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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판타스틱]의 인연은 작년 5월부터 시작됩니다. 막 군대를 전역한 저와, 마침 연락이 닿은 친구와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대학로의 어느 다방에서였지요. 문득 내 생각이 났다며 건네 받은 종이봉투 안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어느 잡지의 창간호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즈음 있어 제 상태는 이번 호 {국내 과학소설 출판 산업, 한계와 희망을 이야기하다!} 특집에서 분류해 놓은 일반 독자층에서도 가장 아래에 위치한 것과 다름없었어요. 그때 이미 1기 그리폰북스의 전질을 마련하겠다며 헌책방을 뒤지거나 창작에 열을 올리던 스무 살 무렵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대입과 병역을 거치며 한국 문단이 요구하는 교육에 상당히 길들여져 있던 저로서는 뜻밖의 선물이었지요.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아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과연 장르소설 중심의 월간지가 꾸준히 발간될 수 있는 환경이 국내에 조성되어 있기나 할까. 특정 인기 장르에 편중하지 않고도 각 팬덤을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 수록 및 특집 선정이 가능할까. 혹시 소수 인원으로 정해진 페이지를 채워나가느라 허덕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점에서 저는 일반 독자층으로 분류될 이유가 충분할 정도로 <판타스틱>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기우였나 봐요. 이제 곧 잡지가 일주년을 맞이하게 되는군요. 어쨌거나 2007년은 판타스틱이 창간되었기 때문에 뜻 깊은 한 해였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제가 이제부터 잡지의 리뷰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재적인 구매자에 지나지 않았던 제가 감히 일반 독자층의 시선으로 써내려가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참고로, 저는 그동안 정기독자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연재작의 경우 충분히 감상할 여력이 부족했음을 먼저 밝힙니다. 가령, 복거일의 [역사 속의 나그네]의 경우나 빌 밸린저의 [기나긴 순간], 폴 윌슨의 [다이디타운], 조지 마틴의 [스킨 트레이드], 루이스 캐럴의 [실비와 브루노] 등은 논외로 합니다(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러나 과월호를 통독하여 이후 반드시 언급할 것을 약속합니다. 솔직히 저는 일반 독자층을 고려한다면 연재작 비중을 줄이는 것을 권하고 싶군요.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간된 1권을 제외하면 여전히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지 않나요. 때문에 10호 하나만 구입한 독자를 예로 든다면 감상 가능한 작품은 로저 젤라즈니의 {누가 버서커를 가로막는가}와 임태훈의 {팽형자}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아, {팬더댄스와 함께 하는 추리극장: 밤만주와 처절한 복수}도 포함해야 할까요? 이 괴상한 카툰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추리극장이라 하였는데 미스터리소설 독자들이 관심을 보일 부분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박도빈이나 김태권의 단편, 그리고 WAL의 [탐정 해리 시리즈: 돌아오지 않는 남자]와 비교하면 만화 부문에서는 일단 질적인 실망을 느꼈습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누가 버서커를 가로막는가}도 굳이 분류하자면 팬픽인 만큼 오리지널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읽기 곤란했습니다. 특히 ‘버서커’라는 병기의 경우 삽화마저 감상을 방해하기 쉽더군요. 그린 이에 의해 임시로 주어진 이미지라고 해도 Editor’s note의 설명을 읽고 이해한 수준과 겹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버서커’ 시리즈를 직접 읽고 싶은 마음만 커지더군요. 이 또한 제 개인적인 WISH LIST에 넣고 싶더군요. 비교적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이 인기라고는 해도, 아무래도 독립된 작품이 아니다 보니 적잖은 아쉬움이 남는군요. 어찌 보면 저는 이야기의 끝에 두 남녀가 눈이 맞는 시답잖은 이야기 구조에 질린 것뿐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임태훈의 {팽형자}입니다. 그만큼 좋은 작품이냐고요?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판타스틱] 편집부에서 {팽형자}의 게재를 결정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습니다. 작가의 경력만 보면 찬란합니다. 직접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리고 두 번이나 큰 상을 탈 만큼 뛰어난 극작가이면서,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문단으로 나온 신예 평론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그런 그에게도 소설가의 자질은 아직 부족했나 봅니다. 일단 {팽형자}는 제목부터 내용과 모순됩니다. 작가는, 아니 소설 속 화자는 조선시대 ‘명예사형’이라 불리던 ‘팽형’을 초반부에 언급하면서 진보된 뇌과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벌을 고안해낸 미래사회에 관해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어긋났습니다. 팽형이 ‘명예사형’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버리게 되면서 어째서 ‘팽형’이라는 이름이 붙어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은 공중에 붕 떠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는 리뷰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다른 의문도 있습니다. 어째서 진보된 뇌과학으로 고안해낸 형벌이란 것이 고작 시신경에 혼란을 주어 머릿속을 뒤흔드는 것뿐일까요. 어차피 눈을 감고 지내야 하는 생활이라면 차라리 스스로 장님이 되는 방법을 택하겠어요. 사지가 자유롭고, 동료 죄수까지 마음껏 죽일 수 있는 환경에서 그것 하나 어려울까요. 화자가 수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문장이 부드럽지 않다고 탓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때문에 항상 마지막에 진부한 고백으로 끝내는 이런 형식의 소설에서는 거의 매번, 똑같은 불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쓰고자 한다는 점이지요. 덕분에 시제가 엇갈리고 시점에 혼란이 오면서도 구구절절 잘도 긴장감만큼은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씬을 나누어서 효과적으로 끊는다든가, 결말을 마무리 짓는 방식 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팽형자}를 화자의 소설로 생각해주지는 않습니다. 이런 식의 소설들이 모두 이언 매큐언의 [속죄]처럼 훌륭해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팽형자}에서 대부분의 소설적 장치들은 맥 빠지는 결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대하다고 보면 됩니다. ‘팽형’이라는 형벌 명칭도, ‘고치’라는 집행도구도, 그리고 무엇보다 ‘구루’의 설교와 이제는 꽤나 진부한 레퍼토리가 돼버린 ‘수용자들끼리의 집단 학살’ 등이 그렇습니다. 국가에서 고작 특정 형벌을 당한 죄수들의 생활 따위를 관찰ㆍ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이상하지요. 또한 그것을 담당하는 상부계층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발상도 썩 고전적입니다. 차라리 한 개인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다루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소설가가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의 와이셔츠에 묻은 루즈 자국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주인공 스스로 루즈 자국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특집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습니다. 국내 매체를 통한 어슐러 르 귄의 인터뷰는 언제나 바라 왔던 것입니다. 비록 서면으로나마 몰랐던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언제나 모든 장르에 애정을 가지고 대한다는 점에서 편집부에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루시드 폴의 인터뷰와 DJ Soulscape의 글은 비록 나와 인연이 없는 분야의 이야기였지만 잡지의 양질적인 수준을 높여주기 충분했습니다. 로맨스 특집이라는 다음 11호가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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