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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rir (essensia78@hotmail.com)



처음부터 대놓고 말하자면, 리뷰를 쓰는 이 시점까지도 필자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후주와 역자 후기와 찾아보기를 포함해서 75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필자가 인문학도인지라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볼 여력이 있을 때에만 조금씩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 읽지 못한 책에 대한 리뷰라는 것은 무척 정직하지 못한 것일 테지만, 이것이 결말에 따라 좋던 인상 모두 구길 수 있는 서사적인 장르도 아니고,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초반을 읽고 얼마 안 되어서였기 때문에 이 부정직한 모험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정직한 데다 책 내용에 대한 소개는 얼마 안 되며, 그나마도 짧은 리뷰가 될 것이니 다 읽고 부디 이 뻔뻔한 필자에게 돌을 던져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이 리뷰를 읽고 어쩌면 필자보다 더 먼저 이 책을 완독하였거나, 이후로 완독하실 분이 있다면 이 책을 고른 데 대해서만큼은 용서하리라 믿는다.

간략하게 이 책을 소개하자면, 제목 그대로 시간과 공간, 우리를 둘러싼 우주에 대한 관념을 연구해온 물리학의 역사를 다룬 역사책이며, 그 흐름을 쉽게 설명한 교양 과학서이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수식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면서 비유와 예를 들어 핵심적인 개념을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림이 꽤 많은 편이다. 저자 브라이언 그린은 자신이 과학자의 길로 완전히 접어들기 전인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한 의문과,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치열한 여정을 잘 버무려 엮었다. 공간이란 무엇인가? 텅 비어 있어도 공간이란 것은 의미가 있는가? 시간은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르나? 와 같은 의문들 말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간과 시간을 아우른 우주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서 알게 된다. 물리학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여 생각한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시작하여, 시공간을 합쳐서 생각한 상대성 원리, 우주에 완전히 고정된 것은 없으며 우주가 확률적인 불확정성의 세계라는 것을 알려 준 양자역학, 그리고 이 쌍두를 조화시키기 위하여 최근에 나온 초끈 이론까지, 인간이 우주에 대하여 조금씩 더 알게 되고, 조금씩 더 전진한 이야기가 쭉 펼쳐진다.
저자인 브라이언 그린은 이중 가장 최근의 이론이자, 서로 모순되는 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을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많은 이론으로 점쳐지는 초끈이론을 자세하게 다룬 [엘리건트 유니버스]로 이미 꽤 유명한 과학자이다. 그러나 사실 이 과학자의 실제 업적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글솜씨 하나만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할 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학문적 성취를 간결하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하며, 흥미가 떨어지지 않게 전개해 가는 솜씨는 웬만한 인문 에세이 뺨친다. 필자가 이 책을 리뷰하고 싶어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이유가 모두 저자의 글솜씨가 큰 영향을 끼쳤다.

첫 번째로는 이 책은 재밌다. 워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가 극심하고, 의외로 취향이 편협한 필자에게도 이 책은 재미있다. 물음을 던지고, 그것을 해결하고, 그런데 이 답에도 문제가 있고, 그 문제는 이렇게 큰 문제이고, 이 문제 때문에 진리처럼 여겨졌던 그 가설은 폐기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가설이 나타나고, 이 가설은 다시 새로운 진리가 되기까지 이러저러한 증명과 과정을 거치고. 별이 뜨고 지는 연예계 같기도 하고, 영원히 잡히지 않는 범인과 경찰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이러한 재미는 다음의 이유와 연관이 되어 필자에겐 더욱 깊은 재미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 두 번째 이유란 이 책을 보고 최신 물리학과 과학 전반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잘못된 인상이 다시 희미해졌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필자는 인문학도이고, 수학은 젬병이다. 과학 성적은 50점을 넘으면 잘 나온 거였다. 이과생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말 어쩜 이렇게 사고 구조가 다를까 싶을 때가 많다. 매력을 느끼는 단어, 재미있다고 느끼는 지점조차도 문과생과 이과생은 참 많이 다르다. 기저에 깔린 논리 구조, 사고구조가 다르기 때문인가 보다. 그래서 과학과 필자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어렵고 이해할 수 없고 실생활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 것이라고, 또는 반대로 실생활에밖에는 쓸모가 없는 거라고. 여기에는 소위 ‘뜨는 분야’라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오만을 불식시켜 주었다. 가장 큰 오만이었던 과학의 지나친 실용성과 미시성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켜 주었다. 과학은, 어려운 수식과 쓸데없이 높은 장벽과 이해하기 힘들게 너무나 전문적인 분화로 지금은 희미하고 징그럽게 거대하지만, 그저 엄밀한 하나의 학문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것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그 의문을 풀고, 답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피나는 여정이라는 것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담담한 이야기로 보여 주었다. 또한 과학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최신 물리학의 쟁점에서 가장 인상 깊게 기억나는 것이, 최신 물리학이 알려주는 사실 중 하나는, 인간이 우주에서 정말로 작은 부분만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학문이든 어떤 지식이든 깊어질수록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길까 하고 괜히 비약해서 생각해 볼 만큼 그것이 그렇게 인상에 남았다. 이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에 접근하고 과학을 휘두르는 도구는 필자가 그렇게도 약한 수학이기 때문에 여전히 과학적인 상식의 폭을 넓히려면 험난한 길이 예상되지만, 앞에서 말한 당연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바로 시작이 반인 한걸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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