언제 떠날 것인가”를 거쳐서, “우울증에 반대한다”까지, 우울증의 과학적 원인과 심각성 그리고 처방에 대한 교육을 행하고 있는 피터 크레이머 박사와 같은 정신의학자 계열이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르러서 우울증에 대한 탈주술화, 탈마법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이는 실제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우울증을 마음의 상태 및 내적 정서들의 투쟁으로 규정한 전통적 정신분석학적 정신의학에 반대하는 동시에 우울증의 낭만화 경향에도 반대하여 그것이 두뇌조직 자체의 불가역적인 파괴와 관련된, ‘장난이 아닌 질환’을 보여주며 그 심각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물론 그러한 입장들은 치료의 관점에서 유효하다. 그것은 우울증에 어떤 창조적 섬광과도 같은 요소가 있다는 통념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 우울증에 있어서 기발한 "내용" 따위는 없다. 거기에는 단지 유전적-신경생리적인 장애만이 있을 뿐이다. 우울증은 거기에서 파생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인과관계적 설명만으로 우울증의 전모를 다루었다고 단언하는 데에는 망설여진다. 물론 여기서 본 논의가 견지하고픈 입장은 과거로의 퇴행은 아니다. 우울증이란 피상적인 현대사회와 그것에 저항하는 어떤 깊이를 구현한다는 낭만적 시각은 우리가 더 이상 따를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울증을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하는 새로운 신경생리학적 관점에 대해서 우울증의 초월적인 성격과 실존적 조건성을 내세울 것이다. 물론 우울증은 방치해서는 안 되는 병이지만 그런 것을 자각한 이후에도 소외된 환경에서-넓은 의미에서 불운한 유전적 배경을 타고난 경우를 포함한- 우울증으로 고통 받아야만 하는 경우는 잔존할 것이다. 과학적 분석틀만으로는 우울증에 대한 완결된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우울증의 잔여물적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과학으로 해명되기 힘든 우울증의 측면은 ‘의식’과 관계한다. 두뇌 조직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병리적인 측면이 의식이라는 스크린에 투사된다. 스트레스가 우울증을 일으킨다면, 왜 하필 스트레스가 문제인가.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이 문제가 된다면 도대체 왜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두뇌는 쉽게 스트레스 앞에 파괴되는가. 신경조직의 아교세포가 말썽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어째서 때로는 무기력함을 때로는 과도한 예민한 흥분을 동반하는가. 그러한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 우울증의 신경 생리적 "인과관계 자체"를 떠받치는 준-원인(Quasi-cause) 혹은 초월적 틀을 상정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주체의 초월적 의식 혹은 자기반성의 구조와 연계시켜 고찰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고찰할 거리는 결코 과거 시인들이 다루었듯이 멜랑콜리아의 경험적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우울증의 내용을 결한 순수형식이다. (1)우울증이 발현하기 위한 조건들과 그것의 (2)발현 자체가 연관을 맺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도입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것을 언제나 의식과 관련시킬 것이다. 아무리 정신병을 환원적으로 접근하더라도 실제로 ‘의식’ 없이는 어떤 증상도 없다. 이는 정신분열증이든 신경증이든 다중인격장애든 양극성정서장애든 마찬가지이다. 물론 의식 속에 어떤 유의미한 내용이 있고 정신의학의 임무란 그것을 분석하는 것이란 가정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오히려 의식의 초월적 구조가 우울증적 반성의-내용이 아닌-형식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을 우리는 목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우울증과, 그것의 상관항으로서 의식이 지니는 형식상의 초월성 간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는 다분히 사변적인 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변성이란 칸트가 정의한 바, 결코 탁상공론이 아닌 고도의 반성능력을 함의한다고 하겠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단순한 치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우울증이라는 증상과 연관되는 것이 단순한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불행으로-우연성에 대한 칸트의 견해를 빌리자면 설사 유전적인 원인에 의해 우울증이 발현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유전자를 분배받는 바로 그 사건의 차원에서 그것은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우연적이다-보는 시각과 잇닿아 있다. 물론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우연하기에 본질상 불행과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고통과 불행을 지각하고 마주치는 방식에는 어떤 인간다운 패턴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막연하게 실존적 조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한 조건의 중심에는 바로 ‘무엇에 대한 의식’으로 정의되는 의식이 있다. 신경생리학이 정당하게 밝히는 바, 우울증은 오로지 경험적 인과계열의 사슬로 환원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적 계열에 맞딱뜨리기 위한 것처럼, 너무나 철저하게 준비된 것 같은 인간의 모습을 멜랑콜리의 역사가 섬뜩하리만치 웅변하지 않는가. 우울증이, 근본적으로 우연한 사건의 계열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가장 극적인 방식이라고 한다면, 본 논의는 도대체 그 소외의 형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울증이라는 임상 사례는 주변세계의 부조리와 무의미 공허함에 대한 초월적 성찰로까지 나아갔다. 마치 보르헤스, 카프카, 윌리엄 스타이런, 랭보, 카뮈가 그러했듯이.



2. 우울증에 대한 관점의 역사적 변화와 오늘날의 우울증에 대한 유력한 시각

1) 우울증에 대한 시대별 관점

본래 우울증은 지극히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저서에 따르면, 우울증 및 제반 증상은 멜랑콜리 즉 담즙의 과다 분비인 것이다. 이 담즙이라는 옛 그리스어가 훗날 우울증의 어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물론 우울증은 여타 정신병적 증상과 구별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우울증은 정신분열증, 조증, 심지어는 치질과 피부발진과도 연계된 채로 이해되었다. 사실 우울증의 어원인 멜랑콜리아는 감정을 일으키는 물질인 담즙의 과다로 인한, 과도한 정서로 이해되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지나친 슬픔과 한편으로는 지나친 기쁨 내지는 광기와 연관되었다. 그랬던 것이, 조증과 정신분열증과 같은 광기들로 파생되어 나갔고 멜랑콜리아는 점차 오늘날의 우울증과 가까운 개념으로 변모되어 갔다. 실제로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우울증-멜랑콜리아-은 양가감정, 우유부단함, 회의주의, 사물에 대한 거리감 정도의 외연으로 확정되었다. 이러한 증상은 특히 이성의 사용과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가령 우울증 특유의 소외감이나 자기감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증상은 바로 냉철한 이성의 사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멜랑콜리아에 대한 의미부여가 심화됨에 따라, 우울증은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으로 이해되어갔다. 이러한 반항적인 우울증의 형상은 특히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우울한 반항아는 지나칠 정도로 총명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작품에서도 멜랑콜리한 정서는 고결한 지성의 소유와 잇닿아 있다는 듯이 묘사된다. 작품에 있어서 우울함은 예리한 지성의 힘에 추동된 부조리에 대한 항거이자, 반항인 것이다.

문학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우울증은 나름의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가령 아직 우울증이 과도한 담즙 분비로 이해되었던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과도함이 천재성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믿어졌다. 근대 시기에 이르러,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히포크라테스 이래로 2000년간 축적된 우울증의 낭만적, 반항적, 천재적 아우라의 구현에 있어서 첨단을 달렸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역시 극도로 우울한 상태의 저작들을 많이 남겼으며 그것이 주는 고립감 속에서 음울한 자아 성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2) 우울증에 대한 현대의 유력한 시각 소개

이러한 우울증에 대한 이해는 현대에 들어와서 점차 탈신비화 되었다. 우울증이란 신경생리학적 과정의 교란에 지나지 않는 세포 병리적 현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최근의 유력한 이론으로는 모노아민 이론과 허용 이론이다. 모노아민 이론이란 우울증이 세포 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 같은 특정 화학 물질의 결손에서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세로토닌은 두뇌 세포의 보호역할을 하는데, 두뇌의 세로토닌 경로가 건강하면, 다른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해도 기분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세로토닌이 결핍되면 우울증이 드러난다. 이런 가설을 허용이론이라고 부른다. 세로토닌 결핍이 기분 장애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손상은 허용한다는 것이다.

3) 우울증에 대한 신경생리학적 설명

이런 손상은 특히 격렬한 감정 기억을 동반하는 두뇌의 해마부위와 관련할 때 심각해진다. 해마는 스트레스 호르몬의 조절 신호를 보내는 조직인데, 세로토닌 같은 보호 물질이 결핍될 시 그것이 스트레스 호르몬에 노출된 채 파괴되어 더욱 심각한 호르몬 과다 분비를 초래한다. 이러한 해마의 파괴는 결국 두뇌의 복구 메커니즘 자체를 붕괴시켜서 두뇌를 스트레스에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이러한 점이 우울증이 진행성이라는 점을 설명해 준다. 스트레스에 빠질 때마다 더 많은 두뇌의 세포는 고립되어 파괴된다. 이에 따라 감정정보 전달은 더욱 어려워져 환자로 하여금 주변에 대한 더욱 심한 거리감-무감동, 소외감, 무력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더불어 언어능력과 ‘과거 자신의 감정을 떠올리는 기억력’이 감퇴되어 사회성에 손상을 가할 뿐만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과거의 그 자신마저 비본래적인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전에 느꼈던 희로애락의 감정이 다음 날 아침에 무척 낯설고 기이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환자는 철저한 자기소외를 겪으며 스스로의 감정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게 된다. 이러한 관점을 따를 때 무척이나 내밀하고 실존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소외감은 철저히 물질적인 원인에 유래하는 듯하다.

과거의 자신을 반성의 형식 속에서 드러나게끔 하는 주체의 초월적 이성에서 유래하는 듯 했던 소외감이란 단순히 신경 간 정보전달물질의 결핍에서 연원할 뿐이라는 주장은 이를 회복시켜주는 항우울제인 프로작과 심리치료를 유력한 대안으로 돋보이게 만든다.



3. 신경생리학적 관점의 한계와 우울증의 잔여물적 성격

1) 신경생리학적 관점의 한계

사실 이러한 설명은 단순한 기술상의 설득력과 우울증에 대한 의미부여 차원을 넘어서서 치료의 관점에서 많은 의의가 있다. 그것은 실제로 우울증의 폐해를 경감한다. 가령 프로작을 처방함으로써 세로토닌 및 노르에피네프린의 분비를 회복시켜서 뇌 세포의 자가 복구메커니즘을 정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립된 신경세포의 돌기가 재형성됨에 따라 감정조절이 원활해지고 감정과 관련된 기억이 되살아나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가 온전히 통합될 것이다. 자존감이 되살아나며 사회성이 복구되어 다시금 원활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생산성도 회복될 것이다.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커다란 이득이 될 것이다. 그러나 피터 크레이머와 같은 정신의학자들의 견해는 지나치게 멀리 나간 감이 있다.(어떻게 멀리 나갔느냐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궁금하다면 우울증에 반대한다 3부를 읽어보도록. 본 논의는 거의 이 3부에 대한 반론이라 볼 수 있다.) 앞으로 우울증의 패턴을 더욱 정교화하게 통계처리하고 그에 따라 우울증 처방 방식을 정교화 함에 따라 우울증을 완전히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특이성, 다시 말해서, 우울증의 숭고한 성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자신만만한 관점은 어떻게 보면 우울증의 치료 가능성과 별개의 차원을 건드리는 듯하다. 우울증이 치료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정말로 우울증의 독특한 부분 혹은 의미마저도 제거할 수 있을까. 임상적인 관점에서도 우울증의 의미마저 거세하고자 시도하는 현대 의학적 관점에 반대할 수 있다. 실제로 우울증을 완전히 쫓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우울증도 지속될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프로작을 끊으면 우울증은 언제 회복됐냐는 듯이 재발한다. 유전적 원인을 제한다면, 단순히 세로토닌 결핍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게다가 실제로-스트레스가 원인인-스트레스성 우울증은 비공유 경험에 의해 촉발된다고 한다. 비공유 경험이란 말 그대로 공유되지 않는 경험으로서 타인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중립적 성격의 경험이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의미심장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측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환경에서든-어떤 이에게는 완벽하고 행복한 환경이-누군가에게는 결국 우울증을 일어나게 하고야 만다. 물론 거기에 재빨리 치료행위가 투입해야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제반 과정은 마치 두더쥐 잡기 게임과 같다.

2) 우울증의 형식적-잔여물적 성격

이것을 편의상 우울증의 해명되기 힘든 잔여물적 성격이라고 명명해 보자. 물론 이것은 다분히 은유적인 개념이다. 모든 텍스트에는 해석에 저항하는 잔여물이 있듯이 우울증에도 마치 우울증의 외연이 개별 환자를 넘어선다는 듯이 치료에 저항하는 무작위적 경향이 있다. 우울증이 시대적인 징후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로 퇴행하는 유치한 느낌이 있지만 그러한 표현에는 일말의 진실이 존재한다. 물론 이런 식의 비유는 감기나 성병 내지는 치매마저도 시대적 징후라고 단언하는 비약으로 이행할 수 있겠지만 우울증의 경우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잇닿아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개별 주체를 넘어선 징후라고 불릴만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과거의 개념으로 되돌아간 듯하지만 그것은 우울증에 대한 낭만적 단언이라기보다는 우울증에 대한 현대 의학적 해명을 경유한 것이다. 두뇌세포의 회복 메커니즘의 파괴라는 우울증에 대한 과학적 정식화에 대한 저항 지점 내지는 과학적 서사를 비껴가는 우울증의 ‘잉여-과잉’ 성격은 바로 그 과학적 정식대로 돌발하는 우울증의 ‘출현 그 자체’다.

다시 말하자면 가령 스트레스성으로 촉발된 것으로 규명된 우울증의 경우, 무엇이 그 스트레스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설명 틀을 요구한다. 그러한 설명 틀을 도입할 때 우리는 다시 의식이라는 미묘한 주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가지 물적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의식의 내용-상호 모순되는 정서 간의 충돌, 엄격한 양심에 의한 자기규제, 외부 세계에 대한 적대감-으로 우울증을 설명했던 과거의 관습과 달리 우리는 의식의 형식적 구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구조 자체가 혹 우울증의 인과계열의 연쇄 자체를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울증의 선험적 조건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4. 의식의 현상학적 구조와 우울증의 초월성

1) 의식의 현상학적 구조

의식의 현상학적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고전적인 공식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그것이 바로 의식의 지향성이다. 의식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하는 한에서 정당한 의미에서 의식적인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그 정의상 그 자신에게도 향할 수 있다. 이때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 된다. 이러한 의식을 흔히 초월적인 의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외부의 대상을 다루듯이 한 차원 높은 곳에서 그 스스로를 반성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닌 듯이 행동한다는 점에서 그 자기반성적 의식은 초월적이다. 여기에서 일관된 것 같아 보였던 의식은 어느새 의식당하는 의식과 의식행위의 주체로서의 의식으로 ‘분열된다.’ 환언하자면 경험적 의식과 초월적 의식의 틈새가 생겨난다. 이러한 틈새가 바로 의식 자체의 내속적 본성-지향성-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의식은 내부로부터 분열되어 있다. 이것이 의식의 초월적 구조이다.

이것이 문제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분열 내지는 자기 소외라는 바로 그 형식으로 우울증이 주체에 현상하기 때문이다. 이미 다루었듯이 우울증은 근본적으로-임상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자기 소외의 성격을 띤다. 우울증자는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진실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혹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다음 날만 되면 그것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자기 자신이 자기가 아닌 것 같은 낯선 분열과 틈새는 우울증과 함께 지속된다. 물론 이것은 과학적으로 감정 기억을 다루는 전전두엽 뇌세포의 고립 내지는 파괴로 설명될 수 있다. 문제는 만약 의식의 초월적 구조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선험적 원인이고 그러한 선험적 원인은, 칸트가 지적했듯이, 경험적 원인 내지는 시간적 선후관계를 가지는 인과계열과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들뢰즈는 물체적 인과계열과 독립된 제2차적 층위의 원인을 준-원인(Quasi-cause)이라고 부른다.

2) 우울증이 요청하는 바로서의 초월적 메타서사

그러한 준-원인은 바로 우울증에 대한 의학적 설명의 비완결성에 기생하는 하나의 초월적 가상이다. 그것의 출현과 더불어 우울증의 진행양상에 대한 서사는 존재하지만 그것의 메타서사는 현대 정신의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메타서사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의식의 초월적 구조이며, 그러한 구조는 우울증의 실제 임상양상과 병행하여 전개된다. 실제로 우울증자는 그의 증상 속에서 철저한 반성과 그에 따른 분열 및 내적 모순을 경험한다. 그는 반성의 형식 속에서 끊임없이 경험적 자아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그에 따라 무기력함과 왜소함을 느껴간다. 그러나 그가 그런 가학적 반성의 최고조에 이를 때 한편의 초월적 의식은 커다란 고양감을 느낀다. 이는 흔히 조증과 연관되어 있거나 혹은 자기반성을 수반하는 글쓰기와 같은 활동에 있어서 커다란 활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양가감정 또한 오래 전부터 우울증의 전형적 패턴으로 인지되어 왔다.

우울증이 요청하는 초월적 구조 혹은 메타서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의식의 현상학적 탐구까지 나아가게 됐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닌 특이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우울증이 특이하고 독특한 아우라를 지니게 된 것은 2000년간의 기나긴 역사적 오류가 아니라 바로 그 출현 자체의 비완결적 성격 때문이다. 감기가 초월적 구조 내지는 메타 서사를 요청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의 실정적 원인이 바이러스라는 대상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경험은 공유경험이라는 점에서 예컨대 스트레스성 우울증과 다르다. 물론 감기라는 경험과 ‘관련한’ 메타 서사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감기 자체의 외연을 넘어서는 환경을 상정해야 할 것이다.



5. 애도와 구별되는 바로서의 우울증과 주체화의 제스처

1) 애도와 우울

이러한 우울증의 초월적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과거 정신의학을 지배했던 고전적 정신분석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본래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애도와의 대립항으로서 파악했다. 우울증의 자질은 애도에 대한 변별자질이다. 다음의 설명을 인용하겠다.

애도와 우울증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우울증의 경우에 자기 존중감, 즉 자기애가 급격하게 추락한다는 것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ⅰ)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ⅱ)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ⅲ)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다시 말해서 우울함은 슬픔과 다르다. 그것은 연속체적인 정서를 이루기보다는 엄연한 단절을 이루고 있다. 앞서 피터 크레이머 류의 관점에 부합하는 현대 정신의학적 시각에서는 둘의 차이는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한 정서에 대한 기껏해야 표현상의 차이에 지나지 않거나 아니면 동일한 국면에 대한 현상적 기술(슬픔)이냐 아니면 구조적 기술(슬픔의 구조적 원인으로서 우울증)이냐의 차이를 말할 뿐이다. 그러나 우울함은 경험적 슬픔과 명백히 단절된 초월적 경험을 선사한다고 해야 한다.

2) 주체의 근본적 소외의 형식으로서의 우울증

슬픔의 경험은 현전한다. 이때 주체는 그가 상실한 대상이 무엇이 명확하고 그것의 상실을 온 몸으로 체험한다. 이와 관련한 애도의 제스처는 바로 그러한 상실의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메꾸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서 주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로 그러한 상실에서 회복된다. 그러나 우울은 현전하는 감정-경험이라기보다는 감정의 도래 자체의 끊임없는 지연의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서 우울증을 앓을 때는 기쁨도 미묘한 슬픔도 공허감에 밀려난다. 이를 다시 의식의 초월적 구조상에서 고찰하자면, 우울증자는 슬픔이나 기쁨이라는 경험적 차원에서의 정서와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적 차원을 슬픈 눈으로 응시-관조하는 자이다. 그의 정서는 정서에 대한 정서, 즉 메타정서라 굳이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며 관조적 정서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로 우울증자는 외관상으로 얼마든지 순간순간의 경험이나 정서에 충실할 수 있다. 오히려 우울증자는 그런 면에서 보통 사람보다 더욱 성실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우울증자는 타인에 비해 몇 배 더 매력적이기도 하다. 그가 우울증자로 실존할 때에는 스스로에 대해 언제나 일정한 시간적 공간적 간격을 두고서이다. 해체주의적 언사를 빌려서, 이에 대해 우울증자의 존재양상 자체가 차연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지나가 버리기 전의 순간순간에 더욱 성실한 애정을 가지는 것이며 실제 슬픔이나 기쁨과 거리를 둘 때 공허감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이 때로는 우울증자에게 신비한 매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가 반성의 형식 속에 존재할 때 그는 비로소 우울증자이다. 그의 뇌 속에서 아교세포가 경직되고 세로토닌 분비가 중단되는 임상적 과정이 진행 중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러한 증상에 내재하는 어떤 근본적인 부조리는 바로 그의 자기 자신과 환경을 반성하는 의식구조로 간략하게나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흔히 임상적으로 우울증의 부산물 혹은 원인으로 정의되는 ‘비공유적 스트레스’라고 말하는 것은 상기한 우울증의 초월적 구조에 기초한 행위-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정서에 대한 거리두기를 가능케 하는-에 대한 에둘러 표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 정신의학이 의식의 초월적 구조라든지 메타정서라는 표현을 단순한 은유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정작 그러한 정신의학 자체도 우울증의 발현양상 와중에 존재하는 근본원인을 ‘비공유 스트레스’라는 방식으로 에둘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비공유 스트레스란 바로 우울증이라는 일관된 과학적 서사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의미 없는 기표’이다. 그것은 우울증을 설명하기 보다는 우울증에 대한 설명 자체를 지탱한다.

다시금 피터 크레이머 박사의 글을 인용하도록 하자.

스타이런은 우울증은 “사고력을 갖춘 지성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불가사의하게 고통스러워서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썼다. 그리고 또 “내가 마음속에 느꼈던 그것은 실제적 고통과 가까웠지만, 또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물에 빠져드는 것 또는 목이 졸리는 것과 가장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들마저 핵심에 벗어나 있다.” 그리고 또 “우울증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 공포는 너무도 암담해서 형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스타이런은 적절한 단어를 선택한다. “축축한 암울함”, “혼탁한 산란, ”무질서한 결함“, ”유독하고 불명료한 물결“, ”극도의 불쾌감으로 인한 마비상태“, ”처절한 내향“, ”기이한 의식의 변화“등. 작가로서 그는 이 유서 깊은 투쟁에 개입한다. ”고대로부터 - 욥의 고통스런 한탄 속에서, 소포클레서와 아이스킬로서 작품의 코러스 속에서- 인간정신의 기록자들은 멜랑콜리아의 황폐함을 드러내 줄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어휘와 씨름을 해왔다.“ 우울증은 글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어는 무력하다.

우울증은 그 어떤 기술방식을 튕겨내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그동안 우리는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러한 우울증은 글의 한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한계가 스타이런의 시도처럼 그것을 말하려는 시도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우울증의 메타서사에 대한 요청이다. 우리는 그러한 서사를 의식의 초월적 구조와 반성 능력 그 자체에서 찾았다. 문제는 정작 이 글을 인용한 피터 크레이머와 같은 전문의들의 태도이다. 그의 합리적이고 정당하며 박애주의적인 동기-우울증의 고통으로부터 환자들을 구제하고자 하는-에도 불구하고 그의 우울증에 대한 기술방식이 부당한 이유는 바로 그의 현대 정신의학적 기술 자체도 바로 그 ‘무력한 언어’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설명 방식 자체도 메타서사를 요청하며 우울증에는 무언가 해소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요소가 있음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인정이 혹 우울증을 과도하게 낭만화하고 우월함의 표지로 오지각하는 것이면 모를까 그것들이 모두 부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것은 적절한 치료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완벽할 수 없으며 우울증의 가상적인 근본원인(=준-원인)마저 앗아갈 수 없다. 실제로 상당수의 관련 정신의학자들은 우울증이 없는 상태에서의 예술이라든지 미적 감각이라든지 철학적 반성을 꿈구곤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예술이라든지 철학이라든지 하는 인간의 고도의 반성능력을 요하는 활동들은 어쩔 수 없이 우울증의 근본 요소, 즉 경험적 정서에 대한 메타적 관조라는 형식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예술이라든지 하는 것들의 블루 톤의 이미지들이 마치 우울증을 정당화하고 미화한다는 비난을 받아온 것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과 우울증의 생산적 관계마저도 끊어버리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예술은 우울증의 지속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승화’의 과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자면 우울한 예술조차도 넓은 의미에서 바로 우울증의 치료 과정에 속하는 것이다. 우울증 자체를 붙잡고 겉멋에 사로잡히는 것이 예술을 비롯한 인간의 고도의 반성능력의 본질이라 볼 수 없다. 사실 우울증이라는 것의 대표적 문학적 형상으로 일컬어지는 돈키호테조차도 우울증 자체에 내재해 있는 우울함의 돌파구를 암시한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말했듯이, 모든 예술은 일종의 돈키호테주의이다. 상실의 대상을 상상의 영역에서나마 보상할 수 있는 것이다.

3) 주체화 제스처로서의 우울증

결국 예술이든 의학적 치료이든 우울증의 근본원인 자체는 건드리지 못하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자기정립적 제스처와도 연관되어 있다. 상실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주체에 있어서 구성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체가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영원한 경험적 상태 혹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대상 혹은 상태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이는 주체에게 상실로서 체험된다. 이에 따라서 주체는 다시금 스스로를 재단언하는 자기정립적 결단의 순간으로 떠밀리게 된다. 이것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의 창조적 정립이라는 생산적인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자기 소외의 과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결단의 순간에 주체의 자아는 결단의 초월적 측면과 상실된 경험적 측면으로 분열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분리된 틈새는 프로이트의 정식에 따르면 대상의 상실의 내면화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자기소외 내지는 분리는 과거 경험적 상실과 중첩된다. 상실에 적극적인 대응이 다시금 상실의 내면화로 이어지는 역설적 원환구조가 주체의 초월적-자기정립적 제스처에 수반된다.

그래서 흔히 멜랑콜리한 감정을 혼합감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즉자적 슬픔과 공모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자적으로 극복-대응하려는 제스처이다.

이런 자기 정립적 행위는 바로 상실의 흔적이 각인된 경험적 자아에 대한 반성-거리두기-이자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재 단언으로서의 창조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울증에 대한 과거의 낭만화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임상적인 우울증 자체는 회복 불가능한 악순환으로만 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별도로 우리가 순수우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울증의 메타지점에는 바로 병리적 구조와 동시에 자기 치유적 구조를 동시에 지닌 이중구조가 식별된다. 자기정립적 행위에서 유래하는 멜랑콜리한 정서는 고로 별도의 "정서"라기보다는 하나의 초월적 "과정"에 가까운 것이고 그런 과정은 창조적인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계기를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다.

가령 가라타니 고진이나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창작활동에 매진하여 우울증을 극복한 것도 우울증이 메타적인 지점에서는 단순히 유물론적으로 환원되어서만 설명될 수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자기극복의 도상에 놓여있는, 자기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주체의 실존적 여정에 가깝다. 그것은 언제나 나락으로 떨어질 함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의 상승이라는 이중적 계기를 동시에 내포한다. 어쩌면 이러한 우울증의 구조는 임상적 측면에서 우울증이 조울증과 쉽게 연계된다는 사실과 병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6. 결론

고로 우울증은 경험적 영역에서 별도의 임상적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있겠으나 그것은 메타적인 지점에서 여전히 인간의 실존적 표지가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고전적인 정신분석 틀은 우울증을 설명하기에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렸지만, 현대 라캉주의 정신분석의 개념틀을 빌리자면, 우리는 여전히 우울증을 메타 서사 상에서, 하나의 의미론적인 지표로서 다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언표 된 내용상의 측면과 언표가 출현하는 행위사건 자체를 구분하는 정신분석적 지혜를 따라서 우리는 우울증을 그것을 임상적인 내용과 출현사건 자체를 구분하는 안목을 습득해야 한다. 우울증에 대한 현대 의학의 과학적 서사가 비완결적인 이유는 그것이 전자에 국한된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의 출현 자체를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주체의 자기정립적 제스처라는 주체화 제스처 자체와 더불어 사유해야한다. 그러한 주체의 자의식적 초월적 제스처를 도입함으로써 우리는 우울증에 대한 메타적인 차원까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여전히 완결되지 않는다. 가령 라캉주의 정신분석이 언표행위상의 차원을 자각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언표 상에서 비의미로 지각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의 존재-언표행위상의 제스처-를 메타적으로 자각할 뿐, 그것을 설명할 어떤 지시수단도 획득할 수 없다.

결국 17세기의 작가 로버트 버턴이 말했듯이(우울증에 반대한다 인용), 멜랑콜리한 사람들은 천명 가운데 한 명도 똑같은 경우가 없다는 말은 진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임상적으로 우울증은 다형적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결국 이러한 다형성 내지는 특이성들은 주체정립적 행위 속에서 출현하는 우울증적 서사구조의 실존적 성격을 또 다시 웅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재미있게도, 이와 관련해 만성적 우울증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진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바로 그러한 실존적 성격에 대해 “보편적 단독자”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결국 보편적 단독성이라는 개념은 우울증의 실존적 성격뿐만 아니라 보편적 성격까지 적절히 체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 단독성이란 바로 단독자 그 자신이 외양하는 바가 이미 본질상의 적합한 체현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보편적 단독성은 바로 초월적 주체의 자기정립적 제스처에 대응한다. 그것은 어느 하나도 같지 않지만 바로 각자가 외양하는 바가 바로 이미 그 자신의 본질로서 정립된 것이다. 사르트르를 비틀어 말하자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기 보다는 실존은 이미 바로 그 본질이었다는 것이다! 실상 그러하다면 그러한 제스처가 외양하는 메타적 차원에서의 개별적 사건-과정의 보편성은 유적인 의미에서의(Generic) 순수우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우울증의 영역은 다름 아닌 순수우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고유한 주체’를 정립하는 주체화의 ‘유적 과정(Generic Process)’이라고 또 다시 이름 붙여본다면, 우울증의 실존적 성격은 더욱 극명히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정당하게 주체의 우울함을 또한 그것의 고유한 삶의 조건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유적 과정으로서의 순수 우울증이란 단순히 치유되어야할 병리일 뿐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병적 요소와 더불어 치유의 계기를 지닌 모순적 질병이자 주체 자신에게 떠맡겨진 실존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프로작을 먹든 책을 읽거나 쓰든 말이다! 물론 이런 주체화 내지는 주체정립이라는 유적 과정으로서의 ‘순수’우울은 임상적인 우울과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한다는 필요가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구분 및 두 개념 간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인 고찰은 앞으로 더욱 활발한 논의의 여지가 있다. 여하튼 간에 둘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울증 발현의 우연적 계기라든지 하는 우울증에 관한 현대 정신의학적 서사 자체의 내속적 비완결성에 기대어서 앞서 말한 순수우울의 메타서사가 출현한다고 하겠다. 이것은 칸트가 말한, 초월적 가상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자면 그러한 가상은 앞으로 우울증에 대한 어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완전한 해명이 나올 때 비로소 축출될 것이나 그러한 시기가 올 전망은 희박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정당하게 우울증을 하나의 실존적 과정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과제로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고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제에 대응하는 인간의 순수 우울증적 조건을 또한 보편적 단독성이라는 철학적 개념과 연관 지어 더욱 깊이 탐구할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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