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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밤 너머에]를 읽고

2008.02.29 23:4002.29





blog.naver.com/paxwonikpaxwonik@naver.com   “우리는 위대한 작가를 오해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의 깊은 논리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또는 그의 작품이 지니는 체계적인 성격을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위대한 작가를 오해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일반적인 경우 작가의 희극적인 능력과 희극적인 천재성을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즉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반-순응주의적인 효과를 내게 하는 작가의 능력을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위대한 작가를 오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불안과 비극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카프카를 읽으면서 자주 웃지 않는다면 우리는 카프카를 제대로 찬미하고 있지 않는 셈이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카프카, 셀린, 퐁주의 선구자, 장 자크 루소>, 149p)

* * *



   (1) 작품의 세계관에 대한 쟁점

   많은 사람들은 이 소설의 불친절할 정도로 생경한 배경설정과 설명이 생략된 세계관, 그리고 비의(秘意)적이라고 할만치 이따금씩 돌출되어 나오는 경구적인 문장1)에서 어떤 ‘심오함’과 ‘상징’ 그리고 어떤 ‘사상적 유비관계’를 퍼 올리려는 시도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반대하며, 여기서 나는 차라리 한 가지 새로운 전제를 끌어들이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가령 평자는 힘겨운 독해 끝에서조차 이 소설에서 어떤 설정주의적 매력도 찾을 수 없었다. ‘설정주의적 매력’이라는, 평자가 붙인 임시방편의 조어는, 판타지 소설과 환상문학에 고유한 그 무엇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의 세계관을 심오하게 투영하는 어떤 비밀(‘반지의 제왕’의 중간계의 지정학적 의미, ‘황금 나침밤’의 “데몬”의 발달심리학적 의의 등등의 현실 참조적 지혜)을 담고 있고 독자는 그 한 가운데에서 탐험을 즐길 수 있다고, 선전되는 그 무엇이지만, 물론 단언컨대, jxk160님의 소설에는 그러한 비밀과 즐겁고 낯선 탐험은 없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책의 내용에 대한 구구절절한 주석보다는, 차라리 읽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물론 전혀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지명’과‘ 인물 이름’들 그리고 분명 어디선가 사상사적 모티프를 차용했을 테지만 독자 입장에서 막상 찾아보기는 버거운 어떤 용어(가령 <별>에 나오는 헬라, 링카, 등등의 물질)들,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가상적 사회 시스템(<밤 너머에>에 등장하는 학위제도, <별>에 나오는 반쯤 관료화된 분업사회, <왕의 행방>에 나오는 행정시스템) 등속은 우리가 흔히 갖고 있을 법한 이국취향환타지의 설정주의적 매력에 대한 기대감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내가 말하는 설정주의적 매력은 무엇인가? 누군가 감상평에서 말했듯이, ‘세계관만으로도 주제의 대부분을 표현하는’ 작품의 특성이라고 바꾸어 말하 싶다. 그것은 (다소 범주가 다르지만)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황금 나침반> 등등의 고전적 사례에서 보이는 것처럼, 정도로 불문하고서 ‘현실’의 이항대립과 인류학적 성과물 그리고 종교적 모티프를 참조하고, 그것을 기초로 수행하는 고도로 정신적인 유희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고전적인 판타지 장르 소설은 축적된 인류의 지혜를 보기 좋게 종합해 놓음으로써, 박물학적 관심사에서 추동된 하나의 총체적 세계관을 제시하곤 했다. 그것의 장르적 쾌감은 (좀 더 범속한 차원으로 옮겨놓으면) 다음과 같다, 그것이 제시하는 낯선 세계의 기능은, 지리멸렬한 현실세계에서 상실된 삶의 감각을 이국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복원-재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더욱 강렬하게 하는 것에 있다. 어떤 이들이 올바로 지적하듯, jxk160님의 소설은 이러한 장르적 “순기능”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그런 가능성으로부터 완전히 탈선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jxk160님의 소설 속의 세계관의 대립/갈등/모순/투쟁 마저도 극적이기는커녕 현실만큼이나 지리멸렬해 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하지만 이건 그리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그 설정 또한 그렇게 복잡하지 않기에, 퍼즐과 같은 정신적 유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작품 이면에 포석으로 깔린 수수께끼 또한 기대해서는 안 된다.


   (2)화이트칼라 생활인들의 위대한 시원적-원초적 설립 행위

   초반 수록 작품들을 언급해보자. 첫 번째, 인물들이 영위하는 일상과 직업의 측면에서. <밤 너머에>에서의 주연(셴, 샤뮌)은 위원회 구성원이자 학자이며, 회상조로 언급되는 <별>에서 언급되는 주요 인물들은 “분업화된 도시”에 거주하는 나이를 지나치게 많이 먹은, ‘성인’들 중 한명에 지나지 않으며, <왕의 행방>에서 주인공(쥴)은 일견 이들 중에서 가장 위대해 보이는, 시장이자 공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그가 도시행정 사무를 볼 때의 피로감은 책을 넘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곤 한다. 나는 이 세 작품들을 행정조직과 분업화된 사회구조의 문제와 연관된 실존의 피로감을 건조하고 사무적인 필치로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작품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뉘앙스인 데다가, 단지 그것뿐이라면 뭔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작품에 등장하는 사무적 세계의 무분별한 작동은 하나 같이 ‘위대한’ 사건과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피로에 찌든 일상적 실존은 어떤 범죄도 아니고, 조직의 비리도 아니며, 과거의 심연도 아닌, ‘세계의 설립’과 같은 ‘시원적 행위’의 경로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만, 이 지점에서 ‘상징’ 따위는 개입하지 않으며, 모든 것들은 자명하고 투명한 구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의 진정성과 소박함을 믿어도(?) 될 것이다. 여기에 아무런 뒤틀림이나 속임수 내지는 반전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을.

   물론 이것은 노동에 대한 찬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단적인 예로, <별>에서 “관의 시대” 당시 도시에 거주하는 “성인”들의 우아한 문명세계는 “아이들”의 노동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에 기반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도덕적 개탄의 어조도 발견할 수 없다.

   문제는, 조직 속에서의 의사결정과정의 복잡한 경로들의 상호조정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설립하는” 수행적 행위이며, 그 것은 물론 ‘언어’, ‘말’, ‘문자’ 그리고 ‘공문서’와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앞서 말한 생활인의 피로에 쩐 성실함의 위대한 상승은 화이트 칼라만의 고유의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의 차이를 명확히 하자면, 화이트 칼라와 블루칼라의 진정한 차이는 자신을 증명할 수단을 체계화한 형태의 상징자본을 보유했느냐의 여부로 수렴할 것이다. 이 점에서, <별>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링카>나, <왕의 행방>의 주인공이 의심스러운 총독으로부터 발주받은 도시건설 업무, <밤 너머에>에서의 각종 학위 수여증서 등등. 문제는 이들이 보유한 상징자본이 붕괴하기 시작하는 지점(돌발적으로 발견한 ‘헬라’2), 햇빛에 따라다니는 ‘그림자’, 사기 위탁업무의 가능성, ‘위조문서’)이 그들이 지닌 언약의 증표 자체에 내속해 있다는 점이며, 더욱 흥미롭게도 이런 범죄적인 이면이 이들 화이트칼라를 더욱 빛나는 영웅으로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즉 이런 합법적 언어작용 ‘이면’은 주인공을 심연의 나락속으로 빠뜨리는 대신, 어떤 ‘이행의 계기’로 전환한다. 이들 사무직 근로자들은 대개 “말”, 혹은 더 고상하게 말해서 “말씀Logos”을 소유하고, 이것의 근본적인 불안정성과 타락의 가능성을 인수하며, 그런 계기를 통해서만, 모종의 자기 희생적 제의를 통해, 세계 자체를 건립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jxk160님의 지닌 어떤 명랑한 해학을, 인류학적 탐구열의 진지함이 배제되어 있는 웃음을, 우리를 해맑게 웃게 만드는 부분을 짚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명백한 모든 것을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독자의 시선 자체가 소설을 비의적인 것(앞서 말한 희생제의 역시 비의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소설을 보다 ‘축자적’으로 읽을 필요성이 요청된다. 가령 일례를 들어보자. <밤 너머에>에서, 특유의 폐쇄적 공동체 내부의 학위제도에 의해 매개된, 샤뮌에 대한 셴의 관료적 질투는 신화와 종교 자체의 흥망성쇠 심지어 신들의 투쟁으로까지 상승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종교적 세계관의 설립과 이에 대한 부정이라는 전 인류적 선택의 갈림길의 계기를 정립한다. 이들간의 연결고리는 소박하고 명확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jxk160님 특유의 문체는 “감수성”이 아닌 “독해력”을 요한다.

  “셴은 이제 어떻게 자신이 질투를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내가 아닌 자에게 나를 이입시키고 어떤 비교를 시도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푸르다. 그는 아름답다. 그는 높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주어진 것이지 그의 책임이 아니다. 세계를 질투하는 자는 없다. 신을 질투하는 자만이 있다. 사람들은 질투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정복욕이다.”
(중략)
  “질투받는 신은 사멸한다. 신화가 무너질 때.”
  “질투받는 타인은 사멸한다. 더 이상 그 사람을 알 수 없을 때.” (99p)

  
   <밤 너머에>의 결말은 다소 애매하지만 <별>과 <왕의 행방>에서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소멸을 인수하는 영웅적 제스처를 “조용히” 내보인다. <왕의 행방>에서 쥴은 보다 명확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의 역설, “미래에 대한 기억(보편성 속에서 둘은 중첩된다)”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시가 절로 돌아가는 상황, “도시”로 완결된 투명한 보편성 속에서, 해가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쬐며 도시의 모든 것이 자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완결되고 충만한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보편성의 특권적인 신성이 건재하지 못하게 되는 그러한, 정오의 아이러니 순간으로 비유되는, “위기”의 계기에서 쥴은 왕과 총독의 대리자 역할을 했던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총독에게 건네준다. 여기서 “이름”이라는 언어적 요소가 이 지점에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언어가 가진 태초의 “명명행위”의 위대성과 전 시간의 차원을 함축하는 보편성은 또한 그 언어 자체의 안정성을 침식하고 마는 위기의 상황이기도 하다.(이는 <날개의 피>에서도 형상화될 것이다) 도시를 설립하고, 신화를 창조하고, 기억을 보존하며, 행정을 총괄하는 것들을 지탱하는, “기록하기”의 단순반복과 구분되는 “명명행위”는 언어의 어두운 공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크립키의 <고정지시어>의 역설3)에서 드러나듯이, 명명행위에는 단순히 공동체의 합의로 수렴되지 않는 암흑지점이 존재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때의 명명행위에는 언어요소 간의 구조로도 환원되지 않는 어떤 힘 내지는 관성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 문제(설립적 행위로서 언어의 명명하는 힘)를 <무한성> 그리고 <보편성> 마지막으로 <생성>의 문제로 끌고 가고 있다. 이는 유감스럽게도 작품 속의 쥴의 독자성, 고유성,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기억을 무효화시킨다. 그러나 그 상황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자기인식은 어디까지나 협소화된 가상의 자기-충족적 세계에서는 불필요한 것으로 드러난다.4)
   이것이 항구적 구조조정과 만성적 다운사이징에 직면하여, 아이러니한 자기 정체성을 선포하는, 현실 순응적인 화이트 칼러의 자기-응축적 위대함의 본질이다.


   (3) 응석 부리는 아이들과 사유로서의 소설

  짧게 다루어지고 넘어가겠지만, “무한” 혹은 “보편”의 차원은 분명 jxk160님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어야할 부분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지금까지 언급한 주요 세 작품들의 주요 인물들은 어떤 “위대성”을 나름의 투명한 구조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소결을 내렸다. 상기했다시피 이것은 굉장히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문제인데, 왜냐하면 앞서 말한 “위대성”의 술어는 언어로 중층결정된 조직 속의 피로와 (무엇보다 더위)에 노출된 화이트 칼라 생활인들에게 귀속되어야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를 웃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 이러한 연결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기-거리두기나 반어법 내지는 비아냥도 읽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작품을 더욱 투명하고 비상징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 무엇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품을 작가의 요청대로 더욱 축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무지 만족스러워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상징’과 별도로 여전히 그의 작품은 난해한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더라도 여전히 찝찝해 할 수 밖에 없다. 여기가 우리가 기어변속을 할 지점이다. 여기에는 또한 아직 만족스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로 충분히 암시한, “세계관의 쟁점”를 걸고 넘어질 수 있다. 우선 우리는 본 작가의 소설을 통해 상징과 이항대립 그리고 이에 기초한 어떤 유사-인류학적인 세계관을, 그 대리경험의 지평을 볼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 장르적 쾌감을 유발하는 어떤 ‘세계관’대신, 각종 ‘장치’들을 본다. 각종 제도들과 축제가, 학위수여식, 공문서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소위 세계관이라고 하는 이 장르적 리비도 경계는 단언컨대, jxk160님의 소설에는 부재한다. 또한 우리가 그(녀)의 소설을 통해 얻는 것은 박물학적이고 모험적인 혹은 이국취향에 경도된 어떤 ‘경험’이 아니라, 혹은 실존적 방황에 대한 독백이 아닌, 어떤 사유의 궤적이며, 이는 항상 불완전하고 임시방편이며 단순 한데다가 쉽사리 변동 가능하면서 또한 자신의 가장 소박한 의미에서 “위대”하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 사유란 일종의 ‘함정 놓기’5), ‘얼러대기’, ‘옹알이 하기’, ‘앙탈부리기’의 유희적 실천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것은 행위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으로서, 주로 작품 대부분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통해’ 혹은 ‘난쟁이를 통해’ 형상화된다. 물론 소설 속의 주요 인물들은 주인공 그러한 아이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심원한 간극으로 인해 타락한 존재라기보다는, 단지 그 아이들처럼 되기에 이미 때늦은 것뿐으로 보이므로 이것은 단지 성인의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어떤 애도와도 무관할 것이다. 더욱 웃음을 유발하는 부분은, 아이들이 되기에는 때늦은 어른들이 이 아이들을 번쩍 들어 안고 휘두르고 제멋대로 대하다가도, 얼굴을 바라보며 연민을 느끼는 그러한 제 멋대로의 장면들에 존재한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려고 했다. 아이는 밝은 곳에서 보고 싶어했다. 아이는 성인의 손을 잡고 다녔다. 헬라를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성인에게 가서 조그만 머리를 갸웃거리며 달랬다. 어쩌다 익힌 단어 몇 개를 웅얼거렸다. 아이는 성인의 표정에 나타나는 변화를 예민하게 살폈고, 그 과정을 즐겼다. 성인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침울해 하면서 필사적으로 더 조르거나, 체념해버렸다. 헬라를 받을 때도 아이들은 할짝거리다가 꽉 깨물거나, 슬그머니 깨물 듯 말 듯 하다가 엄지가 있는 쪽을 아프게 콱 물어버리거나, 대담한 아이들은 목을 깨무는 것도 즐겼다. 간지럼 태우기, 매만지기, 쓰다듬기, 애태우기, 물었다 놓기, 빨아들이기, 핥아대기, 놀이가 늘어갔다. 아이는 그럴 때마다 성인의 얼굴을 보고, 말을 듣고, 반응을 이해하길 즐겼다. (151~152p)

  여기에 jxk160님 소설의 근본성이 존재한다. 결국 여기서는 어두운 상징의 문제나 장르적 쾌감의 문제(이 둘은 상호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가며 작품 감상의 유효한 포인트가 되지 못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미덕이 있다면 특유의 힘으로 비평의 전제 자체를 바꾸도록 강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단순한 환상문학의 범주만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설”을 또한 고도로 언어화된 “사유”로 읽어달라는 요청은 분명 문제적이다. 이는 작품을 어떤 신비를 담은 상징이 아닌, 축자적 글과 논의로써 읽어달라는 요청의 이면이기도 하며, 이는 또한 작품을 신비가 아닌 일관된 논리의 측면에서 읽어달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자신의 장치들을 자신이 풀어낸 함정들, “언어”라는 하이데거적으로 아늑한 집구석에서, 나홀로 집에 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실천을 펼치는(즉 함정을 풀어놓고 복잡한 탈출구를 고안하는) 주인공과 작가 자신에게 주목해달라는 아이다운 요구(응석)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장치들의 결합구조를 파악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누차 반복했듯이,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속에서 화이트 칼라 계층이 습득한 처세술적 지혜를 사유-글쓰기라는 언어적 건축물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 건축적 명료함 속에서 언어적 행위 속에서 세계설립적 사건을 소소하고 원초적이고 소박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상당히 놀랍고 특이한, 고로 배꼽 빠지는 조우이다.

   그러한 조우의 절정을 우리는 “날개의 피”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을 가장 재밌게 읽었다. 작가적 자의식을 가장 강도높게 덜어낸, 폐허 속에서 (화가 베이컨을 연상시키는) 오물을 쏟아내는 일그러진 형상들이 사막을 돌아다니는 후덥지근한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한편으로 우리의 언어를 점검하게 하면서, 한편으로 우리를 아이들처럼 고기를 그립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 도대체 누가 “세계관”을 필요로 한단 말인가?


   (4) 주인공의 문제-보편과 생성

   그러나 아직 우리는 주인공들을 다루지 않았다. 이는 나로서 불가피한 상황이기도 했는데, 즉 엄밀히 말해서 진정한 “소설 주인공”들은 내가 앞서 언급하지 않은 작품에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앞서의(<밤 너머에>, <별>, <왕의 행방>, <날개의 피>) 주요인물들(나는 이 단어를 지금까지 고집해 왔는데)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성실하고 유능한 생활인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삶만큼이나 추상적이고 기능적이며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초적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은 단지 언어적 명명의 행위자로서, 혹은 도시의 거주자로서, 혹은 관료제나 행정조직의 직함으로서 기능하던 소심한 사람들이기도 하면서, 또한 소박하기 그지 없는 어떤 설립적 사건을 위해 자기 정체성의 소멸마저 인정할 줄 아는 위대하고 균형잡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른 자신을 누군가 밟고 넘어가길 고대하며 고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약삭빠름이 아니라 현인적 지혜를 지닌 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인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름지기 소설의 주인공은, 루카치의 말대로, 내면과 객관 세계의 불일치와 공허로 인해 분열된 자의식을 경유하여 모종의 화해책을 향해 나아가는 문제적 개인이기 때문이다. 가령 호머의 서사시에서 모든 주인공의 행위의 의미와 운명 그리고 덕성은 완결된 원환구조의 총체성 안에 거주하고 있지만, 근대적 개인은 그러한 보증책을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 기타 등등……. 물론 고대적 덕성과 근대의 타락이라는 이분법만으로 문학의 역사를 관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루카치였기에, 그도 그의 논의에 각종 장치와 함정들을 곳곳에 파 놓는다.6) 우리는 완결된 총체성이 어떤 특이한 형태로, 혹은 기형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괴테)을 보곤 한다. 논의가 너무 나아간 감이 있지만, 아무튼 앞서의 등장인물들도 일종의 “예외”라 할 만큼, 결코 그 의미가 부조리하거나 분열되어 있지 않은 채 온전한 양상으로 남는다. 적어도 우리가 거대한 총체성이라는 목적론적 범주를 버리는 대신, 의미지평의 실험적 내재성을 신뢰할 수 있다면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직면하는 갈등은 결코 애매하거나 표리부동하지 않다. 그것은 정확히 그 자신들의 “좁고” “협소한” 세계에 대해 내재적이다. 그것들은 다소간에 기술적인 것이고, 혹은 달리 말하자면 실용적인 것이다. 애인의 등에서 난 털과, 이것이 환기하는 온갖 곤란한 과거들, 혹은 종교가 조그만 전원적 공동체의 삶의 가져올 변화의 양상, 헬라의 발견으로 인한 새로운 종족적 차원으로의 도약 혹은 타락, 도시의 운영권 소유권에 대한 권리상의 귀속여부, 등등. 우리는 이 문제들 앞에서 절망하고 표리부동하게 분열하고 패배하거나, 혹은 어떤 극복의 의지를 불태우는 문제적 개인 대신 건조한 논쟁과 잠시 곤란해 하는 망설임 그리고 극적인 결심이 있을 뿐이다.

   더욱 유머러스한 지점은, 근대적 소설의 주인공과 너무나 판이하게, 소설의 주요인물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내재적이고 현전하는 보편성의 지평과 있는 그대로 “연결접속”되어 있는 데,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마치 과도한 업무량과 골치 아픈 일처리에 시달리는 것처럼 힘겹게 ‘무한’과 ‘보편’성의 지평을 짊어진 채 난처해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작고 충족적인 어떤 위대함과 이행의 계기를 추인하며 끊임없이 장치를 만들어 나간다. 즉 이는 그들이 사유하며 무한과 “연결”되는 방식 자체가 끊임없이 장치를 재구성하는 생성의 와중으로 충동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단편적 장치들은 존재의 집(언어)에 방문한 무한성, 보편성, 생성의 철학적 차원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얼기설기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물론 이는 환영들처럼 깨지기 쉽고 연약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끝없는 원초적 응석에 의해 지탱되며 재구성과 해체를 반복한다. 이 점에 대해서, jxk160님의 소설은 청년 루카치가 소설의 특성으로 언급한, “성숙한 성인 남성으로서의 소설”과 거리가 멀다. 상기한 주요인물들은 심지어 어른들조차 이런 아이다운 함정 설치의 실천들에 대해 별 다른 자의식적 회의감을 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5) 문제들

  이것들이 끔찍한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은 보다 독백적이고 내밀한 작품들이다. 나는 <인용>과 <에덴의 나무>를 주저 없이 그러한 범주로 포섭할 것이다. 이 작품들은 앞서 거론한 유머러스한 작품들7)과 판이하며, 보다 “전형적이다.”

   이것에 대해서 긴 말은 하진 않겠지만, 이 작품들을 읽다보면 문제적인 구절들이 간혹 눈에 띤다. <인용>과 <에덴의 나무> 모두 독백적인 작품들이다. <에덴의 나무>의 후반에 등장하는 돌발적인 시츄에이션은 어느 정도 해학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떤 문제를 담고 있다. 이는 쓰여진 형식과 발화내용과의 불일치, 간극, 모순으로 요약된다. <인용>에서 주인공은 <기억>의 동일성에 거주하는 대신 <삶>을 선택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삶이란 다름 아닌 환각의 자유로운 “연결접속”들의 강도Intensity를 평면 위에 분배하는 일로 나타난다. 삶의 지평에서는, 인과관계나 시간의 선후조차 어떤 관념들 간의 자유로운 연결의 실천 속에서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지평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화자는 이러한 것을 악몽과 고통으로, 지각한다.

   나는 자신의 낯설음을 인정한다. 이 낯선 자도, 이 악몽고통도,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점, 오직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만 말하며, 때문에 말할 수 있으며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 세 가지는 똑같은 것이다. (231p)

   화자는 이러한 과정을 어떤 불길한 징후와 연결시키며, 작가는 독백 속에서 두려움의 감정 속에만 머물며 존재한다. 이는 보다 명랑하고 소박한 어떤 장치, 제도들 속에 이것저것 만져보는 그러한 실천과 혹은 작가 고유의 해학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는 독자 입장에서 모순된 감정을 일으킨다. 그토록 처절하고 아프게 해체되고 변형된 주인공의 기억과 동일성의 증명들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나 자의식적으로 또렷하게 성찰하는 화자의 어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은 <에덴의 나무>에 등장하는 화자의 실천들 속에서, 즉 다른 나무와, 그것의 섬세한 결들과, 연결접속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기호-정보량의 일시적 폭주(정념의 강도 높은 쾌감)만이 스스로의 유일한 정체성이라 자조적으로 내뱉는 화자의 어조는, 혹은 자신이 표하는 열중에 대한 자기성찰은, 자신이 실제 처한 상황과 너무나 괴리되지 않는가? 일단 ‘나’라는 개념 자체가 자명하게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상황을 그렇게 명료하게 성찰하며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집착을 표할 수 있는가? 이는 생각해볼만한 아이러니이지만, 소설에서 이를 처리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이루어진 바가 없다.

   그러나 물론 의도야 어떻든 여기서 작가가 성취한 언어적 표현은 훨씬 과감하고 실험적이긴 하다. 다음과 같은 압도적인 문구는 매우 인상적이다.

   안돼.
   그것은 나다.
   그것은 내 몸이다.
   코넌이 가져가버린, 모두가 가져가버린 내 몸이다. 여기에 없는 것, 아무리 해도 내가 볼 수 없는 것, 붉은 열매. 나는 두려움에 코넌과의 연결을 피하고 있다. 그에게 연결을 하지도 않으며 그에게서 연결을 받게 될까 두려워 다른 자와 연결을 끊지도 않는다. 항시 다른 자들과 연결되어있는가 하고 놀라게 된다. 그러고는 상대가 비웃는 것 같단 말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쾌감은 나의 열매가 아니라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몸 QN닝라고. 내가 그리워한 것은 코넌일 뿐이라고.
   그리워한다?
   기호들의 조합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쾌감을 억눌렀다. 그들의 몸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열매들을 꿈꾸었다. 나는 그들 중 누군가의 연결을 받고 깨어나거나 돌려가며 아무나와 연결을 반복하거나 연결이 끊어졌다. 마침내 코넌과 연결되었다. 내가 연결한 것인지 내가 연결이 끊어졌을 때 그가 시도해 온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도 나를 계속 피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코넌과 연결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아무런 쾌감도 느끼지 않으려고 했다. 분홍색 코의 킁킁거림으로부터도. 조각난 햇살로부터도. 프르고 보드랍고 간질거리는 대지로부터도. 풀잎의 일렁임. 나는 아무것도 즐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의 몸을 나로부터 멀리 밀어놓았다.
   내 몸으로부터.
   그러자 나는 느꼈다. 내 것이 아니라 그의 몸으로부터. 그의 몸이 나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나무숲, 잎사귀들의 반짝거림, 이끼들의 시선
   그의 몸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317~318p)



   (6) 서정성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작품의 서정적 요소에 주의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표현들이 생명력을 얻는 형식은 <스케치: 비>에서와 같은 익명적 단상에서일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어느 순간 자신이 만들어놓은 어떤 인위적이고 무차별한 실험과 생성, 연결접속과, 이로 야기되는 어떤 강렬함을 다시 재분배하는, 내재성의 장을8) 서정적 내면세계를 담아내는 용기로 전용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풀들의 연속, 이를 따라 물길처럼 굽어가는 존재의 함성, 그러나 이내 가로막히고 배반당한 그네들의 잠재성, 이것들에 대한 서정적인 응시는 전에 말했던 “기묘한 조우”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 서두부터 나는 이를 함정이라 부를 것이다.

   2)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실재’와 동일한 위상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실재 개념을 소설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다.

   3) 크립키의 고정지시어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고유명사의 의미란 무엇인가? 러셀은 확정기술명제들을 통해, 이를 설명하려 하였다. 가령 에베레스트 산이라는 고유명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다”라는 확정기술을 내포하고 있다는 식으로. 하지만 크립키가 보기에 이는 불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에베레스트 산의 고유성은 가령 또 다른 “가능세계”, 그보다 더 높은 산이 존재하는 다른 가상 세계에 위치시켜놓더라도 그것의 고유성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크립키는 고로 고유명사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애초의 ‘지시행위’에서 고유어의 고유성을 설명하려 했지만, 이러한 대답이 언어학 내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바깥인지의 논쟁을 촉발함으로써, 사실상 언어의 자명한 경계 자체에 대한 의심의 계기를 던져주었다.

   4) 이것이 왜 굳이 환상소설과 유사한 설정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적 정당화로 기능한다. 이는 일종의 타협의 산물인데, 협소한 세계에 대해 내적인 의미지평과 장치들 그리고 사건의 차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만의 “내재성의 평면”을 창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더욱이나 오늘 날의 포스트모던한 혼종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그러한 지평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jxk160님에게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소박하게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만이 유일한 선택지로 보였을 것이다.

   5) <밤 너머에>, <왕의 행방>에도 어렴풋이 등장하지만, <날개의 피>의 결말은 이러한 함정 놓기의 압권에 속한다. 즉 말 그대로 작가는 우리를 위해서 함정을 파 놓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떠한 운명의 예정된 부조리나 네메시스(복수의 여신) 특유의 히스테리적인 스토킹도 없다. <날개의 피>의 결말의 압권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면, 시초적 행위의 사소한 결함에 기인해서, 흉측한 형상으로 일그러져버린 네드에 대한 배고픈 아이들의 반응을 보라. 아이들은 슬금슬금 다가가 네드에게 돋아난 날개를 뜯어먹길 희망하지만 결국 죄책감을 느끼고 저만치 가버린다. 배고픈 아이들의 모티프는 물론 <별>에도 등장하고, 좀 더 고상하게 지식에 배고픈 아이는 <밤 너머에>에도 존재하지만, <날개의 피>에 나오는, 네메시스의 희생자가 된 네드에게 반응하는 배고픈 아이들만큼 웃기고 명랑한 아이들도 없다.

   6) 루카치, <소설의 이론>

   7) 유머리스트의 영혼은 영혼이 그에게 삶을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순수한 정체성을 갈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머리스트는 단 하나의 진정한 삶의 근원과 세계를 지배하는 순수한 자아에 도달하기 위해 깨지기 쉬운 삶의 총체성의 모든 형식과 경계를 파괴해버린다. 물론 자아는 계속 존재하지만, 그것의 존재 역시 스스로가 만든 파편적 세계의 비실체성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주관성은 모든 것을 형상화하려고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세계의 한 부분만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루카치, 소설의 이론, 151p).

   8) 물론 나는 여기에서 들뢰즈를 염두에 두고 있다.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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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8.03.01 13:29 댓글 수정 삭제
    으음. 명쾌한 정리를 기대하고 있다가 실망... 내용 자체에 대한 감상이나 반박 댓글이 아니라 죄송합니다만.

    불만 1. 감상/비평란에 올라온 글과 꼭 연계해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이 비평은 'jxk160의 글은 쉽다'를 설명하는 글은 아니로군요.

    불만 2. 난무하는 전문(?) 용어와 관념어. 개인적인 기대와 이 글에 쓰인 용어들이 모두 꼭 그렇게 써야만 했는가에 의문이 듭니다. 보통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미의 오해를 피하고 개념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위해서일 텐데, 이 글에서는 오히려 넘치게 많은 사용으로 글의 전달력이 떨어진달까요. 그것도 명확한 정의가 의미 한계선조차 제시하지 않고서... 때문에 독자를 누구로 상정한 글인가 의문하게 됩니다.

    불만 3. 여기에 번역(그것도 이론서 번역)에 가까운 문장이 합쳐지면서 찬찬히 읽을 생각이 날아가 버려요.

    불만 4. 그 결과로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가의 글이 어렵다는 인상이 강화되는 역설적인 상황. 이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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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8.03.02 15:26 댓글 수정 삭제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리며.

    1. 우선 저는 제 글이 그렇게 명쾌하고 유기적으로 정리된 글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은 없습니다.

    2. 그러나, 저에게서 "jxk님의 글은 쉽다"라는 논지만을 단선적으로만 받아들였다면, 냉정하게 그건 잘못된 기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렵지 않다"라는 말을 "쉽다"라고 받아들이는 언어의 애매성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독자 입장에서 "어렵다"라는 것은 비평에 있어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제 비평/감상란에 올렸던 내용의 요지입니다.

    3. Common sense를 지닌 독자 입장에서 작품이 "어렵다"라고 탄식하는 관성에서 벗어나는 게 비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사유"가 필요하다고 말했었죠. 적어도 저는 그러한 취지에서 완전히 탈선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읽지 않으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작가 본인에게도 죄송스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jxk님의 소설을 대중적으로 홍보할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왜 이 소설이 장르적 쾌감을 야기하는가라는 명쾌한 설명을 기대하셨다면 애초에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4. 3.번의 맥락에서, jxk님의 소설은 어렵습니다만, 그건 독서 와중에서 "사유하도록" 강제받지 않는 독자층들, 즉 일반독자 입장에서 독서와중의 여흥과 오락을 더 잘 즐기도록 유도하는 취지는 제가 배려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jxk님의 소설은 우리가 쉽게 즐길 수 있는 "코드"에 애초부터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죠. 제가 그 소설이 장르소설이나 환타지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도 애초에 그런 취지로 드린 말이고요.

    5. 그래서 비평 목표는, 기존의 코드로 작품이 읽히지 않는다면, 다른 코드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유"가 되는 거고, "철학"의 경계에 닿는 것이죠. 그게 비평의 가장 창조적인 측면이겠죠. 비록 그게 작품이 쓰여지기를 기다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게 쉽운 일은 아니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6.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저는 "독서 방법"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제 방법이 실패했다면, 다른 길을 찾으십시요. 다른 사유를 하기 바랍니다. 저는 제 비평이 누군가를 가르치려드는 것 보다, 그런 시도를 고무하는 것에 더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p.s. 그렇다고 저는 대중적인 오락거리로서 소설을 읽는 행위에 대해 평가절하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비평 본연과 무관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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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8.03.02 22:01 댓글 수정 삭제
    1. 예. 맞아요. '쉽다'와 '어렵지 않다'는 다르지요. 저도 저 글을 쓰고 나서 감상/비평란에 다시 갔다가 실수를 깨달았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2. 그러나 단선적으로 비평에서 '이 사람 글은 사실 쉬워! 왜냐? 이거야!' 뭐 이런 걸 기대해서 실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장르적 쾌감에 대한 설명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제가 불만을 말하는 방식이 그렇게 찌질해 보이던가요?(웃음) 박가분님이 리뷰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가 기대한 것은 말씀하신 5번에 해당하는 코드입니다. 이것도 수동적이라면 수동적인 태도이겠습니다만... 처음부터 제가 단 불만은 비평 내용에서 살짝 비껴나 있었으니, 지금도 일단 그 부분은 건너뛰겠습니다.

    3. 말씀하신 3, 4번은 이해합니다. (모두 동의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만)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해도 비평 또한 독자를 상정한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제 불만의 핵심은 원래 제가 단 댓글의 2, 3번이었습니다. 때문에, 읽으면서 이 글의 목적과 핵심을 잘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댓글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앞부분에 들어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집니다...

    4. 다시 반복하지만 그러나 제 불만의 핵심은 2, 3번이었어요.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말해두지만 저는 jxk160님의 글에 대해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아니고(설명하기 어려울 뿐이지요), 따라서 지금 이 비평글에 대해서 털어놓은 불만은 이제까지 jxk160님의 글을 두고 나왔던 어렵다는 불평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저는 명쾌하고 유기적인 글을 읽고 싶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으시다고 하니 저도 다시 할 말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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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8.03.02 22:02 댓글 수정 삭제
    으와. 그나저나 댓글 길게 쓰기 엄청 힘드네요;; 아래 위 오가면서 쓰기는 더 힘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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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8.03.03 05:48 댓글 수정 삭제
    아익후^^;; 2, 3번이었군요;;; 평에 대한 불만 잘 알겠습니다. 다음 번에 꼭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적어도 취지를 이해해주신 가운데 드린 따끔한 충고이니,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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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8.03.03 06:01 댓글 수정 삭제
    다음 번에는 "내용"을 가지고서도 생각지 못했던 맹점을 지적해주는 기회가 온다면 정말 영광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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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3.03 13:15 댓글 수정 삭제
    비평에 토론이 이어지는 현상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자가 뭔가 자기 관점이 있는 글을 썼다는 의미이고, 그런 글이 더 재미있으니까요. 저는 박가분님의 논지에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특히 “jxk님 소설 비평에 대한 불만, 혹은 비평의 관성에 대하여”의 논지에는 동의하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토론이 가능한 글을 주셨으니 토론을 하는 게 예의! 몇 가지 짚어봅니다.

    우선, 이번에 박가분님이 쓰신 글 두 편의 전제 두 가지에 대한 생각입니다. 박가분님은 기존에 “감상평”을 쓴 분들이,

    1. 글자 그대로 읽는 방법을 시도해 보지 않았다.
    2. 있지도 않은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 헤매느라 잘못 읽었다.

    고 가정하고 그 경향을 반박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이 두 가지 전제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jxk160님의 글을 “축자적(逐字的)”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건 독창적인 발견은 아닙니다. 심지어 작가 본인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고, 축적된 몇 편의 감상평을 보시면 알겠지만 “읽히지 않는다”는 말은 박가분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단순하게 읽기 싫어서 짜증을 부리다가 도출된 결론으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보려는 시도도 그런 시도 중 하나가 될지언정 모두가 거기에 매달려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읽히지 않았다는 건 축자적으로도 상징을 찾는 방식으로도 또는 제3, 제4의 방법으로도 결국 쉽게 읽히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가 있는데, 박가분님의 글에는 기존의 “감상평”들이 이런 식의 과정을 거쳐서 나왔을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기존 평자들이 잘 안 읽힌다는 불만에도 불구하고 jxk160의 글에 대한 리뷰를 썼던 이유는, ‘안 읽히는데 뭔가 읽히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을 그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이해하셨다면 오해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 “jxk님 소설 비평에 대한 불만, 혹은 비평의 관성에 대하여”는 본편 “<밤 너머에>를 읽고”에 기존의 읽기 방식과는 다른 박가분님만의 발견이 나오리라는 기대를 하게 합니다. 하지만 “<밤 너머에>를 읽고”는 “축자적”으로 읽어낸 <밤 너머에>를 성공적으로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박가분님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표현을 써서, 기존 평자들이 벌거벗고 있는 jxk160님의 글을 보고 뭔가 입고 있는 것처럼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박가분님의 평은 벌거벗은 jxk160을 그린 게 아니라 오히려 이때까지 나왔던 평들보다 훨씬 더 많은 명품 메이커로 치장된 화려한 옷이 나오고 있습니다. “화이트칼라의 세계설립”이 jxk160의 글에서 “축자적으로” 읽히다니요!
    그리고는 <날개의 피>의 나체가 좌중이 웃음을 터뜨릴 내용이라고 하시는데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큽니다. 그리고 후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박가분님이 jxk160의 나체에 대한 묘사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왜 그렇게 코믹하게 읽히는지 이해도 안 됩니다. 제가 동의를 못했다고 그게 이 비평의 결정적인 문제가 될 수 없지만, 동의를 하든 반대를 하든 최소한 입장을 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내용이 본문에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 다음, 위와 같은 이유로 현학적인 표현의 문제는 사소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글이 주관적인 감상이었다면 박가분님의 글을 "common sense" 수준으로 옮겨서 읽어낼 책임이 독자들에게 있겠지만, 이 글이 평자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분리해 낸 비평이라면 본인의 입장이 객관성을 띨 수 있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하는 쪽은 비평자입니다. 모든 비평이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박가분님의 이번 글에는 특별히 그런 의무가 더 강하게 생겨났습니다. “jxk님 소설 비평에 대한 불만, 혹은 비평의 관성에 대하여”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편에서는 독자를 보편적인 언어로 진행되는 공론의 장에 초대하려는 의지가 부족합니다. 심지어 예고편보다 더 안 읽혔습니다.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논쟁을 촉발시킨 다음에 올라오게 되어 있던 글이 이렇게 모호하게 확장된 개념을 사용해서 쓰여져 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모호한 개념으로 쓰여진 글은 정교하게 반박할 수도, 검증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jxk님 소설 비평에 대한 불만, 혹은 비평의 관성에 대하여”에서 보여준 태도와 모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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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8.03.04 11:10 댓글 수정 삭제
    좋은 지적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축자적으로 읽는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미흠하게 글을 풀어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 관해 보다 명료하게 서술할 기회가 있기를 희망하는 거시고요. 다만 이 자리에서 해 드리고 싶은 말들을, 가령 "화이트 칼라의 세계 설립" 같은 문제들은 그리 어려운 논증의 과정을 따른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본문이 분명 어려웠음을 인정합니다. 화이트칼라는 제가 말씀드렸지만, 자신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주요 인물들은 (제가 분류한 작품 중 전자의 분류들) 글쓴이가 고안한 이런 저런 제도 속에서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물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링카라는 거울-이미지의 물적 존재가 그것이거나 혹은 어떤 제도 속에서 상징적 위치를 가지고 있지요. 화이트 칼라라는 것은 그렇게 해명했스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계-설립적 사건을 수행하고 거기에 몸통을 부여하는 희생제의들을 치룬다는 이야기들은 "작품에서 매우 자명하게 드러난다"고, 제가 생각했기 때문에, 솔직히 이걸 파악 못할 수 있다는 걸 배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돌이켜보면, <밤 너머에>, <별>, <날개의 피>, <왕의 행방>에서와 같은 작품에서 각각의 상이한 배경마다, "신들의 흥망성쇠", "종족의 재탄생", "언어의 창조", "도시국가의 건설"이라는 사건들이 터져나오는 건 당연히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들은 항사 기존의 삶의 방식들을 망각으로 빠뜨리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여기에 대해 제가 "세계설립"이라는 말을 쓴 게 너무 과도한 이름 붙이기였나봅니다.

    또한 제가 글을 "축자적으로" 읽어야한다는 말 역시 해명이 안 된 건 아닙니다. 어떤 장르문학에서는 "세계관"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제가 말했듯이, 온갖 세상의 지식들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배치함으로써 독자에게 현실속의 시간과 질적으로 다른 체험을 선사하는 데 그 기능이 있습니다. 이걸 읽으려면 작품 전체를 어떤 유비-관계 속에서 파악해야죠. 제 말은 그 과정에 jxk님의 소설에는 불필요할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게 그렇게 현학적인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배명훈님께서는 제 글이 어렵다는 것으로 "축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논제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과연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 말의 "축자성"은 상기한 변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라는 질문에 대답에 대해 저는 맨 위에서 차라리 읽는 방법을 제안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소설에는 세계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작품별로 상이한 세계들이 나오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왠지 임시변통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이전의 삶의 방식을 깨뜨리고 서립된) 세계들은, <왕의 행방>이나, <날개의 피>에서처럼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장르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라면, 톨킨처럼 온갖 현실 속의 그럴듯한 지식과 신화 그리고 구비전승을 짜집기 하기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건너뜁니다. 그래서 두 작품에서 모두 위태위태하게 유지되던 세계가 그토록 어이 없게 파괴되거나 희화화되는 것입니다.

    유머러스하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러한 세계의 연약함과 근거 없음은 우리에게 비장감을 주지 않습니다. 그게 읽고 납득이 안된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그게 전복적이고 상식적인 것입니다. 더 건강한 거죠. 그래서 첫째로 작품 속의 세계가 "장치"로 파악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기존의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에 대해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고요. 저 혼자 재밌게 되어버렸다면 굉장히 무안해지는 군요.

    이로써 제 소통의 의지가 어느 저도 증명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흡하겠죠

    제 글이 필요 이상으로 어렵다는 지적은 잘 알겠지만, "축자적으로 읽어야 한다."와 "화이트 칼라의 세계설립"에 대한 제 생각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를 보다 명료하게 전달하는 노력에서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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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8.03.04 11:16 댓글 수정 삭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명을 하자면, 제 글이 제 사고의 리듬과 그대로 보폭을 맞추었나봅니다. 이런 글들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현실감을 되찾는 기분이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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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3.04 14:55 댓글 수정 삭제
    긴 답변 감사합니다. 감상란에 있는 또다른 예고 글도 읽었어요.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그래도 환영합니다. 박가분님 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그저 불만"은 아니랍니다. "환영"이지만, "일부 반론"이에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도록 좋은 글을 써 주신 건 물론 환영입니다.
    - 화이트칼라의 세계건설에 대한 박가분님의 설명을 안 읽고 쓴 게 아니었어요. 저의 반론의 요지는 "써 있는 그대로 읽었을 때" 그 해석이 당연히 나오느냐는 거였어요. 저는 박가분님과는 다른 지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다르게 해석했거든요.
    - 써 있는 그대로 읽어야 된다는 박가분님의 주장이 제가 예전에 리뷰에서 쓴 주장과 크게 다르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저는 다른 원형을 찾으려는 걸 포기하고 jxk160의 글 자체를 원형으로 읽어야 한다고 썼는데, 같은 생각의 다른 표현 아닌지.
    - jxk님의 다른 글에는, 그 원형을 언어로 포착해 주는 것이 우리 다음 과제라고 리플을 달았는데, 그걸 박가분님께서 하신다니 지켜볼 수밖에요.
    무엇보다 박가분님의 활약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이런 토론의 한가운데 서 있는 <밤 너머에>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다른 분들의 글도 이렇게 깊이있게 다루어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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