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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kalai@gmail.com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이 양장판으로 다시 나왔다.

   책을 소개하면서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렇게 적절한 방식이 아닐 테지만, 개인적으로 이 일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지난번에 확인했을 때까지 이 작품이 품절 혹은 절판 상태인 것을 알고 “도대체 왜? 왜 재간하지 않는 거야?”라고 부르짖었기 때문이고, 새로 출판된 것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뻤기 때문이며, 이제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런 어이없는 이유를 당당하게 써놓을 만큼 이 작품을 사랑하는 까닭에서다.

   이 책을 줄거리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저히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그리고 무의미한 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간략하게 적어보자.

   알바니아의 고원지대에서는 아직도 관습법에 따라 피의 복수를 집행한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사람이 하나 죽는다. 주인공은 며칠을 인내한 끝에 복수를 완수하고 이제 다시 죽은 이의 가족에게 복수당하기까지 한 달의 유예기간을 얻는다. 피는 피로써 갚아야 하기에. 그 한 달 동안 그는 피 관리인에게 핏값을 지불하러 가고, 평생 좁은 은둔처에 갇혀서 복수를 피하느냐, 유예 기간이 끝난 순간부터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도망 생활을 할 것인가 고민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삶은 이미 총을 쏘기 전부터 끝난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는 아닐까……? 아득히 오래 전, 신화적인 복수가 시작된 순간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 완결된 세계 ‘고원’과 그 속에서 서로간의 피의 복수에 얽혀 오로지 죽음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하는 지독한 부조리.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모순과 역설 덩어리다. 피가 넘치지만 피비린내가 나지 않고, 죽음은 고요하고 피곤한 일상이 된다.

   아마 [부서진 사월]을 카다레의 최고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내 출간된 그의 소설 중에서 [H서류]와 [꿈의 궁전]은 기묘하게 뒤틀린 희극성과 더불어 정권 비판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돌에 새긴 연대기](현재는 구하기 어려운 작품이고, 유감스럽게도 번역 상태가 나쁘다), 그리고 [부서진 사월]은 신화적인 성격과 비극성이 한결 강하다. 여기에 처녀작이며 1994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국내 소개된 [죽은 군대의 장군]까지 다섯 작품. 이 중에서 [부서진 사월]이 가장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가장 읽기 쉬운 작품도 아니다. 때로는 희극이 더 비극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장 비극적인 작품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 작품을 가장 얼얼하고, 햇살처럼 눈을 찌르는 소설로 기억한다.

   이스마일 카다레가 독재정권의 탄압에 못이겨 프랑스로 망명했다는 사실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의 작품이 모두 일차적으로는 알바니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도 감상에 꼭 필요한 정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 속의 알바니아는,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세상 반대편에 실존하는 만큼이나 신화와 환상과 은유의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다른 나라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특성을 극한까지 몰아붙임으로써, 역으로 보편적인 공감을 획득하기도 하는 법이므로.

   애정이 넘친 나머지 오히려 볼 마음이 들지 않게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이 작품이 만인에게 같은 아름다움을 지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안전장치 삼아서, 읽기 전에 {성 소피아 성당}이라는 단편을 먼저 읽어보는 것은 어떨지. 계간 [문학동네]에 실린 소설이니 그렇게 공공연하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온라인으로 검색해서 읽어볼 수 있으니, 이 글을 읽고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한다면 주저없이 [부서진 사월]을 집어드시길. 슬프지만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재간된 책에 대해 단 한 가지 불만은 표지가 내용에 비해 너무 발랄하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가벼운 소설처럼 보여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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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6.12.14 20:36 댓글 수정 삭제
    이스마엘 카다레 걸로 본 건 유일한 작품이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입니다.
    잔인한 묘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책에서 호러영화에서 처럼 붉은 피가 뚝, 뚝, 흘러내릴 것 같아서...
    다른 작품도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안 보고 있네요. 왠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데... 이스마엘 카다레는 부서진 사월 하나로만 알고 싶은 기분인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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