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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그것이 원래 그들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왠지 억울한 느낌까지 든다. 어둠을 틈타 밤안개처럼 슬금슬금 다가와 어느 새 우리 곁에 서버린 그들의 존재감이, 이제는 버거울 정도로 커져서 평소에도 무시할 수 없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벌이는 한 밤의 술파티에서도, 깔깔대며 뒹구는 대낮의 TV녹화프로그램 시청의 순간에도, 모두가 고요히 침묵을 지키는 새벽의 아슬한 한 순간에서 조차도. 그들은 살그머니 내 어깨를 잡아온다. 어이, 한 게임 어때?
귀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털어내며, 이 봐,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지만 때로는 그들의 모습은 소름끼치게 매혹적이다. 단 몇 초면 돼. 달콤하다구. 한 순간에 전부를 사게 되지. 어때, 황홀하지 않아? 그래, 알고 있다. 거부할 필요조차 느낄 수 없는 고혹적인 유혹. 분연히 털고 일어나 외쳐본다. 도대체 언제부턴거야?!
집으로 달려가 서재를 뒤져본다. 그 틈을 못참고 그들은 사방에서 나에게 달려든다. 그것은 유혹의 형태를 띨 때도 있고 협박이기도 하며 친구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며 옆구리를 스치는 스산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 이 쯤 어딘가에 있을텐데. 절반 이상이 먼지로 화해버린 책과 책 사이의 차원의 문틈에서 몇 가지 추리의 단서들이 빼꼼이 고개를 내민다. [드라큘라]. 브람스토커의 백작님은 그들을 세상에 소개한 자이다. 그를 필두로 수많은 자들이 상상과 환상의 문을 빠져나와 현실의 문을 두드렸다. [뱀파이어]시리즈. 뱀파이어들, 수많은 매체에서 그들이 튀어나왔다. 단순한 한 권 책의 캐릭터를 범세계적으로 형상화시킨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먼 세계의 이야기였고 먼 나라의 공포였고 실체가 없는 희미한 아름다움이었다. [꼬마흡혈귀]. 조용히 미소지어본다. 나에게 있어 이것이 그들과 처음으로 피부를 맞닿은 만남이었다. 루디거와 안나, 사랑스러운 그들. 나를 그들의 세계로 이끌었던 최초의 승선자들. 그러나 그 때는, 그들이나 나나 아직은 아름다운 환타지 신세계를 거닐고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그들을 힘겨운 현실의 닻 아래로 끌어당긴 그것은.
찾았다. 모두 먼지로 화하기 직전 내 손에 닿아 완전히 스러지지 못한 책 한 권이 손아귀에서 버둥거린다. 나를 놔 줘. 왜? 나는 사라져야 해. 왜? 이미 진실이 되었으니까. 진실이 된 환상은 사라져야하지. 네 뒤에 서 있는 그들이 보이지 않니? 난 인정할 수 없어. 애써 뒤돌아보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 증거를 보여줘. 증거를.
어쩔 수 없지. 체념한 듯 책은, [혈중환상농도13%]는, 버둥거리기를 멈췄다. 나도 힘을 뺐다. 휘리릭, 책장을 넘겨 그것이 보여준 현실은 참혹한 것이었다.

21세기 어느 시점에서 임계점이 돌파되었다. 순식간에 전 인류가 흡혈귀로 변했다.…목마른 흡혈귀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피를 빨고 마시고 뽑고 삼키고 주고받았다. 全지구적 사랑과 평화. 全인류적 화합. 누구나 기꺼이 다른 이를 위해 피를 흘렸다. 1)

아냐! 당황한다.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어. 그래, 나를 봐. 나는 흡혈귀가 아냐. 책은 중얼거린다. 너의 목 뒤에 두 개의 이빨자국이 보이지 않니―조금 과격한 여자친구의 애정표현일 뿐. 손목에 남겨진 퍼런 핏자욱은―친구들이 집에 가는 걸 붙잡아서.
알고 있잖아. 애정을 주고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 피를 주고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그들. 무엇이 다르다는 거야. 아냐, 그들은 그런 존재가 아냐. 혼자서도 오롯한 존재이며 영원히 오만한 자. 인간의 공포이며 생명있는 모든 것들의 약탈자, 고독을 즐기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자. 책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너를 이야기하고 있구나. 네가 되고 싶은 흡.혈.귀. 그들은 천만년전에 실종됐어. 아니, 천만년 전의 그들조차도 오롯이 혼자일 수 없었지. 누군가를, 언제나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싶어하는 애정결핍자들.

잡수시오 잡수시오/이 술 한 잔 잡수시오/이 술 한 잔 잡수시면/천만 년이라도 사오리다
몽룡은 아무 말 없이 손에 쥔 술잔을 내려다본다. 횃불에 비친 술의 빛깔이 기묘하게도 꼭 핏빛과 같다. 몽룡은 잔을 들어 코로 가져간다. 본관은 물론이거니와 아전과 나졸들까지도 입을 다문 채 바라만 보고 있다. 비린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몽룡은 술잔을 다시 내리며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향기가 참으로 좋구나. 그래, 이 술 한 잔 마시면 너 같은 계집을 끼고 천만 년 동안이나 재미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렷다!” 2)

“그 녀석 알아?”…“옛날에 언젠가. 언젠가.” 그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몸을 떨었다. 그 미소는 아무 생각도 없는 백치 같아 보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는 약간 기울였다. 가로등 불빛 때문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린다. “한 번도 웃지 않았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3)


콧웃음쳤다. 고전이구나. 고전을 그들식으로 나열한 이야기, 이야기… 재미 있네. 그럼 그들이 야기한 공포가 단지 애정을 갈구하는 결핍자들의 투정 섞인 안간힘이었단 말이야. 참 처음 들어보는 해석일세.
웃기지도 않아.
웃기지 않은 건 진실이기 때문이지. 진실은 괴로워. 긴 세월을 버텨왔던 그들조차도 현실에 도착해서는 무너져버렸어. 너는 처음에 내가, [혈중환상농도13%]가 흡혈귀단편선이라는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겠지. 하지만 더 이상 이들은 호러가 아냐, 환상이 아냐. 차갑게 마주한 일.상.이지. 네가 말한 식의 흡혈귀들은 기생충 혐의로 기소되었고 과학의 힘으로 박멸되었지. 남은 건 너희와 똑같이 외로움을 타고 애정없이는 굶어죽는 인간의 거울상들 뿐. 현실을 즉시해. 너희는 흡혈귀야.

“관계를 오래 지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아?” 그건 지금 그녀가 고민하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연이 그 말을 한 순간 그녀는 이 순간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상대방과 함께 있는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는 거지.” 4)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삶을 거부한 자들은 터무니없는 공복감과 상실감, 고독 속에서도 홀로 밤길을 걸었다. 5)


사실은 알고 있었다. 책이 가리키고 있는 모든 것은 흡혈귀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1999년, 공포의 대마왕은 오지 않았고 세기말적 공포를 그대로 끌어안은 채 인간만이 살아남았다. 지나간 천년의 공포는 다가올 천년의 희망과 섞이지 못하고 그대로 현실의 절망으로 굴러떨어진다. 흡혈귀, 그들마저 인간을 고독의 환영 속에서 구원해주지 못했다. 인간은 환상의 절대권력자마저도 일상의 나락으로 넘어뜨려버렸다.

너는 참 모순적이구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어투는 왜 그렇게 밝은 거야.
당연하지. 삶은 모순이거덩. 촤르륵, 훑어지나가는 책장 속에 밝게 웃는 미스 김의 영상이 떠올랐다 잠기고 그 위로 유쾌한 어조로 270년만의 부활을 설명하던 슈베린씨, 덩실덩실 북장단에 맞춰 빠르게 휘몰아치던 반려자 잃은 이몽룡의 모습이…… 사라져간다. [혈중환상농도13%]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진실이 된 환상은 사라져야 해.' 나는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다. 책을 받아들였던 그 순간부터, 아니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책표지를 훑던 그 때에라도. 관밖으로 삐죽이 내밀어진 손에 꽂힌 주사바늘과 핏빛 링겔을 보고 알았어야 했다. 공포의 절대 권력자로서의 모습을 잃은 대신 그들은 나의 바로 곁에 서 있다. 나는 이제 그들과 함께 걸어야 한다.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를 의지하여 일상에 힘겨운 닻을 내리고 또 끌어올려야 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매혹적이지 않지만.
사랑스럽다. 불멸자로서 필멸자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 그들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유혹은 더 이상 일탈이 아니요, 광기도 아니다. 힘겹고 즐겁고 아름다운 일상을 함께 걷자는 투정이고 앙탈일 뿐이다.

그 존재가 책 뒤로 형형한 눈을 들어 날 응시한다.

진정, 절대자로서의 그들을 잃고 싶지 않다면 그 책을 읽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기쁘다. 친구를 알게 되었으니까. 한순간이나마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할 수 있는 친구를 말이다.

앞으로 이어질 길고 긴 추락 속에서, 그 기억만이 지표가 될 것을 알기에.

-흡혈귀가, 거울의 또다른 흡혈귀들에게-

1) [전직 흡혈귀의 회고] p44
2) [춘향비가] p106
3) [카나리아] p152
4) [선물] p313
5) [전직 흡혈귀의 회고] p44
댓글 4
  • No Profile
    ja 06.07.29 07:28 댓글 수정 삭제
    단편선에 대한 리뷰라고 하면 각 작품에 대한 평이 보통인데 책 자체에 대한 리뷰를 써주셨어요. 인상적이었습니다. ^^
    늦었지만 2005 중단편선 리뷰도 즐겁게 읽었더랬습니다.
  • No Profile
    06.07.29 11:51 댓글 수정 삭제
    혈중환상농도13% 즐겁게 읽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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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7.30 13:54 댓글 수정 삭제
    역시, 누군가가 정리를 해 줘야만 하는 책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절영님이 먼저 칼을 빼 드셨네요. 흡혈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 것 같아요.
    제 감상을 덧붙이자면,
    저는 신체가 난자당하는 몇몇 글들을 약간 불편하게 읽었는데요(간식을 먹으면서 읽기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뱀파이어라는 설정은 누군가의 몸을 난도질하는 장면을 글로 써 보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도입된 장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역겹게 부서지는 육체들. 이 책은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닿지 못하는 곳에 잔뜩 쌓아둔 잔혹미로 무장한 책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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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영 07.01.03 14:07 댓글 수정 삭제
    ja/늦었지만 리뷰 즐겁게 읽으셨다니 감사드립니다.(__)
    권/저는 즐겁진... 않더라구요. 재밌긴 했지만.^^;;
    배명훈/확실히 일상에서 편안하게 읽을 글은 아니죠.;;; 내가 생각한 흡혈귀들이 아니라서 당황하기도 했고. 그래두 인상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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