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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kalai@gmail.com우리는 언제까지 알아주는 이 없는 장르 단편의 암울함을 서러워해야 할까? 언제까지 장르문학의 어려움을 이야기해야 할까? 언제까지 문학의 척박한 환경을 한탄해야 할까? 대체 언제까지? 이젠 우는 소리도 지겹다. 욕심을 내자면 끝도 없고, 많지도 않은 팬들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다. 즐거움을 위한 투자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애정이 사명감으로 바뀌고 강요로까지 변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솔직히 취향에 맞는 국외작품이 다 사서 읽을 수 없을 만큼 나오니 이만하면 된 것 아닌가? 그러나 고개를 돌려보니 발치에 거의 빈 밭이 하나 보인다. 아니, 아주 빈 밭은 아니다. 싹이 몇 개 보이는 밭. 국내 창작이라는 이름의 밭이다.

장르 단편이라는 작은 밭이 자리잡은 환경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우는 소리는 이제 지겹다. 나는 반대로 생각해보려 한다. 밭이 비었다는 것보다도 그 밭에 싹이 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싶다. 단편집이 드문드문 나온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상당한 수준을 갖춘 단편작가가 나오고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게다가 2006년 말부터 2007년 초까지 공포, 무협, SF, 판타지 단편집이 다 나왔으니 이거야말로 신기한 일 아닌가!



우선 11월에 출간된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한국 작가들의 공포 단편만 모아 엮은 시도로 어이없는 19금 판정 때문에 소수 독자들에게 불타는 의지를 심어준 책이기도 하다. 실은 나도 보관함에만 담아뒀다가 그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주문해서 읽었다. 작품수는 열 개. 이거다 싶게 강렬한 단편은 없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공포를 그려내려는 시도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흉포한 입}과 {하등인간}이 제일 좋았다.

몇 작품에 대한 간단한 감상을 덧붙인다. 책을 열자마자 접하게 되는 김종일의 {일방통행}은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 실감날 듯한 이야기로, 어딘가 현실감이 있어서 더 기분나쁜 공포물이다. 권정은의 {은둔}, 신진오의 {상자}, 엄성용의 {감옥}은 고어물이라고 할 만 하고, 우명희의 {들개}는 그 중에도 하드고어에 가까웠다. 사실 여기까지 다섯 작품이 다 취향이 아닌 계통이라 그만 읽을까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내가 순수 공포물보다는 장르 접점에 있는 작품을 더 좋아해서가 아닐까 싶다. 뒤이은 다섯 작품은 SF나 판타지와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최민호의 {흉포한 입}은 피가 튀는 잔인함보다는 심리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화자의 정신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습이 설득력 있었다. SF스러운 면도 엿보인다. 장은호의 {하등인간}도 SF 호러에 가까운데, 실체 없는 공포와 조금씩 순응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그렸다. 이종호의 {아내의 남자}는 이야기 자체는 무난했지만, 끌고 가는 솜씨가 좋고, 마무리를 장식하는 김민영의 {깊고 푸른 공허함}도 SF적이다. 오래 오래 전 베스트셀러였던 로빈 쿡의 소설이 생각나긴 했지만, 기본적인 글솜씨가 있다보니 재미있게 읽었다.

읽으면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다는 점에 불만족을 느끼기는 했지만 애초에 공포는 참신함이 아니라 진부함에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완성도 면에서 편차는 있지만, 이 다양한 단편들을 보면서 미국의 TV 시리즈 [마스터즈 오브 호러]를 떠올렸다. 각기 다른 감독이 맡아 호러영화의 모든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이 시리즈가 가능한 것은 공포문학이 그만한 뒷받침을 해주기 때문이다. 힘든 출발이지만 영화와 드라마 판로가 있다는 점에서 한국 공포문학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관측도 해보게 된다. 다만 열 개 단편 중에 {땀흘리는 아내}(조재형, [2004 환상문학웹진 거울 단편선] 수록) 만한 수작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아쉽고, 계속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무협에서도 단편집이 한 권 출간되었다. 2007년 1월 출간된 [진산 무협 단편집: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희귀한 일이다. 중국과 달리 한국 무협은 작품 활동이 장편 위주로만 진행된다. 내 기억이 맞다면 10여년 전, 이 책에도 실린 진산의 {청산녹수}를 포함하는 공모전 당선작품집이 나온 후 처음 나온 무협 단편집이다. 그것도 한 작가의 작품집으로는 유일무이하다.

무협의 맛을 가미한 고대 판타지를 원한다면 {청산녹수}를, 무협 로맨스를 원한다면 {고기만두}와 {웃는 매화}를 권하고 싶다. 무협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광검유정}과 {백결검객}에 탄복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백결검객}과 {날아가는 칼}이다. {날아가는 칼}은 작가가 “유일하게 무협이어야만 쓸 수 있었던 글”이라고 했지만, 그 결과물은 묘하게도 다른 작품보다 무협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마지막 작품인 {잠자는 꽃}은 그야말로 한바탕 춤사위를 끝내고 고적하게 흔드는 소맷자락처럼 다가온다.  

인터넷에서 본 다른 이들의 감상을 보니 “굳이 무협단편집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거나 “무협이라는 선입견 없이 봤으면 싶다”는 말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그 태생 그대로, 무협단편집으로서 읽히고 무협단편집으로서 만족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협이 아니어도 될 이야기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무협에도 이런 스펙트럼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으면 한다. 분명히 출발지점에서는 무협이 아니라도 상관없었을지 모르는 이야기들이지만 이미 무협으로 완성된 작품은 다른 장르로 썼다면 나왔을 작품과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 무협을 사랑하는 독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진산의 무협단편은 언제나 무협적이었고, 그대로 좋았다. 10년 고별사라고는 해도 절필 선언이 아닌만큼 언젠가 또 무협을 써주지 않을까 기대는 품고 있지만, 그보다 바라는 것은 이 한 권의 책이 소리없이 가라앉아 버리지 않는 일이다.



SF는 대약진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정식 단편집은 아니지만 [2006 과학기술 창작문예 수상작품집]과 무크지 [HAPPY SF] 2호, 양쪽 다 한국 작가의 작품집 성격을 강화했다. 전자는 3회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1, 2회 수상작가의 작품을 수록했고 후자는 단편이 책의 절반을 차지했다.

여기에서부터는 거울 필진이 활약이 두드러진다. [2006 과학기술 창작문예 수상작품집]에는 김보영의 {우수한 유전자}와 배명훈의 {모}, 박성환의 {세상이여 안녕} 세 작품이 실려 있고, [HAPPY SF] 2호에는 김보영의 {진화 신화}, 배명훈의 {스윙 바이}, 정소연의 {앨리스와의 티타임}이 있다. 여섯 편 중 세 편은 거울에 이미 수록된 적이 있는 글이고, 세 편은 새로운 글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버려도 될 지 모르지만, 이 여섯 편은 각 책에서 가장 좋은 작품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올 1월에는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책 모두에 참여하여 훌륭한 작품을 실어준 김보영과 배명훈은 박애진과 함께 올해 초 3인 앤솔로지 [누군가를 만났어]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넓은 의미의 환상문학 단편집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거의 다 이전에 읽은 글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감상을 적기는 어렵지만, 만족스러운 독서를 보장하는 책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세 작가가 각각 작품집을 냈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비록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이 3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덕분에 이제야 겨우 틀이 잡히나 싶었던 수상 작품집도 팔아볼 생각이나 해봤나 싶게 사라지게 되었지만 새로이 단편을 발표할 지면이 생기고, 작품집이 엮여 나온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상황. 2006년 말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그리고 많은 장르 팬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지만) 무려 네 권의 창작 SF 단편집이 나오기도 했다. 뿐인가. 적지만 단편집을 꾸준히 출간하는 작가가 있고, 2007년 안에 크로스로드의 SF 중단편집도 예약되어 있으니 어찌 보면 SF 단편계는 제법 풍요로운 셈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제일 흉작이 판타지가 되나? [누군가를 만났어]를 제외하면 판타지 분야에서는 최근에 정식 출간된 작품집이 없다. 아니 최근 10년을 돌아보아도 국내 창작 판타지 단편집은 한 작가의 작품집으로는 [이영도 판타지 단편집]이 유일하고, 앤솔러지로는 2000년에 나온 [윈드 드리머]와 2001년의 [환상서고] 밖에 없었다. 잡지 [파우스트]를 셈에 넣어도 정식 출간수가 너무 적다는 느낌이다. 아마추어 단편 활동과 단편집 수에서는 앞서 말한 어느 장르보다 활발한 분야이니 비관은 하지 않지만, 의아함은 남는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판타지의 범주를 넓게 생각한다면 앞서 거론한 모든 책이 그 안에 들어간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투덜거리면서 시작해서 결국은 단편집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장르에서 이거다 싶은 작품이 나왔으면 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더 많은 지면을 얻기를 바라니 어찌하랴. 읽으면서 신이 나고 읽고 나서 뿌듯한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겠으니 어찌하랴. 그러니까 나는 낙관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서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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