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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밤 너머에

2007.10.27 13:5510.27





mh_bae@hotmail.com

거울 중단편선 <밤 너머에>
다행히 중단편선 <밤 너머에>는 의외로 잘 읽힌다. 글을 배치한 순서 때문이기도 하고, 이 작가의 문장 자체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니터가 아니라 책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도대체 이 이야기의 원형이 뭐야?’
많은 사람들이 jxk160의 글을 읽고 이런 불만을 호소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뭔 소리야?’ 그 스트레스는 결국 읽기를 포기하게 만들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아무리 뜯어 봐도 jxk160의 문장은 읽기 어려운 문장이 아니다. 읽기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왜 글이 안 읽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것은, jxk160의 이야기들은 좀처럼 원형(原形)을 찾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거울 편집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울이 <밤 너머에>를 출간한 것은 일종의 희생이다. 거울이라는 브랜드 전체의 이미지를 ‘안 읽히는 책’으로 바꿔버릴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거울은 그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책을 출간한 것일까? 그것은 이 작가야말로 거울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10년 후, 20년 후, 이 작가는 거울의 수많은 대표 작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된다(편집장 후기 참조).

무슨 근거로?
그 근거가 바로 신화 DIY다. jxk160의 이야기를 세 번쯤 읽고 나서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지를 깨달았다는 사람들에게 ‘그래, 무슨 이야기였어요?’ 하고 물으면 그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말로는 잘 표현을 못하겠어요.’ 그렇다. 우리는 jxk의 이야기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이야기들의 원형이나 플롯을 깔끔하게 집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집어낼 수 없는 데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공을 좀 들이면, 원형이나 플롯 모두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결국은 그 글에 담긴 미학을 읽어내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 문제다. 무슨 이야기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데 뭐가 좋은지는 알겠다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감히 이런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작가는 자기 글에 쓸 원형을 스스로 만들어버린 게 아닐까. 좀 더 나아가서 우리가 소설이라고 믿고 있는 이 텍스트가 사실은 어떤 원형 자체가 아닐까.

신화 DIY 가설
필요한 신화를 직접 만들어 쓴다는 의미의 ‘신화 DIY’라는 표현은 중편 <밤 너머에>에 등장하는 카잔키키르와 나쿠드 신에 관한 신화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카잔키키르와 나쿠드 신화 같은 류의 신화를 스스로 만들어 쓸 수 있는 사람은 많다. jxk160의 신화 DIY능력이 겨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었다면 나는 그런 표현을 이 책의 홍보 문구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신화’는 이야기들의 어머니라는 의미의 신화다. 이야기들의 어머니, 그 이야기의 어머니, 그 이야기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렇게 수십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언젠가는 다른 어떤 이야기도 베끼지 않은 최초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대단히 많다.
신데렐라 스토리, 아침 드라마 스토리, 콩쥐팥쥐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 삼각관계, 연상연하 이야기, 고부갈등 등등.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유전자를 빤히 드러낸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줄거리가 쉽게 요약되는 이야기일수록 좋은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이야기구나.’ 하고 간결하게 요약되는 이야기일수록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읽기가 편하다. 사실 독자는 그 이야기의 궁극적인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알아낼 때까지 긴장 상태를 풀지 못한다. 그래서 이야기의 디테일을 느긋하게 즐길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jxk160의 글을 읽을 때 느껴지는 스트레스의 정체다. 이야기의 원형을 알 수 없으니까 플롯을 이해하기가 힘들고, 플롯이 이해가 안 되니까 세세한 장면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바로 이 점이 지금까지 알려진 jxk160 작품들의 단점이다. 독자로서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단점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그 무한한 가능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20년이 지나면 이 작가의 이야기를 어머니로 둔 이야기들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어머니로 둔 이야기, 또 그 이야기를 어머니로 둔 이야기도. 원형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누가 원형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어떻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다만, 이 가설에 대한 검증이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신화의 구조: ‘세상-신체-자아’의 관계에 의한 해부
jxk160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상은 규모가 작다. <밤 너머에>, <별>, <왕의 귀환>, <날개의 피> 등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이 세상의 크기를 도시 규모로 제한하고 있다. 작가가 책임지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범위만큼 세상을 뚝 떼어내 버린 셈이다. 사실 많은 신화가 처음에는 온 세상 혹은 온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놓고 실제로는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jxk160의 세상은 그보다 더 작다.
이 설정의 효과는 주인공 캐릭터의 현실성에서 나타난다. 주인공(영웅)들은 다른 신화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 혹은 그 근처까지 가 있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능력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 세상과 자아 사이에서 신체는 이 둘을 어떻게 매개하고 있을까? 사실 jxk160의 글에서 신체는 이 둘 사이를 되도록 매개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작가는 주인공의 정신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되도록이면 육체노동이 아니라 정신노동에 의한 것이기를 바라는 눈치다. 신체에 가해지는 사소한 폭력마저 중대한 범죄로 간주되어 배제되거나(밤 너머에), 세상에 대한 설계도를 가진 자아와 그 설계도를 현실화하는 육체노동자를 완전히 분리하기도 한다(왕의 귀환). 자아와 세계가 직접 연결되는 관계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신화의 전개: 시간의 개입
하지만 세상과 신체와 자아의 관계는 변화를 맞는다. <별>은 자아 개념은 희미하며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계층과,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멀고 주로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계층이 구분되어 있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엥겔(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과 비슷하지만)을 고뇌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jxk160의 비좁고 단조로운 세계를 두 개로 분리시킨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의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날개의 피). <별>에서는 세계자체가 아예 노골적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 두 구역은 각각 아이들의 공간과 어른들의 공간으로 갈린다. 그런데 이 구분은 공간 구분인 동시에 시간 구분이기도 하다. 아이와 어른의 공간이니까.
이 이전과 이후 공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후의 세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과 자아의 직접 연결이 특징인 곳이다. 반면 이전의 세계는 세상과 신체가 직접 연결(노동, 식인)되어 있는 대신에, 자아는 배제되어 있는 단계이다. 작가는 이 둘 중 이후의 세상을 훨씬 우월한 세상으로 보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육체가 배제된 세상에 안주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후의 세계에 앉아서 이전 세계를 기억한다. 그리고 기록한다. 주인공들은 이후 세계가 훨씬 나은 세계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 세계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한다.
세계와 자아가 직접 연결되어 있으므로,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결코 그 둘 사이에서 소모되지 않을 완전한 육체를 버리고, 서서히 소모되어 가는 불안한 육체를 얻는 과정. 그래서 세상과 자아 사이가 불안정한 신체에 의해 매개되는 과정. 그러니까 jxk160의 이야기는 정신의 고양이나 세상의 한계에 도달하는 인간의 위대함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어정쩡하기 그지없는 몸을 얻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밤 너머에, 별).
그 결과물은 어떨까? 이 글만 읽으면 참 구질구질한 신화도 다 있다 싶겠지만, 실제로는 꽤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주인공이 비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라서 세밀한 부분들이 다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이 작가의 문장이 읽기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글들이 그렇다는 뜻이다. 책이 절반을 넘어가면 jxk160의 신화는 이미 변주를 시작한다.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육체에 붙은 별 볼일 없는 ‘날개’를, 그 변주를 독자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날개의 피).

변주
또 하나의 변주로 <에덴의 나무>를 연습문제삼아 풀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 왜 이 글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는지 느껴보기를 바란다. 퍼즐이 풀리고 나면 대단히 멋진 장면이 머릿속에 펼쳐지는 글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퍼즐의 정체는 도대체가 말로 설명이 안 된다. 원형이니까. 그러니 마음을 충분히 연 다음에 읽기를 권한다. 키워드는 똑같다. 시간, 그리고 시간으로 나뉘는 두개의 세상, 자아, 몸.
<인용>은 연습문제로 권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서는 자아와 세상의 관계가 다른 어떤 글들보다 더 가까워지다가, 결국 밀도와 온도가 너무 높아져버린 별처럼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육체가 파편처럼 튀어나간다. 이야기들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렇게 거침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할 때 독자는 플롯을 놓치고 원형을 놓치고 이렇게 투덜댄다. ‘이건 또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도 작가의 문장은 얄밉게도 멀쩡하다. 자기는 정답을 알고 있다는 소리다. 자기가 뭘 쓰고 있는지 알고 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래서 하는 말이다. 정답이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지만,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화 DIY 가설에 대한 검증이 끝나지 않았으니 아직은 좀 더 살려 둬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일단은 급한 대로 책이나 구해다 읽어 보자. 많이도 안 찍었단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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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07.10.27 20:56 댓글 수정 삭제
    우와... 감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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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0.28 22:20 댓글 수정 삭제
    약은 약사에게 감탄은 작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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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t 07.11.14 23:27 댓글 수정 삭제
    오. 저도 시간/신체 코드로 주로 읽었어요. 하지만 명훈님이 신체 개념을 먼저 놓으신(제가 명훈님의 리뷰를 잘못/혹은 미묘하게 다르게 읽었을 수도 있지만) 것과는 달리 이 글들에서 저는 시간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신체가 등장하게 되는 거라고 읽었네요.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생각해보니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고... 갸우뚱...

    여하튼...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덧붙여, 아무리 폼을 잡아도 저는 이 작자作者는 사실 심장부는 로맨티스트라는 설을 감히 제시해봅니다, 후후후. 날을 세워야 했던 부분들이 적당히 에둘러가거나 감정적 고조에 따라서 화해되는 부분들이 좀 보입니다. 특히 그런 부분들이... 흠... 전개까지는 생각해 둔 설정에 맞추면서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이야기를 전개해가지만, 클라이막스에서는 가능한 감정적인 완급에 이야기를 내어주어버린다는 느낌입니다. 글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빠져나오지 못하는 로맨티시즘같은 것이 있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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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1.16 10:25 댓글 수정 삭제
    저는 자아-신체-세계의 관계로부터 들어가다가 시간이라는 걸 발견한 거니까, 시간-신체로부터 들어가도 같은 걸 보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선후관계가 중요할지는 모르겠어요. 작가는 시간과 분리가 잘 안 되는 신체-세계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니까.
    심장부가 로맨티스트라는 설은,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세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랄까. 어디에서 날이 안 서고 뭉개지는지 감이 잘 안 와서... 작가도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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