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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캐비닛

2007.03.30 23:3203.30





blog.aladdin.co.kr/twinpixrevinchu@empal.com(……전략……)
나는 글쓰기에 있어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것은 작가란 존재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높은 곳에 있다고 믿는 선민의식의 슬픈 유물이다. 문학이 인간의 이해에 그 뜻을 담고 있다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사랑함에 있어서 재능이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겸손과 성실함이지 재능과 천재성이 아니다. 우리는 술자리에서나 호기롭게 힘을 발휘하는, 이 어줍잖은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로 자신의 게으름을 속이고, 방종과 타락에 면죄를 받았으며, 스스로를 재능 있다 믿는 일군의 무리 속에 들어앉아 킬킬대며 세상의 많은 정직함을 비웃고 상처 주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나는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오로지 체력뿐이다. 지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 겸손하게 사람에게로 다가가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래서 책상에 앉아 스탠드에 우두커니 불을 켜고 자신이 읽어낸 인간의 작은 부분에 대해 매일 밤마다 조금씩 조금씩 글을 쓰는 것이다.
 (……후략……)

―――2003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 당선작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의 수상소감 中


나는 공감한다. 글쓰기가 재능과 천재성이 아니라, 겸손과 성실함이며 믿는 것은 오로지 체력뿐이라는 말을 절실히 공감한다. 작품이 아닌, 수상소감만으로 팬이 된 느낌이었다. 이 수상소감을 읽고 나는 김언수라는 작가에 대해 기대를 가졌다.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란 믿음을 가졌다. 해마다 신춘문예 수상자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중에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작가만은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글을 쓰리라 생각했다.
이윽고 3년의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김언수 작가와 재회했다.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캐비닛].
그는 결국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3년간 공들인 작품을 선보였다. 나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마냥 기뻤다.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쉽게 글을 놓았을 리는 없으니까.
김언수가 읽어낸 인간의 작은 부분에 대해 매일 밤마다 조금씩 조금씩 쓴 글을 마침내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렸다. 게다가 책 소개글을 보면 현대 사회에 나타난 다양한 증상을 가진 인간들을 다루고 있다지 않은가! 마치 수상 소감을 염두에 두고 쓴 글 같아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긴장시킨 점은 환상성이다. 요즘 국내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보이는 환상성은 이제 더는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언수의 첫 장편이 환상성이 풍부한 글이라는 점에서 나에게 딱 맞춰진 맞춤 선물이란 느낌을 받았다. 이건 꼭 사야 해. 반드시 읽을 수밖에 없다고.
손에 두툼한 책 한 권이 잡혔다.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미묘한 기대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분 좋은 소설. 그래, 정신없이 빠져들어 책을 손에 놓지 못할 것 같은 기분.
자, 그럼 이제 13호 캐비닛을 열어보도록 하자.



유쾌한 상상력?

이 책은 심토머에 관한 이야기다. 심토머란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징후를 가진 사람들. 심토머. 그들은 새로운 종일까?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이 지구를 아끼고 사랑해줄 수 있는 박애적인 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심토머들의 모습에선 인간의 그림자가 보인다. 동전의 양면처럼 환상과 현실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고, 몇 년이고 잠에 빠지기도 하고, 시간이 쾅하고 사라지고, 양성을 다 갖고 있고,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슬픈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이 책은 심토머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또한 그 심토머에 관한 캐비닛을 관리하는 화자의 이야기이기도하다. 화자인 공대리의 모습은 첫 장에 나오는 루저 실바니스와 닮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토머들의 모습도 상피에르 사람들의 변형된 묘사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소외된 사람들, 유리된 사람들의 변형된 묘사처럼 읽혔다.
이 책은 심토머들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또한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양면이다. 자본주의 시대 속에 도시는 각박하다. 다들 가까스로 버티는 삶이다. 누군가는 심토머가 되고 누군가는 견디고 누군가는 기록한다. 이 책은 따스하지도 냉혹하지도 않다.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또 이렇게 살아갈 거라고. 당신은 버틸 수 있느냐고. 또 앞으로 어찌하겠느냐고.

이 책은 일반적인 장편 서사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에피소드 별로 이야기가 잘게 나누어져 있고 그것조차 순서가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구성의 신선함이랄까. 사실 읽으면서 이건 옴니버스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이야기들의 연속인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라는 우려를 했다. 즉, 결말이 없이 소개로 끝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3부에서 주인공 화자를 부비트랩에 밀어 넣으면서 이야기를 급박하게 결말로 끌고 간다. 어찌 보면, 앞의 2부와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르고 화자에 불과했던 주인공이 본격적인 이야기의 주체로 나오면서 위화감이 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작품의 평이 안 좋은 면이 있고 나 역시 좋은 끝맺음이라고 보진 않았다. 좀 더 나아간 무언가가 있었어야 했다. 지금껏 나온 인물들과 연대하여 무언가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첫 장의 시작인 루저 실바니스와 마지막 장의 공대리가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되는 부분은 인상적인 결말이다. 씁쓸한 끝맺음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작가는 이 책을 결코 기분 좋게만 읽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환상도 현실도 결코 아름답지 않으며 주인공 화자도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없고, 그건 쓰고 있는 작가 본인 그리고 읽는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듯이.

책을 읽으면 낡은 13호 캐비닛의 세계가 보인다. 그 세계는 물론 실제가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능청스런 입담으로 인해 온통 허구인 내용이 마치 실제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하긴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모든 음식에 식초를 넣어 먹는 여자, 설탕만 먹는 할아버지 등이 버젓이 나오는 판국에 캐비닛 속 심토머들이 석유만 먹고, 유리만 먹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작가는 은유를 집어넣는다. “빵과 고기만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식단은 인간을 결국 신뢰할 수 없고 게으른 존재로 만들죠. 휘발유는 인류의 새로운 대안입니다. 주위를 보세요.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속도의 천국이죠. 그러니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p.24) 처음에 심토머를 소개하면서 맨해튼 컨설팅 2005년 보고서를 들먹거리며 진짜처럼 이야기하는 휘발유를 마시는 사람은 단지 유머를 위해서 등장한 것이 아니다. 캐비닛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기발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이지만, 그 속에는 특별히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모두 우리들의 모습 중 한 면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이토록 정교하게 짜놓은 퍼즐 같은 구성과 다채로운 심토머들의 이야기로 대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캐비닛은 성공했다. 작가는 능청스런 거짓말로 독자들에게 웃음을 짓게 만들고, 다양한 심토머들을 선보이며 활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책은 쉽게 읽어지지만 쓰는 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물론 뒤에 수상 작가 인터뷰에서 작가가 이 캐비닛을 쓰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나와 있다. 몇 년간 친구의 지원 속에 고시원을 돌아다니며 글만 써온 덕분에 간신히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이 [캐비닛]인 것이다. 작가의 각오가 새삼 떠올랐다. 그런 각오가 있었기에, 그런 행동이 뒤따랐고, 그 결과를 이제 마주치게 되었다.

앞서 이 책을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보이는 양상과 비슷하다고 언급했다. 풍부한 환상성. 그것 말고도 신선한 화법으로 무장한 유쾌한 문장들이나, 에피소드별 구성 등에서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들과는 차별성을 띤다. 이 책의 독자들 반응을 보면 포스트 박민규라는 말이 적잖게 나온다. 아무래도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재기발랄한 글이라는 점이다. [지구영웅전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등에서 보여준 박민규의 재미있는 문체와 독특한 이야기 전개. [캐비닛]도 마찬가지다. 읽으면 빠져드는 문체고 유려하면서 재기가 철철 넘친다. 또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커다란 줄거리를 따라가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 아니라 신문에 연재되는 칼럼글을 모아놓은 것처럼 작은 에피소드별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두꺼운 책임에도 쉽게 질리지 않게 하는 요소다. 바쁜 생활 중에 진득하게 앉아 책 읽을 시간이 없는 현대인들. 특히 평일에 이야기가 연속되는 장편 읽기는 많은 부담이 있다. 그러나 [캐비닛] 같은 책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가볍게 몇 개 에피소드만 들쳐볼 수 있다. 잠들기 전에 한 편씩 읽을 수도 있고. 이 시대에 맞는 신형식일까? 어쩌면 이 소설 자체도 기존 소설의 변종이며 심토머일지도 모르겠다.

잠을 좋아하지만 숙면하지 못하는 내게 가장 매력적인 심토머는 몇 년이고 깊이 잠드는 토포러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누군가는 여러 사람의 의식이 교환될 수 있는 다중 소속자가 인상에 남았을 것이고, 또 바쁜 일상에 치이는 누군가는 중요할 때마다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타임스키퍼가 인상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작중에 등장한 고양이만을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진짜 고양이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를 인상 깊게 본 듯하다. 이 외에도 도플갱어, 메모리모자이커,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블러퍼 등등 다양한 심토머들이 등장한다. 낯설고 환상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다.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또한 씁쓸하고 아쉬운 이야기들. 수없이 봐왔던 단절된 타인과의 관계. 대안도, 해답도, 교훈도 없다. 캐비닛은 그런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캐비닛의 의미는? 화자 역시 끝까지 단정 짓기 어려워하고, 읽는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 도시가 하나의 캐비닛이 아닐까?
이 책을 읽어보면서 자신은 어떤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어떨까? 작가는 친절하게 말해줄 것이다. “아뇨, 당신은 심토머가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은 아직 이 도시에서 견딜만 합니다.”(p.293)
작가의 등단작이었던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도 재미있는 문체와 능청스런 이야기 전개 솜씨를 선보였다. 그러나 분명 비슷한 주제를 천착하면서도 [캐비닛]은 더 발전된 글이다. 그리고 등단작보다 이번 작품이 더욱 출사표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기대가 된다. 아직 그는 자신의 캐비닛 속을 모조리 드러내지 않았다. 더군다나 캐비닛을 채우는 일도 꾸준히 해나갈 것이다. 믿음이 가는 작가다. 그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고 있다.
나는 이제 13호 캐비닛을 닫는다. 그리고 이 [캐비닛]에 관한 글 또한 마치려고 한다. 이제 누군가가 13호 캐비닛을 열어보기를 바라면서. 그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엿보기를 바라면서. 새로운 작가의 탄생에 기뻐하기를 바라면서.
시작을 작가의 등단 소감으로 했듯이, 마지막 역시 이번 수상 소감을 인용하겠다.

(……전략……)
나의 선생은 소설쟁이가 농부, 어부, 막노동꾼처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신성한 밥벌이를 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비해 두 수쯤 아래에 있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선생이 틀렸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허영이므로 소설쟁이는 그보다 최소한 세 수쯤은 아래에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작가에게 관용이란 걸 베풀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 올려라. 그리고 멋지게 한마디 해주어라.
“이 자식아, 책 한 권 값이면 삼 인 가족이 맛있는 자장면으로, 게다가 서비스 군만두도 곁들여서, 즐겁게 저녁을 먹는다. 이 썩을 자식아!”

그런데도 내가, 겁도 없이, 책을 내게 되었다.
분수도 모르고 덜컥 상까지 받아버려서 이제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하지만
귀싸대기 맞을 각오는 되어 있다.

―――2006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캐비닛] 수상소감 中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장면 세 그릇 이상의 값어치는 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자장면과 캐비닛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손이 맵지 않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댓글 3
  • No Profile
    yunn 07.04.03 23:05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재미있게 본 책입니다. 꼬리를 무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웃으며 보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지요-_)
    저 수상소감, 멋져요.
  • No Profile
    07.04.04 09:28 댓글 수정 삭제
    제가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했던 점은 조금 늘어진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자장면 세 그릇 이상의 값어치는 하고도 남는다는데 동감입니다.
  • No Profile
    날개 07.04.11 18:58 댓글 수정 삭제
    yunn/ 수상소감들이 멋져서 리뷰를 쓰게 되었어요. 수상소감을 읽고 관심을 갖게 되어서 읽게 되는 저 같은 사람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권/ 역시 사람이 읽는 건 대부분 비슷한 감상을 느끼게 되는 게 있나봐요.^^ 많이 읽히고 그만큼 작가가 많은 피드백을 받는다면, 이 작가의 이후 작품이 기대가 돼요. 수상소감 때문인지 결코 멈추지 않고 꾸준히 쓸 거란 믿음도 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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