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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blog.naver.com/paswonik paxwonik@naver.com)



  "불화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의 최근 출간된 국역본을 독해해 나가도록 해 보자.

 우리가 다룰 부분은 크게 두 부분,

  "1. 감성의 분할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이 정치와 미학 사이에 정립하는 관계들에 대하여

  2. 예술 체제들에 대하여 그리고 모더니티 개념의 결점에 대하여"

  가 될 것이다. 일단은 플라톤에 대한 부분까지만 나아가도록 하자.


  우선 우리는 이 독해를 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솔직히 토로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번역투라고는 하지만, 본 국역본은 상당히 매끄럽지 못한 번역의 수준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독해자 본인이 자의적인 문장의 변형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고로 본문과 다른 형태의 문장들이 나오더라도 이 점 양해해주길 바람. 이런 저런 변형만으로도 그 수식관계와 주술관계의 모호함이 해소되지 않는 불가해한 문장들은 그대로 질문으로 남겨둘 것이다.


* * *


1. 감성의 분할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이 정치와 미학 사이에 정립하는 관계들에 대하여


  -서두의 질문(정치와 미학의 합류점의 존재여부)은 그 자체로, 우리로 하여금 오래된, 정치와 예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심의 눈길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선 정치와 윤리와 독립된 자족적인 영역으로 정립하고자 했던 미와 예술 지상주의적 태도들, 혹은 아직 '사유'에는 미치지 못하는 탐미주의, 혹은 데카당스, 혹은 보헤미안의 경향-습관-타성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중과 기술복제의 시대의, "정치의 미학화"에 반대했던 발터 벤야민. 우리는 정치와 예술 각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심의 시선을 던지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미학적(예술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합류점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저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술적-정치적 실천 모두 다, "공통적인Le common 것에 대한 감수성"에 개입하는 실천이다.

  -그러한 실천을 저자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규정들을 나열한다.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서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설정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란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 활동에 대한 분류/분할에 의거"하며, 이 활동이 행해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누가 "공통적인 것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칸트적 의미로", "자신에게 느끼게 하는 것을 결정짓는 선험적 형식들의 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들의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중요하다. 그 역시 "공통적인 것"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에 대한 특유의  가령 "말하는 동물"로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서 자격을 가진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덧붙인다. 노예 같은 "특수한" 인간들은 언어를 이해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소유권"이 박탈되어 있으며, 공통적인 것들, 정치적 대화의 영역에 대해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참여의 자격 자체를 분배하는 "감성의 분할", 혹은 공통적인 것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감수성은 "참여하기"의 보편적 시민적 덕목에 우선한며, 또한 그것을 지탱한다. 여기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들을 정립하는 감수성 자체가 항상 어떤 의식되지 않는 배제를 수반한다는 기본 명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으로서), "감성의 분할"은 따라서 공통적인 것과 배타적인 것을 동시에 결정짓는다.(14p)  

  -즉 우리는 논의에 전제된 정치의 두 장면과 두 질서 그리고 두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첫째 참여하는 행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논증, 설득과 조정이라는 "무대 위의" 생생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공연이 존재한다. 둘째, 그러한 "무대 이면"에서 참여의 자격을 분배하는, 거의 의식되지 않는 "정치 이전의 정치" "先 정치", "감각적 분할", "선반성적인 공통감각Common sense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이 존재한다. 이 문제는 이성적 해결책으로는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아포리아로 남는다. 왜냐하면 "공통적인 것"에는 어떤 이기적이거나 편협한 인간오성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는 근본적인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불화>라는 이전의 탁월한 저서에서, "진정한 보편성"은 항상 일반적 분류의 작업에서 떨어저나간 찌꺼기, 잔존물, 분류불가능한 "특수성"에 대한 경험과 항상 연루되어 있다는 자신의 통찰을 전개한다. 하지만 이는 이전의 혹은 나중의 문제이다.    


  -논의를 정리하자면, 정치와 합류하는 예술적-미학적 실천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이 예술과 정치의 합류지점은 전에 말했던 정치의 두 질서 중, "무대 이면"의 수준에서 성립한다. 우리의 공통감각에 대한 미학-예술의 실천적 개임은 거의 의식되지 않는 지평에서 진행된다.  


< 미학적 실천들에 대한 질문>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예술의 실천들의 가시성의 형태들, 그것들이 점유하는 장소, 그것들이 공통적인 것의 견지에서 '행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본래의 미학>으로부터다.(15p)

(그 아랫 줄 이하)

예술적 실천들은 행하는 방식들의 일반적 분배 가운데 그리고 존재 방식들과 가시성의 형태들과의 그 관계들 가운데 개입하는 '행동 방식들'이다.

 -이런 저런 낯선 조어들에 독자들은 당황할 것이다.  <행하는 방식들의 일반적인 분배>, <존재 방식들>, <가시성의 형태>는 무슨 뜻인가? 존재와 행동을 분배한다는 것, 그것들을 분할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이것들을 개입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저자는 방향을 돌려 플라톤의 <시인들의 추방>을 언급한다. 플라톤이 시인(혹은 비극 작가)들의 추방을 언급했던 것은 통념과 달리, 그들이 노래하는 우화들의 부도덕한 내용에 의거하기 이전에, 앞서 말한 "분배"와 "분할"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걸고 넘어지는 것은 두 형태이다. "연극, 그리고 글쓰기"


허구의 문제는 우선 장소들의 분배 문제다. 플라톤적 관점에서, 공적 활동의 공간인 동시에 '환상들'의 전시 장소인 연극의 무대는 동일성을, 활동들 그리고 공간의 분할혼란에 빠뜨린다. 글쓰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굴러가려 하면서,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또는 말해서는 안되는지 알지 못한 채, 글쓰기는 말의 순환에 대한, 공통 공간에서의 말의 효과들과 몸들의 위치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모든 정당한 기초를 파괴한다. 플라톤은 두 가지 주요 모델들(연극과 글쓰기), 말의 감각적 유효성과 존재의 두가지 주요 형태들인 연극과 글쓰기를 그렇게 끌어낸다.(15p)  

  -(플라톤의 눈에 비친)이런 두 예술형태들의 역기능, 글쓰기와 연극의 부작용들은, (연극에 있어서) 우선 공적 공간과 그렇지 못한 사적공간의 분할을 어지럽힌다. 위대한 영웅과 천한 양치기가 한 자리에 머물며 서로에게 말을 건내며 동일한 운명을 합주하는 비극을 상상해보자. 알다시피 고전 그리스 비극은 시민 연극이었으며 공적인 회합장소였지만, 그 무대에서 상연되는 내용은 상연되는 공적인 장소와 상관없이 온갖 신분들과 온갖 허구들이 뒤섞이는 형태였을 것이다. 또한 그뿐인가, 무대와 관객은 관객의 동일시에 의해 그 경계가 뒤섞이고 만다. 글쓰기 역시 (플라톤이 보기에) 마찬가지이다. 글쓰기가 직조하는 텍스트, 그것이 산출하는 의미작용 자체도 수신인이나 수신여부 자체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차별적이지 않은가? "누가" "어디에서" 말해야하는지에 대한 분할 자체를 무효화하는 기호들의 무차별한 순환을 플라톤은 인식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플라톤이 염두에 둔) 누가 말을 걸고 누가 들어야할지에 대한 자명한 언어적 위계를 뒤흔들어버린다.    

  -이것들은 무엇에 연루되는가? 곧바로 "민주주의"라는 대답이 나온다. 동일성의 불확정, 위치들에 대한 불인정, 공간과 시간의 분할에 대한 무규정의 "체제"(여기서 예술체제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것은 정확히 민주주의 체제이다.(16p)


  연극과 글쓰기에 대항하여 플라톤은 올바른 '예술의 형태'인 세 번째 형태, 제 자신의 통일성을 노래하고 춤추는 공동체의 무용적 형태를 대조시킨다. 결국 플라톤은 말과 몸의 실천이 공동체의 형상을 제안하는 세 가지 방식들을 끌어낸다. 그는 그림과 같은 기호들의 표면인, 말 없는 기호들의 표면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가지 상극적인 모델들로 그 자신 나누어지는 몸들의 움직임의 공간이 있다. 한편으로, 대중의 동일시에 제공된, 무대의 시뮬라크르(*플라톤에게 원본-사본-시뮬라크르의 세 항으로 구성된 위계질서가 존재하는데 이 중에서 사본은 원본을 모방하고 원본의 이데아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면, 시뮬라크르는 사본 자체의 사본, 사본인 척하는 그 무엇, 아예 척도 자체를 결여한 거짓, 허구를 의미한다.)의 움직임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움직임, 공동체의 몸들 본래의 움직임이 있다.(16p)    

플라톤을 위한 변호

  

  여기에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은 싶은 쟁점이 존재한다. 계속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면, 이 세가지 모델(글쓰기, 연극, 무용)에서 우리는 플라톤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글쓰기의 무차별한 기호의 운동, 환상으로 점철된 연극, 그 자체는 민주적일 수 있지만 또한 동시에 중립적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지만, 또한 모든 가능성에 "평등하게" 열려있다. 글쓰기의 표면과, 연극의 환상-무대는, 말하자면, 그 누군가에게 점유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빈 공간'이다. 우리는 졸라와 브레히트가 그 공간에 침투하기를 기다리기 위해 너무나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플라톤에게 명백히 결여되는 것으로 보이는 "정치적 올바름"을 피상적으로 비난하는 대신,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조급함"에 초점을 맞추자. 플라톤에 걸린 쟁점은, 파편화된 도시 국가들의 내재성의 장이 아닌, "보편적 사유의 공동체"를 지금-당장 실현해야한다는 철인의 유토피아적인 충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유의 정수는 노예에 대한 비인간적인 착취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그의 암묵적 선호를 제하더라도, 여전히 살아남는다. 그가 만약 글쓰기와 연극을 격하했다면, 그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무용을 어떤 집단적 예술 형태로서 내세웠다면, 그것은 그의 보편-공동체에 대한 그의 긴급한 철학적 충동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는 유예의 시간 속에서 망향의 세월을 희구하는 온갖 종류의 진보적 지식인에게 결여된 미덕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오늘날에 배워야할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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