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UNHAPPY@paran.com

0. 안이한 만남

한국 소설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학생 운동의 시대일 것이다. 박 정희로 시작해서 많은 부분이 변질 되어버린 지금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숱한 아픔과 고통을 낳고 겪으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이제 종교에 얼굴을 묻고, 노스탤지어의 꿈에 빠진 것만 같은 어느 소설가에 대하여 ‘결국 또 오랜 상처를 후벼 파는 일로 돌아갈 것이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다. 아직 그 시절은 세상과 시간마저도 온전히 끝을 맺어주지 못했으니까. 끝나지 않은 길에는 사람들이 짐승 먹이로 남겨놓은 과일마냥 처량하게 매달려있기 마련이다.
빠르게 늘어나는 경제 규모, 그리고 그 보다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가는 즐기고 놀 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과거를 정리하기 보다는 외면하게 만들었다. 고작해야 정치를 위해서 용서 한마당 놀이가 두어 번 있었을 뿐이고, 그 끝에는 차라리 묻히고 싶어도 묻힐 수가 없는 사람들과 왜 묻히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는 사람들 사이의 소리 낮은 잡음이, 그리고 그 잡음을 듣지 못하는 무관심한 사람들과 애써 듣지 못한 척 외면하는 사람들의 뒤섞임이 남았다. 근간이 생에 달린 문학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그 곳에 머무는 사람들과 힘이 다하고 갈 곳이 없어 출가하듯이 역사 소설로 떠나가는 사람들,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괴팍한 시도에 골몰 하는 사람들, 평화롭고 안전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서점의 책장과 진열대 위에 빼곡하니 쌓이고 있다.
단지 입장과 사상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흩어지듯이 뒤섞인 그 곳에 딱히 선택의 기준이나 만남의 희망 따위를 품기는 힘든 일이다. 그저 달을 건너 한 번 정도 무심결에 시선이 닿고 무심결에 손이 나가는 책 서너 권을 집어 들면 그만이다. 그렇게 안이하고도 무미건조한 선택 속에 내가 묻고 싶은 건 단 한 가지다.

-다들,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거죠?



1. 길 끝의 봉지와 리나

길 끝에서 볼 때, ‘봉지’는 돌아오는 여성이고, ‘리나’는 떠나가는 여성이다. 두 여성의 방향은 얼핏 반추와 진출로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내용 면에 있어서는 돌아오는 발걸음은 ‘도전’이고, 떠나가는 발걸음은 ‘도망’에 대비할 수 있다.
‘봉지’는 그 시절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먼 시골에서 서울까지, 짙은 우정에서 어설픈 애증까지, 사랑 이야기부터 비극까지, 그 시절의 흐름을 쫓는다. 봉지는 주인공이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상이다. 그 흐름과 사건 속에서 봉지가 원하는 것은 그저 첫 사랑의 확인뿐이다. 사랑의 확인 외에 다른 것은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흔히 절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비난을 할 수도 있다. 맹목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봉지의 사랑 확인 방식은 바꾸고 철폐하고 쟁취하는 방법론은 있었어도 그 뒤에 과연 무엇을 어떻게 낳고 보전할 것인지에 대한 목적은 없었던 시절과 꼭 닮았다. 이렇게 소설 ‘봉지’는 사랑이라는 맹목을 통하여 온갖 이념과 사상으로 부터 떨어져 나와 그 시절을 가능한 온전하게 살려놓으려 했다. 이는 마치 국사책에서 ‘무슨 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만큼이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처럼, 감히 그 시절을 ‘지난 시간’처럼 정리하려 드는 글이면서 길 끝에 매달린 열매들을 따 모으려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리나’는 현상만을 움켜쥐고 훌쩍 어디론가로 떠나버린 글이다. 익히 알고 있는 사회 현상을 어딘가 있을 법한 모를 나라에 가져다 놓고 리나를 살게끔한다. 리나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굳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그리고 작품을 통해 체험하고 배웠고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련의 사회 현상이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그런 자세를 취함으로서 모든 흐름의 중심을 ‘리나’에게로 끌어온다. 그 밖에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리나는 소설 ‘광장’을 연상케한다. 광장의 ‘중립국’과 리나의 ‘P국’은 의미 면에서 맞닿아 있고, 그에 대한 주인공의 선택도 엇비슷하다. 다만 리나의 경우는 차라리 가상 세계라 불러도 좋을만큼 역사와 장소의 제한을 벗어던진 처지이기 때문에 좀 더 리나라는 한 개체의 삶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리나는 한 여성에 대한 인생 실험의 글이다.



2. 길 밖의 ‘봉지’와 ‘리나’

리나는 판타지적 면모를 지닌 글이다. 앞서 ‘광장’과의 유사성을 거론했지만, 실질적인 이야기의 무대와 상황은 백년동안의 고독과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리나는 오로지 주인공을 파고드는 글이기에 무대에게서는 큰 매력을 느낄 수가 없다. 작가는 글전반에 걸쳐 투철하게 오로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만들고 이용한다. 이는 리나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전자처럼 알고 있는 사회 현상의 흐름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맞물려 글의 매력을 평범하게 만든다. 원하는 목적을 위한 인위적인 장소와 사건에 의지하다보니 지나치게 조심하지 않았는가 싶다. 지나치면 차라리 판타지 소설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리나와 같은 글이 가지고 있는 숙명인지 모르겠지만, 표현하려는 바와 의도는 분명하지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생명력에 대해서는 조금 아쉽다.
봉지는 조심스러움과 욕심이 얽혀있는 글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수많지만 반복적인 사건에 얽히고, 그 시절을 표현하기 위한 자잘한 인물과 사건 중에는 이야기의 흐름과 조금 동 떨어진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부위에 있어서는 주위를 맴도는 분위기도 읽을 수 있다. 의문으로 시작해 의문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그 시절에 대한 작가가 어떠한 결론이나 마음가짐을 가지는지 알 수 없게 만들고, 그 영향으로 봉지의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 역시 어쩐지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 듯 싶다.



3. 맺음말

감상이 아닌 리뷰는 항상 쓰는 이의 알량한 뇌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물건이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맡고 싶지 않은 일이다. 다만 반년이 넘도록 글이 없는 불성실한 필자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던 편집장님께서 오랜만의 권유를 주셨지만, 개인 사정이 가로막는 바람에 대신 강하게 뇌리에 남아있던 두 작품에 대한 리뷰를 쓰게 되었다. 이 글이 어쩌면 무지한 한 개인의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봉지와 리나- 두 작품이 참으로 매력 있는 작품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무미건조한 국내 서적과의 만남에서 오랜만에 즐거운 만남이었던 두 작품과 그 작가분들에게 감사드리면서, 이만 졸렬한 글을 맺을까 한다.
댓글 0
Prev 1 ...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