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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blog.aladdin.co.kr/twinpix revinchu@empal.com)



[폭력 없는 미래: 비폭력이 살길이다]는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이다. 이 많은 분량 속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어쩌면 조금은 낯선 단어일지도 모르는 ‘비폭력’이라는 단어다. 우리는 지금 ‘비폭력’이라는 단어보다 ‘폭력’이라는 단어를 훨씬 많이 들어보는 사회에 살고 있다. 21세기에 와서도 전쟁은 사라지지 않고, 분쟁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테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양성 간의 폭력, 인종 간의 폭력, 이념 간의 폭력 등 우리 주위에 매체가 알리는 소식은 온통 폭력 투성이다. 하지만, 과연 폭력은 당연한 것일까. 그건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런 모든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폭력’은 결코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그것은 잘못된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비폭력’은 얼마든지 훈련 가능한 것이며 수많은 분쟁들을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은 ‘비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라는 문장. 어린 아이가 잘못을 해놓고는 조숙하게 저런 문장을 말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었지만, 유난히 저 문장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종종 써먹을만하다 여기고 가슴 깊이 새겨둔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간에 저 문장은 진리가 아닐 수 없으며, 지금까지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머릿속에 깊이 박힌 것이다. 때론 폭력이 필요하다고? 전쟁 같은 극한의 상황은 폭력이 불가피하다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 이 책을 읽어보라. [폭력 없는 미래]. 이 책에서는 다양한 실제 사례를 제시하면서 그 모든 의견들을 부정하고 있다. 잘못된 고정관념을 없애기에는 이만큼 좋은 책이 없을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은 미국 쇠고기 문제로 촛불집회가 한창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과거처럼 시위가 폭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마음이 든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었다. 시민들이 이제는 더 이상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시위도 평화롭게 진행한다. 비폭력. 사람들이 외치는 비폭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과거 1979년 6. 10 민주 운동 장면을 보았다. 놀랍게도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지금처럼 “비폭력!”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전경들에게 꽃을 꽂아주는 것도 같았고, 전경 무리가 떨어져 나가자 폭력을 가하지 않고 다시 무리에 합류하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거기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어떤 숭고한 감정을 느꼈다. 그 오래전에도 지금과 똑같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국, 그때도 ‘비폭력’이라는 단어를 외쳤구나.
    이 책을 읽으면 내가 느낀 그 감정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그 감정을 무어라 부르는지. 그 감정이 만들어낸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지금까지 세상을 얼마나 많이 바꿔왔는지 알 수 있다. 폭력이 없는 시위에서 당신도 어떤 감동을 느꼈다면, 이 책을 펼치면 동시대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례들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체계적으로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한다. 바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 폭력을 선택하는가? 그리고 폭력 대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은 비폭력에 대해서 설명함은 물론이고 이 사회에서 인류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많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폭력 장면으로 범벅이 된” 텔레비전을 끈다거나, 명상을 하며 비폭력을 위한 훈련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이 책은 어떤 사건에 대한 분노가 또 다른 폭력을 만드는 것을 경계한다. 한층 더 떨어진 시점에서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사건의 본질을 바라보게 만든다. 한 순간에 분노로 또다시 폭력을 만드는 게 아니라, 폭력의 근원을 없애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길 권하고 있는 것이다. 서문에서 작가는 순진한 몽상가 취급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슬프다고 해서 복수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라는 모토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들은 간혹 9ㆍ11 사태에서 내가 가족을 잃었어도 그렇게 말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틀렸다.
   이 책의 서문을 사촌인 칙에게 바친다. 칙은 자신의 아내인 실비카가 9ㆍ11 사태가 있던 날 밤 직장이 있던 세계무역센터 1층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뒤에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이어 사망했다.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두레, 18면)


   이 책에서 특히 주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은 바로 간디이다. 이 책은 간디가 이룬 업적들과 그의 사상들이 적절한 예시들로 다뤄지면서 비폭력 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간디는 인류 역사상 비폭력 운동을 가장 크게 전개한 인물이었고, 지금껏 그 상징이 되어왔다. 이 책은 그가 행한 업적과 사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비폭력 운동에 어떤 기틀을 세웠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다.

   분을 삭이며 하룻밤을 지낸 간디는 자신이 겪은 모욕을 개인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첫 번째 실마리를 찾았다. 오히려 간디는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으로부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비인간성, 인종차별주의의 추악함 등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서로에게 이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번째 실마리는 인간 본성에 관한 간디의 믿음이었다. 이미 그때 간디는 사람들이 진실을 영원히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두레, 122~123면)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일종의 특이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언급하는 예시 중 하나는 1964년 앨라배마 주의 버밍햄에서 있던 시위 행진이다. 지금 촛불집회처럼 시위 행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끄는 예시 중 하나였다.

   얼마 후 우리는 어떤 지도자의 말대로 “영혼이 도취된” 상태에 이르렀다. ……경찰과 소방대원도 이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조금씩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나도 나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그리고 일어나서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린 돌아서지 않는다. 잘못한 것도 없다. 원하는 것은 자유뿐이다. 이러고 있는 당신들의 기분은 어떤가?” 흑인들은 다시 행진을 시작했고 불 코너(악명 높은 인종차별주의 경찰서장)는 이렇게 외쳤다. “물대포 쏴!” 소방대원들은 꿈쩍도 안 했다. 서장은 한 번 더 같은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소방대원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아무튼 흑인들은 저지선을 넘어갔다.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두레, 125면)


   이 다음에 책에서는 정치적은 힘은 흔히 총구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이 사건을 보면 총은 모두 경찰 손에 있었지만 힘은 모두 시위대에 있었다고 말한다. 즉, 이런 예시들이 한결 같이 비폭력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갖고 있으며, 이 힘이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듯 다양한 사례를 통해 비폭력의 효과를 독자에게 확실히 알리고 있다. 본문 안에서 글쓴이는 비폭력의 효과를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했다.

   비폭력은 가끔 “효과”가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항상 효과가 있다.
   반면 폭력은 가끔 “효과”가 있고 궁극적으로는 전혀 효과가 없다.


   그리고 6장 건설적 프로그램에서는 다양한 비폭력 단체들의 예를 들고 있다. 이걸 통해서 나는 현재 전세계에 비폭력 운동가들이 얼마나 많고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들을 행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폭력을 없애는 건 또 다른 폭력이 아니다. 그건 잠시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폭력을 더욱 늘리는 것이다. 사형 제도가 있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는 중요한 것은 그들을 징계하는 게 아니라 치유하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텔레비전 시청에 관한 부분도 여기 인용해본다.

  텔레비전은 항상 시청률에 매달린다. 그리고 어떤 사상적 기반에서 통속성이나 폭력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다. “귀사 프로그램의 폭력성 때문에 더 이상 귀사의 채널을 시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정중한 편지를, 이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광고주들을 ‘참조’로 하여 보내기만 해도 효과가 있다. 더 많이 보낼수록 효과는 더 커진다. 진실에 바탕을 둔 운동이라 해서 곧 성공을 거두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수그러들지도 않는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여러 매체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건설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효과가 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거부운동이 실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상당히 많다. 텔레비전 시청을 그만둔 가족은 서로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며,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이 훨씬 만족스럽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두레, 295면)


  이 책은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말에서도 폭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비유들이 지나치게 폭력적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사물을 인격화 하고 반대로 인간을 사물화해서 인간성을 상실시킨다는 것이다. 시민을 단지 물로 비유하고 게릴라를 물고기로 비유하는 것 등을 예시로 들면서 말이다. 미군이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게임을 주로 활용하는 것 역시 비슷한 문제점을 발생시킨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치 게임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앞에 교수님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가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 역시 텔레비전 같은 것을 주로 시청하면서 앞에 있는 교수가 실제 피부에 와닿는 거리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은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폭력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인간성이라는 진실은 철저히 거부된다는 점이다.

   많은 전쟁에 종군한 바 있는 크리스 헤지스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여기 관여하는 사람들을 모두 부패시킨다.” 임무를 방기한 혐의로 군법 회의에 회부된 막스 플라우만 중위는 판사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무질서로 질서를 낳을 수는 없다. 선을 얻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은 분명 미친 짓이다.”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두레, 385면)

   인간은 아직 정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여 지속적인 평화의 조건을 만들고 이를 제도화 하려는 노력을 해 본 적이 없다. 노먼 커즌즈가 말했던 것처럼 “비관주의가 되기에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 적다.” 20세기가 밝기 전까지 인간은 비폭력을 세계에 체계적으로 적용할 방법을 몰랐다. 아니면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간디가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살다 갔다. 구자라트의 여성들, 북서쪽 국경지대의 파탄 족, 많은 집단과 무수한 개인들이 삶과 죽음을 통해 이러한 힘이 얼마나 쓸모 있는 것인가 보여주었다. 이제 이 선구자들로부터 배울 때다. 그들의 노고와 고통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를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이렇다. 우리의 과제는 전쟁을 멈추는 것이라기보다는 비폭력을 시작하는 것이다.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두레, 395면)


   폭력은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고 보는 시점이다. 폭력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까지 피해를 끼치는 행동이며 궁극적으로 지구까지 피해를 입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폭력은 결코 유전적인 것이 아니며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훈련을 통해 비폭력을 유지할 수 있고 이 힘은 결국 폭력보다 더 많은 것을 이득으로 만든다. 폭력의 세계관은 “획성을 통한 분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파시즘의 극과 극을 이루는 생각은 헤갤이 명명한 “다양성 속의 통합”이라고 한다. 다양성 속의 통합은 모든 생명체 상호 간의 명령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각 생명체의 독특한 가치를 당연히 인정한다는 것이다. 다양성 속의 통합은 비폭력과 조화를 이룬다.

   세계 인구는 현재 60억이며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양성 속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 하나하나는 무한히 소중하다. 이 기본적인 생각이 오늘날 더 밝아지기는커녕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사형제도의 부활, 안락사, 물질주의, 끔찍한 인권 침해, 아이를 기르는 데 필요한 가족의 와해와 지원 시스템의 붕괴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의 이 기본적인 생각을 망치는 모습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오늘날 폭력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쓴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거쳐 비폭력 옹호자들에게는 생명은 신성하다는 것이 금언으로 되어 있다. 모든 생명의 합이 특정한 하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한의 합은 결국 무한이니까 말이다.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두레, 410-411면)

   마틴 루터 킹의 설교를 이렇게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든다. “비폭력이 틀렸다면 다양성 속의 통합이 틀렸다. 그러면 생명의 신성함이 틀렸고, 문명의 기반이 틀렸다.”
   지금 하는 것처럼 생명의 신성함을 포기한다면, 안락사와 낙태를 허용하고 “범죄자들”을 처형하면 사회가 안전해질 것이라는 편리한 망상을 허용한다면 우리는 문명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두레, 414면)


  이 책에서는 그동안 벌어진 비폭력 운동의 역사를 알 수 있고 거기에 명명된 다양한 명칭들을 알 수 있다. 또한,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비폭력’이 실체가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지금 자신도 작은 일 하나부터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덧붙이자면, 이 책을 널리 알리고 싶은 욕구가 든다. 이 책을 우리나라 국민 모두에게 읽힐 수는 없을까. 아니 전 세계 사람들 모두가 읽는다면 과연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그렇다면 정말 책 한 권이 세계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을 지금 적어도 이 리뷰를 읽는 사람이라도 꼭 한 번쯤 읽어보면 좋겠다고 바란다. 나아가서는 지금 촛불집회에 나서는 사람들과 전경들, 경찰청장과 국회의원들 그리고 대통령까지 읽기를 소망한다.
   물론 읽은 사람들은 허황된 점들이 많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생각이 도무지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인류가 나아갈 길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 미래에 인류가 버튼 몇 개를 누르고 자멸하는 미래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폭력’에 기대는 게 아니라 ‘비폭력’에 모든 걸 맡겨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폭력이 가지는 힘의 실체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고, 거기에 감동하고 감화될 수 있었다. 비폭력이 가지는 힘은 정녕 컸고 폭력에 맞서는 건 역시 비폭력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도 비폭력을 약간은 환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수많은 매체들에 영향을 받은 탓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사태는 일단 폭력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나 싶은 때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오로지 비폭력만이 살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천천히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세상을 바꾸는 힘은 궁극적으로 영원히 그 효과가 남을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폭력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는 완벽한 진화를 이룰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결국, 인간이 지향할 점은 비폭력이니까. 폭력과 비폭력을 나눌 때 결코 폭력이 더 나은 점은 단 하나도 없다. 미국에서는 수만 건의 총기 사건이 터지지만 총기가 아예 소지가 불법인 한국에서는 총기 사건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폭력은 힘들어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인간의 이상향이다.
   책의 마지막에 이야기한 것을 요약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그리고 ‘비폭력’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현재 촛불집회를 보며 한 번이라도 감동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은 비폭력이라는 단어를 몸 속 가득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줄 것이며 어쩌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 먼 훗날 이 책을 읽는 순간이 자기 인생의 전환기였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폭력 없는 미래는 내면에서부터 시작한다.

   * 대안 미디어를 활용하라(상업적 미디어를 쓸 때는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
   * 스스로의 마음을 돌보라.
   *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그리고 개인으로서 친근하게 대하라.
   * 비폭력을 학습하라.
   * 평화를 구축하라.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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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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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06.28 15:02 댓글 수정 삭제
    레몬에이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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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8.07.01 18:57 댓글 수정 삭제
    이런 책이 있었군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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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07.02 01:39 댓글 수정 삭제
    yunn/ 앗,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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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7.09 16:48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조용한 걸 좋아해서 평화를 좋아하는데요, 국제정치학자로서는 현실주의자랍니다. 에휴. 머나먼 길인 것 같아요.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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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07.10 13:48 댓글 수정 삭제
    음, 머나먼 길이죠. 이상향 같은, 뭐 아무튼 좋은 쪽으로 추구를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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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7.10 17:41 댓글 수정 삭제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도, 영원한 평화란 끝없이 싸워본 뒤에나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지성의 최고 단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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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플랙 08.07.18 13:32 댓글 수정 삭제
    그런데 "어떤 지도자의 말"에 의해 세뇌되어 “영혼이 도취된” 사람들이 저 소방수들과 "저지선을 넘어"서서 권력자에게 가면 과연 뭘 할까요? 꽃 선물? 무언의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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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07.20 23:18 댓글 수정 삭제
    블랙플랙/ 저 인용한 글 전에 상황은 사람들이 장애를 만나자 무릎을 꿇고 기도한 상황이었고요. 권력자에게 가진 않았을 테고, 지금 촛불집회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신부님들이 시국 미사를 드리면서 청와대로 가지 않고 다시 시청광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올바른 비폭력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로 가는 것조차 무언의 폭력이라고 볼 수 있고, 사실 어떤 면에서는 그걸 기점으로 폭력이 많아진 양상이 있기도 하죠. 신부님들이 강력하게 비폭력을 주장하면서 촛불집회를 안정적으로 이끈 것처럼 진정한 비폭력은 권력자를 향해 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무언의 압박이나 꽃이나 일단 현재 권력자는 보고 듣지도 않는 상태이기도 하고요. 어떤 퍼포먼스와 같이 뜻을 담고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격렬한 폭력을 오히려 만들어내는 원흉이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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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 Wray 08.07.22 02:21 댓글 수정 삭제
    폭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이번 촛불 사태의 경우만 보더라도, 플래그 카드에 적힌 폭언을 통한 언어 폭력, 경찰과 일부 '의견이 다른' 시민들을 향한 신체적 폭력, 일부 '의견이 다른' 언론사를 향한 테러 등이 좋은 예가 되겠네요. 여담이지만, 그렇게도 '톨레랑스'를 외치며 '다른 의견의 수용' 을 말하던 이들이 사태의 주체가 되어 주도권을 잡자 어찌 그리도 삽시간에 표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잔인하게 공격했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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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07.22 09:16 댓글 수정 삭제
    네, 그래서 안타까운 일이죠.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수라도 한 두사람만 반대 의견을 가지고 행동하면 끝이거든요. 신부님들이 시국 미사를 드릴 때, 가두행진을 할 때 두 세사람이 어제처럼 종로에서 길 막고 시위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하더군요. 가까스로 사람들이 신부님들을 따르자고 갔어도 그 사람은 자기만이라도 있겠다며 가고 그러던데, 나중에 보니까 또 광장으로 돌아와서는 제가 들고 있던 비폭력 플랜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가고 그러던. 아무튼 워낙 다양한 사람들, 비폭력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충돌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어떤 주체가 없기 때문에 그걸 통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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