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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HAPPY@paran.com> 여는 말
필자는 오래 전부터 리뷰라는 원고에 있어서는 바람도 잡을 겸, 자기 방어도 해둘 겸하여 이러저러한 ‘여는 말’을 한참이고 써내려 가는 버릇이 있다. 사실 지금도 이 원고를 쓰게 된 연유부터 구구절절 하게 늘어놓고 마지막에 “내 덜 떨어진 지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리뷰 따위 쓰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지만, 이 리뷰 원고를 내 인생 최후의 리뷰 원고로 삼으리라는 다짐을 굳게 맹세한 기념으로 여는 말을 이만 줄이고자 한다. 돌아보면 참 즐겁고도 슬픈 리뷰의 역사였다.

> 간단한 리뷰 안내
리뷰 대상은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에서 나온 [누군가를 만났어]이며, [누군가를 만났어]는 배 명훈, 김 보영, 박 애진―――세 명의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정가 12,000원의 단편집이다.
리뷰 내역은 각 작가들의 작품 전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개별 단편에 대한 리뷰는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이 줄을 타이핑하고 있는 현재의 심경이며, 쓰다 보면 다룰 수도 있다).
기타 부수적인 내용이 매우 즉흥적으로 추가 되거나, 삭제될 수 있다. 또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가 별로 접근하는 방법이 다를 수도 있다.
끝으로 어차피 인생 최후의 리뷰 원고라, 자율 규제 및 예의 차리기와 같은 귀찮은 프로세스를 건너 뛸 예정이기 때문에 일부 표현과 말투가 매우 거슬릴 수 있다. 정히 언짢으실 경우에는 “오독에도 정도가 있다”―――와 같은 악플을 달아도 무방하다. 이 나이씩이나 먹고 자기가 쓴 글에 책임 회피를 하려고 들 만큼 멍청하진 않으니까.

> 리뷰: 작가 배 명훈의 단편이 지니는 장점과 매력
작가 배 명훈은 프로다. 지극히 프로다운 문장과 구성이 모든 글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장점이 그의 모든 단편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해당 단편집의 간판으로 나설 수 있을 만큼, 단편집에 참여한 작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필력을 자랑한다. 진부한 표현을 아끼지 않고 말하자면―――근본적으로 기본이 잘 잡혀 있다고 할까.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근두근 거리면서 읽게 만드는 완급 조절 능력도 매우 뛰어나다.

그러나 작가 배 명훈의 가장 큰 장점은 그 기본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상상의 재기 발랄함에 있다. 사실 재기 발랄하다고 하기 보다는 ‘능글맞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정말이지 이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라고 말을 걸어온다면, 약속이 있더라도 지각할 망정 이야기는 꼭 듣고 가고 싶게끔 만든다고 할까. 솔직히 이 리뷰를 위해 책을 후닥닥 읽으려다 ‘이렇게 재미 있으면 꼼꼼하게 읽게 되잖아, 젠장’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 재기 발랄하면서도 능글맞은 상상의 매력이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재기 발랄하면서도 능글맞은 상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 배 명훈의 단편들은 필자에게 여러모로 흑인 음악계의 천재 프로듀서 Pharrel를 상기시킨다. Pharrel는 정말이지 ‘이게 음악이 돼?’라고 질문하고 싶을 만큼 유별나게 독특한 비트를 만들었고, 그 비트가 일반 대중을 단숨에 사로잡으면서 천재 프로듀서로 거듭났는데―――작가 배 명훈의 단편들을 읽고 있으면, 바로 그 Pharrel의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주변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누구라도 편하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즐거운 상상이 읽는 내내 사람을 빠져들게 만든다.

결국 작가 배 명훈은 ‘프로다운’ 기본기에 ‘능글맞은’ 완급 조절 능력을 갖추고, 독특하면서도 대중성을 갖춘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데―――이렇게 되면, 대형 작가 한 사람이 탄생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작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그 작가의 글을 거의 실시간으로 읽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르 혹은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누군가와 동시대를 살아보는 경험- 정말 즐겁지 않은가.

> 리뷰: 작가 배 명훈의 단편 성향
작가 배 명훈의 단편들은 대개 템포가 짧다. 즉 한 장소와 한 인물에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필자는 혼자서 ‘서술 패닝(영화의 카메라 패닝을 소설에 적용시켜 부르는 필자의 개인 용어)’이라고 부르는데,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이리저리 이동해가며 이야기를 점차 진행시키고, 또 고조 시켜가는 기법이 아주 교묘하고 능숙하다.
따라서 한 장소나 한 인물에 대한 ‘집중’이나 ‘깊이’는 그다지 기대할 수는 없는데―――아마도 요즘 스타일이라고 부르며, 집중력 혹은 인내심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린 요즘 사람들에게는 딱 좋은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점이 프로답다.

> 리뷰: 작가 배 명훈의 단편 관련 이모저모
특히 첫 번째 단편인 {이웃집 신화}는 이런 ‘요즘 스타일의 서술 패닝’이 원활한 이동과 능글맞은 완급 조절과 재기 발랄하면서도 엉큼한 상상력이 거의 완벽하게 맞물린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훌륭한 단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표제를 장식한 [누군가를 만났어]는 인물 간의 이동이 아닌 현실과 편지 사이의 서술 패닝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고, 따라서 작품의 매력이나 흡인력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따라서 이야기 내용이나 결론이 매우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아’ 혹은 ‘오’ 하는 감탄사를 자아내지는 못했다.
마지막 단편 {서가 355}는 재미와 매력은 있지만, 이야기 구성과 완성 면에 있어서는 타 단편에 비해 현저히 낮다. 가볍게 마무리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책 구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는 제외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또 이야기 하겠지만, 이 {서가 355} 단편은 책 구성에 있어 테러범과 같은 존재다.
마지막으로―――가만히 보면 ‘서술 패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단편과 그렇지 않은 단편의 매력 차이가 꽤 있는 편이기도 하다.



> 리뷰: 작가 김 보영 섹션으로 들어서기
한껏 진부하게 표현하자면, 작가 김 보영은 진중하고, 또 꼼꼼하고, 고색창연하다. 나만 알고 남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비유를 하자면, ‘포르투갈 여행 갔을 때 본 햇살이 스며드는 교회의 회랑’같은 고색창연함을 활자로 다시 느낄 수가 있다.
필자가 그 쪽에 근본이 없는 탓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에게 SF라는 장르는 되려 ‘오래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좀 더 나아가서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각이나 관념 혹은 기술 설정에 대한 설명이지만, 남들이 쉽게 알아먹도록 굳이 대중적인 소설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그 무언가’라는 고정관념도 마음 한 켠 깊숙한 곳에 잘 보관해두고 있다. 더불어서 어느 정도 ‘사실 네가 읽고 못 알아먹어도 별 상관은 없어. 다 그렇지, 뭐.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야’ 같은 초연함이랄까, 배타성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아무튼―――작가 김 보영의 단편은 위에 열거한 내 고정관념들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배타성은 제외하고). SF 장르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슴에 끌어안고서 ‘SF! SF! SF다!’ 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 것 같을 만큼이나 SF다. 아마도 아무 생각 없이 읽던 독자도 작가 김 보영의 단편이 시작될 무렵에는 ‘아, 맞다. 이거 SF 단편집이었지’ 하고 새삼스레 생각할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작가 김 보영은 퉁명스럽거나 배타적인 작가는 아니다. 이를테면, 비록 ‘회귀 분석’ 강의지만, 정성껏 정말 정성껏 자상하게 강의를 진행하시는 교수님 같다고나 할까. 어렵지 않아, 회귀 분석은 조금만 하면 너무나 재미있는 학문이란다―――하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중편에 가까운 분량의 단편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작가 김 보영의 단편들이 ‘어렵다’거나 ‘SF에 관심 없으면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SF 문학이 그렇게 어렵고 재미가 없었으면, 세상에 남아 있을 리도 없고, SF 팬들 용어로 ‘출판사 낚시(*1)’도 어림없는 이야기일 테니까.

> 리뷰: 작가 김 보영의 단편들
단편집에 실린 작가 김 보영의 단편들은 매우 정직한 코스를 밟는다. 생소한 것으로 주목을 끌고, 그 다음에 약간의 위트(개그가 아니다)로 ‘어렵지 않아, 즐겁게 풀어갈 거야’라고 선언한 뒤, 어느 정도 이야기를 이끌어 간 뒤에는 속도를 붙여 작가의 소재를 설명하고, 무난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2). 결국 비중으로 따지면 소재의 비중이 이야기의 비중을 넘어서는 전형적인 SF 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 김 보영의 특징은 무엇보다 두 주먹을 불끈 쥔 것 같은 끈질긴 자상함(*3)이다.

이를테면, 그래도 이야기의 풍취를 제법 느낄 수 있는(정확히는 소재가 이야기 속에 어느 정도 녹아들어 있는) {종의 기원}에서는 속도를 늦추거나, 사이 사이에 인물(로봇이지만)에 포커스를 맞추어 주는 등의 기법 등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요점 정리처럼 단락마다 붙어 나오는 {문서 인용}은 줄기차게 소재를 다각도로 표현한다.
또한 {종의 기원}은 등장 인물 자체가 소재가 되면서, 등장 인물을 통한 소재의 전달 방식을 통하여 소재 자체가 이야기에 밀착되어 있는 특이한 SF 단편이기도 하다. 소재와 이야기가 미묘한 줄다리기를 타며 흘러가는 모습이 매우 즐겁지만, ‘전달’이라는 역할이 신경이 쓰였는지 지나치게 이어지는 ‘문서 인용’은 조금 군더더기 같은 느낌이 없잖아 있다. 이미 이야기로 반복 전달되는 내용도 없잖아 있었고, 분위기를 잡아주기에는 지나치게 잦고 분산 되어있다.

무려 4연작에 해당하는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소재가 이야기를 꾸려가는 전형적이고도 즐거운 SF적 사유(思惟)의 장이다. 이론과 가정과 예상, 그리고 미래와 과거의 엇갈림이 장황하게 흐르는 기, 기에서 슬쩍 흘러나온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 류의 발언을 발췌하듯이 담담하게 옮겨놓은 승, 그리고 승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에키온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며 새로운 경험을 애절한 빛의 향연으로 펼치는 전, 마지막으로 어쩐지 타협처럼 보이긴 해도 장중하면서 적절한 마무리를 이끌어내는 합까지―――뇌를 자극하는 시간이 흐른다.
다만 기승전합의 이야기 밀도가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에 연결해서 죽 읽기에는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흐름 중에서 가장 튀는 것은 ‘승’인데, 이야기 밀도가 다른 이야기들에 비하여 꽤 짙은 편이고, 사유 보다는 현상 전달 쪽으로 무게가 기울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회가 된다면, 1인칭으로 다시 이룩된 {미래로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기도 한데, 넘쳐 흐르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사유의 물결에 질리도록 압도되는 감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4)

> 리뷰: 작가 김 보영의 단편 관련 이모저모.
매우 정직하고, 무게 있는 작가 김 보영의 단편 직전에 꽤 가벼운 터치로 이루어진 작가 배 명훈의 {서가355}를 배치한 것은 단편집 전체 구성 측면에서 보자면, 좀 테러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한 수습 사원에게 회사 비장의 프로젝트 업무를 얻어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작가 배 명훈 섹션을 닫기에는 식후의 샤베트처럼 깔끔했을지언정, 작가 김 보영 섹션을 열기에는 너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놓았다. 그나마 {종의 기원}이 첫 단편이고, {종의 기원} 앞에 흥미로운 분위기와 위트가 포진되어 있었으니 다행이지만.

이왕 우주적인 단편을 둔 김에 우주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작가 배 명훈의 단편이 인류의 생존과 관련되어 매우 직접적이자 흥미로운 대상인 ‘화성’이라면―――작가 김 보영의 단편들은 파고드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있어 죽을 지경인 ‘토성’에 가깝다.(*5).

작가 김 보영의 단편들은 그렇게 좀 더 확실한 장르 성향을 지니고 있고, 망원경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제대로 맛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곤란해하거나 망설일 필요는 없다. 독자는 단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기만 한다면, 환상적인 우주를 담은 작가 김 보영의 단편이 독자를 단숨에 로봇의 연구실에서 우주의 끝과 환생의 순간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이다.



> 리뷰: 작가 박 애진 섹션으로 들어서기
핼리 혜성―――앞서 작가 배 명훈과 김 보영을 화성과 토성에 비유했다면, 작가 박 애진은 가끔씩 찾아오는 핼리 혜성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글이 가끔 하나씩 공개되는 면이 닮았고, 나타날 때마다 학설을 조금씩 바꿔 놓는 핼리 혜성처럼 글이 공개됨에 따라 궤적은 같더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면을 보여주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단편집 [누군가를 만났어]는 그런 작가 박 애진의 중요한 궤적을 모아서 담고 있는 출판물이라는 점에 있어서 팬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한 권이 될 것 같다.

아무튼―――독자들이 작가 배 명훈을 통하여 탄성이 터져 나오는 즐거운 상상을 즐기고, 작가 김 보영을 통하여 시공을 아우르는 사유를 느꼈다면, 이제는 작가 박 애진을 통하여 사람을 통감할 차례다. 영혼과 피, 양 방면으로 빠짐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말이다.

> 리뷰: 작가 박 애진의 단편 세계
작가 박 애진의 단편은 앞의 두 작가와는 다른 장르, 즉 환상에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당한 환상과 날 선 비유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는데―――지금껏 대중에게 공개된 바에 의지하자면 대부분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를테면, 교감이나 이해, 성 혹은 성장통 같은 것 말이다.

작가 박 애진의 단편들은 그 소재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대개 과장된 비유와 편향된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로 인하여 이야기는 좀 더 명확해지고, 확실한 방향성을 가진다. 그리고는 그 힘에 가속도를 받아 파국으로 치닫고, 운이 나쁘면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운이 좋으면 벼랑 끝에 매달린다. 피아노 곡으로 치자면 Rubenstein의 Etude in C Op2. Nov 2. Staccato에 필적할 만큼 격정적이면서도 애절하면서도 치밀한 계산에 따라 흘러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 박 애진은 대부분 극단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주제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 방법론을 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보다 충격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런 방법을 통하여 좀 더 순수해지고 숨김없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위하여 서릿발처럼 직선적으로 그리고 파괴적으로 가혹한 상황을 풀어헤쳐 놓는다. 독자의 눈앞에 방금 뽑아낸 심장을 “이것 봐” 하고 불쑥 내미는 것처럼 말이다.

극단이 곧잘 유치해지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작가 박 애진이 들이미는 피투성이 심장은 극단의 첨단을 달리면서도 유치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순수하고 숨김없이 스스로 제기한 문제를 향해 달려들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그 문제에 뛰어드는 과정에서 작가 박 애진은 어느 경우에도 피와 영혼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움켜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몸과 영혼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관념인 것도 같은데―――이런 현상은 대체물(인형)이나 그에 준하는 것(수명)등을 통해서도 늘 작품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피와 영혼이 동시에 파국으로 치닫지만, 작가 박 애진이 내놓는 결론은 한층 더 가혹하다. 필자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박 애진 단편을 관통하는 ‘피와 영혼을 제물로 나아가는 관계 연구’에 웃음이 감도는 것은 본적이 없다. 고통과 고통을 수반하여 도달하는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 체념 혹은 외면이 대부분이다. 결론의 수위가 많이 낮아진 단편 {선물}의 끝은 체념과 외면의 어느 경계선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 언저리에 머무는 가장 큰 이유는 작가 박 애진이 그 경계선 너머를 어떤 방식으로든 성큼 넘어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그녀는 아직 피와 영혼을 제물로 진행하는 이 관계 연구의 끝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여러 번이나 거칠고 거칠게 부딪히거나(대부분) 또는 자학하면서({네므}) 답을 찾고, 그리고 처연하게 기대어 쓰러지면서({선물}) 답을 찾으려 했지만―――최근 처연했던 시도의 반작용처럼 올라온 그녀의 새 단편 {갈증}(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여전히 마지막에 놓인 벽을 뚫고 나가지는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마음 편한 결론은 ‘인생 다 그렇지’ 혹은 ‘과정이 바로 해답이다’랄 수 있는데, 작가 박 애진의 행보는 그를 용납하지 않고 계속해서 온몸과 마음을 다해 벽을 두드리고 긁고 밀고 있는 것 같다. 그 지극히 인간다운 노력의 끝에 과연 어떤 해답이 기다리고 있을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 리뷰: 작가 박 애진의 단편 관련 이모저모
작가 박 애진의 꾸준한 관계 실험 결과물 중에서도 가장 나중 실험에 속하는 {선물}이 가장 처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자로서의 상상을 이리저리 불러일으키도록 작용한다는 점에서 즐겁다. 이를테면, 필자 개인으로서는 단편 하나하나가 실은 정말 실험이어서, 단편은 실험 보고서이고 책상에 쌓아둘 경우에는 항상 최신 보고서가 맨 위에 놓이는 것과 비슷하다―――라는 망상도 할 수가 있다. 아래쪽이야 그 동안 보고 말고 하느라 뒤섞일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6)



> 맺음말
말이 많으면 무식함이 들통난다. 따라서 더 이상 딱히 할 말은 없다. 결론만 다시 정리하자면―――신기한 세계도 있고, 로봇과 우주도 있고, 질퍽한 사람도 있으니, 있어야 할 건 다 있는 셈이다. 대형 서점도 많고,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도 손쉽게 구매할 수 있으니, 좋은 세상이다. 누릴 수 있는 건 누려두자.

p.s 이 원고를 내게 맡기면 누구 보여주기 민망할 정도의 용비어찬가를 불러버리겠다―――고 했으나, 쓰려니 민망해서 쓸 수가 없었다. 신문 기자로서의 재능은 없는가 보다. 아, 이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결론이구나.

*1> 전설에 따르면, SF 팬들이 자신들이 책으로 갖고 싶은 SF 책을 골라 순진한 출판사에게 히트작이 될 수 있다고 꼬신 다음, 책을 정식으로 번역 출판시켜 자신들끼리 즐거이 소장한다던가. 그래서 출판된 그 책의 소비량은 적게는 50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데―――필자로서는 그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 단순한, 그리고 근거 없는 도시전설이라고 생각하자. 아마 그 편이 모두를 위해 좋으리라.

*2> 필자의 편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좋다던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똑같은 구성과 밀도(혹은 비중) 비율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약간 더 스타일리쉬하거나, 혹은 더 뻔뻔했지만.

*3> {종의 기원}에서 벤더―――아니, 이반의 친절한 강의나 교수님들의 설정 해설과 같은 이야기적 표현 + 문서 인용 등의 과도한 전달 노력. {미래로 가는 사람들} ‘기’ 편에 등장한 친절한 셀레네 교수님의 자상한 강의……. 그리고 강의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혹은 작가 자신이 불안했었는지―――괄호 사이를 빌어 튀어 나오고 말았던 작가 김 보영의 세심하고 긴 육성 등.

*4> 이루어질 리는 없겠지만, 1인칭으로 ‘전’의 결말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가?

*5> 토성도 흥미롭고 다들 많이 알고 있지 않아? 하고 의아해하는 당신에게 질문. 목성과 토성이 지닌 고리의 차이점은? 그 고리와 보이저 호 사이의 에피소드 혹은 고리에 얽힌 에피소드를 아무 거나 하나 이야기해보시오. 슈메이커―――레비와 연관이 있는 행성은 둘 중 어느 별? 두 별 중에 지구에 가까운 별은? 두 별 중에 인류에 의해 오염된 별은? 답을 달아봅시다. :D

*6> 실은 작가 박 애진이 곧잘 보여주는 꽤 성적인 피와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금 논의해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점점 책과는 멀어지는 것 같아서 이쯤에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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