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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로마서

2007.07.27 22:5407.27




박가분 (wonikcraft2@hanmail.net)



[로마서]를 본격적으로 읽고 검토하고 논의해야겠다는 동기를 준 저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이다. {성 바울로의 독자로서 알랭 바디우}라는 챕터에서 지젝은, 현대의 모든 상대주의적 정치에 대적하여, ‘진실에의 권리’를 내세우는 바디우의 사상들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실 알랭 바디우는 자신의 ‘진리의 철학’을 전개하는 데 있어 사도 바울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그러나 바디우는 바디우대로 나름의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어떤 약점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적 정치에 역시나 반하는 지젝이 보기에, 그러한 만큼, 오히려 근본으로 돌아가 바디우 철학을 가능케 했던 진리의 조건을 검토해 봐야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다. 여기서 그는 레닌이 혁명 전야에 다시 헤겔로 돌아가서, 헤겔 논리학에 매우 세밀한 주석을 달아가며, ‘이것은 근본적인 통찰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 쓰레기이다’ 식으로 세밀히 검토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디우의 진리의 철학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기 전에, 레닌의 제스처를 동일하게 바울의 로마서에 대해서 반복해야하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그 매력적인 제안을 어찌 피해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어줍잖게 무엇이 신학적 쓰레기인지 엄밀하게 분별할 힘을 애석하게도 필자는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근본적 통찰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략의 엉성한, 호의적인 서술에 만족할까 한다.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로마서 4: 15)

(개역개정판 성서를 참고로 했으니 성경구절이 개역판 성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편재성



(2:)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드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나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소도로 말미耉?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는 그 날이라

이 부분을 해석하자. 가령 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위 구절은 유대교적 율법을 지니지 않은 이방인에게조차 ‘율법’이라는 구원의 언약을 암암리에 가지고 있다, 곧 양심(율법을 대리보충하는)이라 일컫는 바에 의해 그들에게조차 구원이 기본적으로 보증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구원의 평등함에 대한 서술로 받아들여진다.(그들도 율법 비스무리한 것을 자기고 있다?!) 우리는 이 해석을 보다 근본화해서, 위 구절을 빌려 사실상 ‘율법’이란 ‘양심’이란 대리보충적 형태로 항상―――이미 편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유대교적 율법은 그 특유의 악랄함에 있어서조차 더 이상 특권적 위치를 점할 수 없으며 로마서 기자가 겨누는 대상은 곧 양심을 촉발하는 ‘법 일반’이다. 법의 본성은 곧 은밀한 것, 즉 죄책감의 부여이다. 양심이 그 ‘증거’가 되어 서로 고발하고 변명하며, ‘율법의 (도착적)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법의 ‘부정성’은 편재한다.



유대인과 율법

(2:)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 부분을 유대인의 도덕적 위선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한다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진부한 도덕적 ‘'비판’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내기를 걸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의 비판을 구출해서, 그의 비판을 유일무이한 ‘법 비판’으로 해석하는 쪽에 내기를 걸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 자신도 충실한 유대파였던 사도 바울이 유대 사제들 혹은 유대인들을 싸잡아서, 그들이 ‘실제로’ 도둑질하고 ‘실제로’ 간음하고 ‘실제로’ 우상숭배한다는 점에 대한 손쉬운 비난을 가하고자 했을까? 바울이 제기하는 것은 오히려 법이란 언어적 구성물에 대한, 화용론적 문제에 가깝다.
법은 대표적인 (화용론)수행문적 언어의 위상을 차지한다. 오스틴이 발견했듯이, 그것은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명령 간청 탄원 요구 금지 등을 ‘'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누가’ 그 행위의 주체가 되느냐이다. 오스틴의 경우 그 언어행위가 주체의 ‘의도’와 정확히 포개진다고 보았지만(물론 여기에도 몇가지 단서조항이 있었지만) 실은 그런 언어행위는 주체의 의도나 생각을 ‘초과’한다는 것이 현대 해체주의의 아이디어이다. 여기서 긴말 할 것 없이 다음의 발견에만 유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은 언어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행문의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예컨대 인간은 언어로 무언가를 ‘'약속’하지만 그 ‘약속’의 발화형태가 *반복가능성[데리다의 용어]으로서 미리 존재한다는 것. 그가 발화하는 언어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선행하는 언어적 맥락의 규정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를, 부족 간의 친족교류가 그 기저에서는 암묵적인 상징적 교환 체계가 함축한다는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그가 발화한 규정에 자신의 모습이 걸맞고자 사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행위수행적 언어는 재귀적으로 인간을 구속한다. 그것의 수행은 인간의 의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거꾸로 수행적 맥락으로서 작용하여, 인간의 현전하는 의도를 미리 규정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이 법을 만드는 게 아니라 법이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한다. 법은 우리를 ‘소외한다.’ 그것은 도덕적인 위선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혹 도덕적인 위선만이 유일한 문제라면, 우리는 더 열심히, 간음하지 않고자 노력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율법으로 충분한 것이지, 로마서 따위가 쓰여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기서의 모든 내용은 바로 그 법이 어떻게 우리의 주체성을 (정확히 소외에 대응되는 방식으로) 구성하는지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대안제시가 된다.
  


진정한 유대인

(2:) 27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8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라

여기서 기자가 마치 단순히 ‘진정한 율법의 정신’에 도달하자는 본질주의적 해석의 지점으로 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 아버지가 더 이상 아버지―――법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믿음의 본질은 ‘법의 본질’과 무관하다. 하나님은 법에 대해 외재적이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믿음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이다. 복종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죄……

(3:)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전반과 후반 사이에 우리는 묘한 단절을 발견하게 된다. 즉 ‘죄’에 대한 이해의 전환을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이 반전이 무척 흥미로운데, 첫 부분에서는 죄가 단순히 절대자 앞에 놓인 우리의 유한한 이기적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던 것이, 19절에 이르러서는 죄가 절대자 자신이 입법한 율법 자체에 내속적인 것으로 옮겨 해석된다. 즉 죄는 율법을 통해 매개되는 것으로서(롬 7: 12~13,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느니라), 결국 이를 따라가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 중’ 죄인 아닌 자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전에 보았듯이 문제는 유대교적 율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 아래 있는 자에게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러니 정말로 의인이란 ‘하나도’ 없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죄’란 단순히 어떤 벌거숭이 남자가 과실을 먹음으로써 생기는, 존재론적 죄는 아니다. 관련된 구절을 보라(롬 5: 12~13,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서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이는 혁명적인 발상이다).’ 오히려 죄가 율법에 의해 '대자적'으로 실현됨으로써 율법 이전에도 죄가 즉자적으로 존재했던 게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율법이라는 가늠자를 통해 그 동일성이 인지됨으로써(죄를 죄로 여기는 확인작업), 오히려 우리가 율법 이전의 원초적인 신화적 죄(굳이 확인절차가 필요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존재론적 죄)를 사후-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죄’란 법의 응시 하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주체에게 있어서, 불가피한 소외의 결과이다. 죄 자체를 규정하는 법을 경유함으로써, 도리어 우리가 죄에 대한 은밀한 소망을 가지게 되어버린다는 역설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 법은 그런 인간의 연약함에 대하여 피도 눈물도 모르는 냉혹함을 보여준다. 결국 법이라는 행위수행적 언어는 언제나 인간적 차원에서 벗어나 있다. 가령 법이 불러일으키는 은밀한 욕망과 죄책감은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명령’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없게 만든다. 법은 명령하되 실은 그 누구도 명령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때그때 누군가 명령하는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지만, 그러하더라도 명령 자체는 명령하는 자신을 다시 구속하는, 죄책감의 악순환을 함축한다[법을 더욱 잘 지키려는 사람일수록 더 강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역설!]. 칸트 역시 도덕적 정언명령을 Categorical하다고 말했을 때 법의 유사한 자족적 본성을 간파한 것이다.  설사 어쩌다가 법관으로서, 사제로서, 그 위치에 서 있더라도 그 명령이 다시 죄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 회귀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법은 개별 주체의 도덕성과 행동양식을 초과하는 ‘괴물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법은 모두의 머리 위에 있고, 법 앞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무죄일 수 없다. 그러한 법에 도달할 수 없는 소외된 인간은 결국 사드의 소설에서 보이듯이 누구든 법 앞에서 메스꺼운 육체로 환원되지 않을 수 없다(실제로 사드의 소설을 연상시킬 정도로 ‘육체’의 모티프가 기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이는 오히려 법이 완전하지 않음을 방증한다. 누구도 보편적으로 법 앞에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모두가 죄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죄악감을 불러일으키는 법 자신은 그러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다. 법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자신에 대해서 ‘예외’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법을 죄의 근원으로 지목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법이 그 이면의 외설적-도착적 초자아로 분열되는 양상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믿음

(3:)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결국 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요약된다. 실제로 사드의 [소돔 120일]에서, 왜 성적 가해자들(여기서 이들을 율법의 외설적 이면에 비견할 수 있겠다)은, 감금된 소년과 소녀들이 종교적 믿음의 행위를 표하는 것에 그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더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에 앞서 미리 소개한, 법의 분열 양상에 대해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법은 하나의 악순환을 표식하는데, 전면에서 엄숙하게 간음을 ‘금지’하는 이면에서 법은 끊임없이, ‘하지만 사실은 네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지? 네가 얼마나 그것을 참을 수 있을까? 결국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그 생각뿐이지 않니?’라는, 외설적 형태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법 자체의 향락인 동시에 법과 욕망의 악순환적 공모관계인 것이다. 천년도 더 지나서야, 사드는 그러한 진실을 포착해서, 법에 대한 외설적 위반 자체를 율법으로서 입법하는 도착적 모습을 통해서, 법의 권위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반어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반면에, 사도 바울은 마치 이를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믿음’이라는 해결책으로 앞서 사드에게 응수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의롭다’ 인정받는 것은, 간음의 위반 자체를 바랬는지의 여부에 스스로 끊임없이 괴롭힘을 받는 율법적 차원에서 ‘초월’할 수 있는 ‘믿음’에 의해 보증된다. 그러나 초월자에 의한 보증은 지극히 내재적인 지평에서 실현된다.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곧 삼위일체 성령 공동체에 대한 믿음, 혹은 신앙인으로서 의로움을 입은 그 자신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런 내재적인 충직함을 통해 모든 창백한 죄의식에서 절연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혹은 이를 정치적으로 번역해 볼 수 있겠다. 자본주의 자체의 불의한 모습에 대한 비판은 실은 율법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자체의 죄적 본성과 은밀히 공모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착취'에 대해 비난할 수 있지만 실은 우리 자신부터가 그 착취에 기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혁명에 대한 믿음,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혁명가 자신으로서의 믿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초월적 역사-목적론이나, 역사신학과 절연한, 어디까지나 내재적인 믿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개종에 비견될만한 근본적 변혁 없이는, 아무런 변화도 초래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적 비난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비판 자체를 즐길 위험에 빠질 수 있는데다 나아가 무력한 자신에 대한 비판 또한 즐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마치 믿음이 없었다면, 초월적 법의 가학적 향락을 은근히 ‘즐겼던’ 유대인에 대해 비난을 한 성 바울로도 ‘그들 중의 하나’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내재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믿음은 여하한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단서조항을 바울로부터 배울 수 있겠다.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경우

(4:)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기지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믿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다. 아브라함이 의인으로 여겨짐은 특별히 어떤 선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일하는 자와 삯’의 비유는 의미심장하다. 믿음의 영역이 아닌 율법의 영역에서는, 일하는 자의 삯은 은혜가 아닌 보수로 여겨진다. 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보상을, 법을 위반하는 자에는 처벌을 부과하는 교환의 논리인 것이다. 사실 이것이 딱히 불의하다기 보다는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정상적’인 차원이다. 하지만 믿음은 이런 정상적인 교환의 회로를 교란하는 어떤 혁명적 위반과 더불어 출현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긴다’는 구절은 정상적인 차원을 탈선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가령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건은 오로지 ‘혁명’의 순간에 도래하지 않는가?
일하지 않는 것을 불의로 처벌하지 않는 것은 정상적 자본주의의 회로가 오작동하는 순간뿐이다. 오히려 노동을 거부하고서도, 파업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에 저항하고서도, 부르주아적 율법의 분노로부터 자유로운, 어떠한 ‘의로움’을 입는 '은혜'는 정상적인 사회적 조건을 탈선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사건”과 더불어 부여될 뿐이다. 오로지 자기 자식을 결박시키고 칼을 겨누는(=자기 일터를 폐쇄시키고 농성을 하는) 여하한 혁명적 믿음은 주체의 지식을 초과하는 사건과 더불어 공동 현존한다.
성경에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믿음이 예전부터 미리 존재했던, 그 자신의 인격적 속성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원래 의로웠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게 결코 아니라는 성경적 역설을 제대로 사유해야한다. 그가 믿음으로 의로움을 여김받은 것은 일종의 자기 개발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로지 그의 지식을 초과하는 불합리한 사건에 직면할 때 감행했던 ‘순간적인 선택’ 때문이었다(아들을 제물로 바쳐야하는 사건). 동일한 논리를 우리는 10월 혁명과 볼셰비키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볼셰비키 정당이 이후 급진적 정치의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천재적 안목으로 혁명을 미리 예측하고, 혁명적 당성黨性을 꾸준히 계발해왔기 때문이라는 표준적 서술은 오도적이다. 볼셰비키의 정치적 주체성은 오로지 10월 혁명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출현한 것이다. 물론 10월 혁명의 객관적 사회적 조건들이 자동적으로 자신의 결과물(소비에트 연합)을 산출한 것은 아니다. 그것 자체는 단순히 2월 부르주아 혁명의 결과물로서 성립된 카렌스키 정권의 시점에서는, 그들의 지식을 초과하는 탈선이자, 사회의 유기적 질서를 전복시키는 불필요한 소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건에 충실한 믿음의 시선 속에서만, 그것은 기존의 사회적 순환을 교란시키고서도, ‘의롭다’ 여겨질 수 있는, 은총으로 출현한 것이다. 본디 그것은 다만 불합리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믿음으로서 호명하자, 그것은 그들에게 혁명으로 출현한 것이다. 은총이란 선행하는 실체가 아니라, 항상 믿음의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사건적 위상이라는 역설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또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구원을 가능케 한 근본적 행위들은,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모두 [아브라함과 볼셰비키] 긴급한 상황 속에서 내려진 눈먼 판단이었음은 매우 중요하다.      



아담의 모형으로서의 예수

(5:)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바울은 나아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전복적 독해를 가한다. 즉 죄의 표상으로서의 아담은 구원의 표상으로서의 예수의 ‘모형’인 것이다. 예수는 아담의 반복이다. 하지만 이 둘이 다른 점은, 전자의 경우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두가 죽게 되었지만, 후자의 경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넘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의 모형이라니???
여기서 기자는 기독교에 고유한 시간적 감각을 발휘한다. 즉 전자는 원래부터 후자의 모형이라기보다는, 후자의 도래에 의해 ‘결과적으로’ 그 모형이 되는 것이다. 헤겔적 개념구분을 끌어들이자면, 즉자적으로 아담이 보여준 율법의 분열(=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이 오히려 선악과를 향한 욕망을 불러들이는 분열 양상)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대자적으로 ‘폭로할’ 율법의 진실을 미리 예비한 것이다. 이미 아담이 율법의 ‘실패’로서 체현한 진리를 그리스도께서 재-단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오지 않으셨다면 율법의 진리는 ‘실현’되기는커녕 우리는 그것에 대해 최소한의 개념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이것이 즉자와 대자의 역설이다].
또한 아담이 예수의 모형이라는 테제가 의미심장한 것은, 예수가 후일 선포할 ‘진리’라는 것이 아담의 ‘실패’에 의해 근거지어졌다는(물론 그 근거짓기는 사후적인 근거짓기이다) 점에 있다. 성경적 관점에서, 율법의 체계가 어쨌든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는 사실에 ‘진리가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진리는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율법이 오작동하고 실패하는 파국의 순간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파국의 형태로 도래하는 게 성경적인 관점이다.
이를 정치적으로 번역하자. 자본주의가 어쨌든 망하지 않고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는 사실에 주류 경제학자들은 거짓 ‘진리’를 선포한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 유일무이한 진리란 시장경제의 부수적인 외부효과Externality(환경오염 계층갈등 등등)들에 유연하게 정책적으로 대응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정확히 2천 년 전 바리새인들과 유대 성직자들의 제스처라면 어쩔 텐가(이러한 제스처=“율법에 모순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아. 하지만 어쨌든 몇 천 년 간 잘 굴러오지 않았나? 율법으로 크게 피해 본 사람은 없지 않나? 오히려 율법을 시대에 맞추어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율법학자와 성직자들이 자기절제에 몰두하면 체제는 조화롭게 잘 작동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진리는 자본주의가 오작동하고 지지부진하고 발부리에 걸리는 데에 있지 않은가? 진리는 실증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위상학적인 문제인 것이다. 진리는 공평하지 않다. 진리는 당파적이다. 진리는 언제나 체계의 변동 및 파국의 편에 서 있다.



자유로운 종노릇

(6:)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6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을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니라

우선 사도 바울은 한가지 ‘도착적 견해’에 경계심을 표한다. “우리가 믿음으로써 얻은 ‘은혜’로 말미암아 멋대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인가요?”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면, 우리는 멋대로 간음과 살인과 도둑질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러고도 용서받을 수 있는 건가요?” 믿음이라는 차원을 선포함으로써, 뒷문으로 몰래 율법적인 도착을 불러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여기서 기자는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가능성에 대해 그는 단호히 ‘아니오’라는 제스처로 대답한다. 믿음은 그러한 냉소적-도착적 차원과 절연한다. 그리고 그가 추가하는 제스처는 다음과 같은데, 과거 율법에 종속되었을 때 우리는 죄의 종이었지만, 믿음 아래에서 우리는 의의 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은, 현상에 대한 냉소적 어조의 비판들이 흔히 보이는 어떤 자기만족조차도 부인하는 ‘충실함’을 전제로 한다. 바울이 보기에, 진정한 믿음 속에 거주할 때, 고의적인 ‘죄짓기’의 냉소적 실천과 연결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고의적 죄짓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여전히 ‘율법적’인, 여전히 죄로 가득 찬 율법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일 뿐이다. 모든 도착적 가능성들에 대해서 바울은 영리하게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오. 나는 새 사람이 됐소. 이제 나는 죄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소’라는 식으로 답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죄로부터 해방된 차원은 의에게 종이 됨으로써이다. 곧 Subject Faithful to Truth가 되는 것이다. ‘대의’와 ‘믿음’에 대한 냉소적 거리감은 법 자체에 내속적이기 때문에(가령, 너가 진짜 원하는 것은 이것이니? 라는 식의 사탄의 계략), 그러한 충실함이 결여된 '믿음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닌, 은총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 아닌, 법에 대한 믿음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할 때 바울은 확실히 천재적이다. 그의 식자로서의 커리어도 있었겠지만, 그의 유일무이한 통찰력은 오늘날에까지 유효하다. 그는 이미 법과 언어에 엮여있는 인간 실존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으며, 법과 공모하는 현대적 도착과 냉소주의를 시대를 앞서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단순히 일상적인 차원에서까지 작동하는 법과 이데올로기의 악순환과 분열양상에 대한 전복적 비판을 가한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비판은 여전히 어떤 악순환에 머무르고자 하는 포스트모던한 냉소적 차원에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믿음’ 내지는 ‘진실에의 권리’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한 제스처가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에 대한) 유사-비판가들 혹은 (여전히 죄책감의 율법적 악순환에 사로잡힌) 유사-신학자들로부터, 참된 비판적 지식인이자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도 바울을 구분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요구될 비판적 지식인의 참된 모형을 사도 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비판가의 외양을 취하되 온갖 해괴한 사변들과 지적 유희로,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허용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여전히 특정 사회적 회로 내에서 순환할 수밖에 없다는 현대적 절망을 선포하는 현대적 소피스트들과 결별할 수 있는 동일한 제스처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근본적 변혁에 회의적인, 비판적 지식인들 역시 체제의 동조자들에 지나지 않음을 바울을 빌려 탄핵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견해 한 가지. 본연의 기독교인과 좌파들은 일상적 차원에서 ‘제정신’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을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류들을 경계할 수 있다. (1) 어떤 근본적인 개입 없이도, 일상적 소통과 실천을 경유해서 우리 삶에 커다란 변화를 기할 수 있다는 유사-진보적 믿음들[ex. 하버마스주의자]. (2) 믿음의 공동체를 매개해서, 죄로 난무한 현대 사회로부터 그럭저럭 위로받고 적응해 가고자 하는, 웰빙 기독교인들(‘너희는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주의자들)……. 하지만 본연의 기독교는 바로 그 악한 세대의 중심에 놓여 있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개입으로서 그 고유의 믿음과 진리를 단언하는 것이고, 급진적 정치 역시 그러한 기독교적 제스처를 반복(모방과 다른)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진짜 기독교인과 좌파들은 정상적 회로를 탈선시키는, 기존의 질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의 암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스스로가 자진해서 말이다. 그것들은 그 근본 형식에 있어서, 그 믿음의 형식에 있어서, 일상적 생활 감각과 부조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유기적 질서를 교란시키는 자들이다. 형제와 부모로 하여금 적대하게 만드는 ‘비정상인’들이다.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에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볼셰비키가 2월 혁명 체제에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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