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pilza2.compilza2@gmail.com

1. 고딕 소설의 최고봉

“Somnia, terrores magicos, miracula, sagas, Nocturnos lemures, portentaque.”
(꿈, 마법의 위협, 강대한 주술, 마녀, 그리고 한밤중에 돌아다니는 유령.)
―――Horat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 중 하나이며, 본서의 첫 부분에 인용된 이 구절이야말로 고딕 소설(Gothic novel)의 의미와 핵심을 표현한 정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딕풍의 중세 건축물(고성, 흉가, 지하묘지 등)을 배경으로 악몽, 마법, 악마와 유령, 살인과 저주 같은 기괴하고 환상적인 사건을 주로 다룬다고 하여 고딕 소설이라 명명된 이 장르는 SF,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 로맨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현대 장르소설 전체의 뿌리이자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명예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큰 변화를 맞은 18세기 영국에서 탄생한 고딕 소설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과 불안으로부터 태어났다. 기술과 산업이 발달하고 합리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에 나온 소설이 마법과 유령이 판치는 공포과 환상을 다룬 것을 결코 우연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성곤 교수는 이를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던 시절에 인간의 억눌린 무의식과 은밀한 욕망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고딕 소설 중에서도 [오트란토 성], [우돌포의 수수께끼]와 함께 가장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이 본서인 [몽크(The Monk, 수도승)]이다. 따라서 고딕 소설에 대해 알고 싶다면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인 것이다. 단순히 역사적 위치나 사료적인 가치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재미에 있어서도 고딕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한 수도사의 이야기

무대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이곳에 있는 성 카푸치 수도원의 수도원장 암브로시오는 젊고 잘생긴 외모, 태어나서부터 수도원을 나가지 않은 채 수도생활에 정진하며 얻어진 신앙심과 성품으로 인하여 수도승들을 비롯해 옆에 위치한 성 글라라 수녀원의 수녀들과 인근 주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어린 수도승 로사리오가 자신이 실은 여자이며 암브로시오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독사에게 물려 사경을 헤맬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살려줬음을 알게 된 암브로시오는 마침내 로사리오(마틸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마는데, 이것은 모든 비극와 파멸의 시작일 뿐이었다.

한편 젊은 귀족 로렌조는 암브로시오의 강연을 듣기 위해 성당에 갔다가 아름다운 아가씨 안토니아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고, 그날 밤에 수녀인 여동생 아그네스가 어떤 남자와 편지를 교환하는 걸 목격하게 된다. 그 남자를 쫓아가 붙잡으니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 사귀던 아그네스를 버리고 사라져 수녀가 되도록 만든 라이몬드가 아닌가. 분노하는 로렌조의 앞에서 라이몬드는 자신이 겪은 우여곡절을 얘기해주고, 오해가 풀린 로렌조는 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교황의 교서를 갖고 수녀원으로 가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아그네스가 죽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3. 인간과 종교의 본색과 이면

성스러움의 상징으로 성인처럼 추앙받고 사랑받던 수도승 암브로시오의 파멸을 그린 본작은 그의 이중성, 욕망, 타락, 광기, 죄악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그대로 인간의 죄의식과 본성을 그린다. 또한 그와 함께 마틸다, 수녀원장과 추종자들, 군중들의 맹목적 추앙과 분노의 표출을 통해 종교의 이중성과 부화뇌동하는 군중심리를 처절하게 드러낸다.

보통 고딕 소설은 말초적이고 저속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본작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은 의외로 묵직한 종교적·철학적인 의문이다. 가령 죄를 지으면 지옥에 빠진다며 겁을 주면서도 한편으로 신은 자애롭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가르치는 종교. 그러나 죄를 지은 이가 신은 자애로우니 용서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참회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면 죄를 지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본작은 약간은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이런 논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종교에 대한 정면도전에 나선다.

교리 자체만이 아니라 종교인, 교리를 악용하고 허세와 권력에 탐닉하는 위선적인 성직자들의 모습을 폭로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장치와 사건이 등장한다. 폐쇄적인 수도원과 수녀원. 수도원장과 수녀원장, 그의 추종자와 반대자, 죄를 지은 자와 처벌하는 자. 결국 누가 죄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는 어느 정도는 읽는 이의 판단에 따를 일이겠지만, 그가 악인이라 할지라도 가혹한 처벌을 해야 마땅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다(불합리한 종교재판이 대표적인 사례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지배한다. 절대자인 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결국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불완전한 인간의 몫일 따름이다. 그로 인하여 벌어지는 추악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21세기의 기준으로 본 18세기의 명작

이 작품은 한 수도사의 타락과 파멸을 주축으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성으로 짜여져 있으며 이들 각 이야기가 유기적이고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어 극의 밀집도가 높으며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만들어, 오늘날 장르소설의 기준으로 보아도 뒤떨어지지 않는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

초반에 나오는 라이몬드의 모험담은 액자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본편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이야기지만 여기에 삽입된 유령 사건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다. 또한 점점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되는, 욕망에 빠져 타락하는 암브로시오의 범죄담(?)은 피카레스크의 원형이며, 마틸다가 암브로시오를 유혹하여 마침내는 조종하기까지 하는 과정은 악녀(팜므 파탈)의 극치를 보여준다.

다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복선도 힌트도 없어 이걸 왜 넣었지 싶은 부분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오트란토 성]이 뛰어나고 흥미진진한 내용과 진행으로 시작하다가 결말부분의 도식적 권선징악 및 교훈전파로 인해 전체적인 인상이 떨어지는 단점(개인적으로 중반까지는 셰익스피어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하지만 후반이 아쉽다)이 있는 반면 본작은 최후까지 속도감 있게 이끌어 가다가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결말(당시로써는 파격적일 듯)로 맺은 점으로 볼 때 오늘날 말하는 ‘엔터테인먼트’로써의 소설에 더 걸맞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맥빠지는 설교조 결말은 일전에 다룬 [사랑에 빠진 악마]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작품이 노리는 것이 암브로시오의 타락과 파멸이 수도승과 기독교인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교훈적 역할을 하기 위함은 아님이 자명하다. 오히려 작가는 타락한 수도사와 체면과 명예에 목숨 거는 수녀원장으로 대표되는 성직자 및 교단과 대중의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숭배를 비웃고 조롱하기 위한 풍자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일순간에 경건한 교인에서 광란의 폭도로 변하는 대중의 모습은 오늘날의 사회를 보아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거니와, 사디즘 문학의 원류로 대접받을 정도로 살인과 강간과 고문이 등장하는 것도 본작의 목적이 종교적 교훈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황과 대중심리를 좇아 재미를 추구하는 대중문학의 본질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작이 당시 상당한 인기를 얻었음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후 고딕 소설은 아류작이 범람하면서 질낮은 작품이 많아 명칭 자체가 비하의 대상이 되었지만(우리나라에서의 ‘판타지’와 비슷하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래도 여기서 탄생한 명작이 시대를 선도하여 [프랑켄슈타인]으로 대표되는 SF의 시조가 여기서 분화되었고, 환상/공포 소설의 부모이며 미스터리/로맨스의 산파역할을 했으며, 에드거 앨런 포, 찰스 디킨스 등 고딕 소설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문학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현재 유일하게 출간된 번역본의 경우는 번역은 무난하지만 오타가 눈에 띄고 아그네스를 안토니아로 잘못 쓰는 등 실수도 잦은 게 흠이다. 퍼블릭 도메인이니 더 좋은 번역과 멋진 장정으로 재출간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단 가격은 저렴해야 함).



덧1. 참조한 글들
* 위키백과사전
   http://en.wikipedia.org/wiki/The_Monk
   http://en.wikipedia.org/wiki/Gothic_novel
* 왜 지금 판타지인가 / 김성곤 ([계간 북페뎀 5호] 수록)
* [문화포커스] 영화마저 석권한 판타지 소설의 제왕 / 김성곤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11/17/200411170500022/200411170500022_1.html
* 산업혁명의 반동으로서 성장하는 영국의 낭만주의 / 류가미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56887

덧2. 이 작품은 작가 사후 200년 가까이 된 퍼블릭 도메인으로 이렇게 공개된 글을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를 통해 읽을 수 있다.
   http://www.gutenberg.org/etext/601

댓글 1
  • No Profile
    가연 07.07.01 22:26 댓글 수정 삭제
    고딕 소설에 관심이 많은데, 오트란토 성도 재밌게 봤고요. 이것도 재밌겠네요. 좋은 리뷰 감사드려요. ^^
Prev 1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