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cybragon@naver.com[누군가를 만났어]는 배명훈, 김보영, 박애진의 합동 단편집이다. 세 작가는 글의 분위기도 지향점도 각기 다른데, 아무래도 각자의 개성이 강렬한 만큼, 한 사람씩의 단편집으로 따로 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셋을 두루 보는 것도 작가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신을 유지해 가면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작가 별로 책을 따로 모으는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좀 애매한 물건이 될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수 많은 작가가 한두 편씩 싣는 일반 단편집과는 달리 세 작가가 여러 작품을 실은 책이므로, 작가 별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하자.

배명훈의 작품들이 거의 그렇듯, 여기 실린 글들도 작가의 특성을 강렬하게 뿜어내고 있다. 기발한 발상에 동결 건조한 해학을 곁들이고, 어딘가 모르게 대학 연구실의 고리타분한 냄새가 폴폴 풍기는 배명훈의 세계. 그래도 이번엔 하얀 가운 분위기가 덜 나는 작품도 꽤 있는데, {이웃집 신화}나 {임대전투기}가 그것인데, 그 대신이라고나 해야 할지, 딱 그 빈 부분만큼 섹스 코드가 들어가 있다. 어차피 여기에도 동결 건조된 해학이 잘 버무러져 있어 야하다기보다는 웃기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물론 그다운 참신한 아이디어는 여기서도 결코 녹슬지 않고 반짝거린다.
한편 {철거인} 같은 경우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는 좀 다르고 오히려 사소설에 가까운 느낌이다. 유머도 많지 않고, 언뜻 순수 문학 쪽 느낌도 나는, 배명훈 표 향신료가 살짝 적게 들어간 대신 좀 더 차분해진 듯한 글.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특히 이런 글을 보면 그의 전공이 의심스러워진다. 어찌하여 외교학과 출신이 이리도 공돌이적인 내면을 가지고 있을까. 이건 결코 ‘친구에게 들어서’ 아는, 취재로 습득한 지식이 아니다. 그의 삶이며 정신 에 녹아 든 영혼의 일부다. 그런 nerd의 본능을 마음 한 구석에 들여놓은 채, 늘 더 큰 세상을 바라보며 균형을 잃지 않는 그의 작품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누군가를 만났어}는 발상은 말할 것도 없고 구조적으로도 훌륭하지만, 그 모든 것이 도달해가는 목적지가 살짝 어긋난 것 같아 아쉽다. 결말 부분에서 이런저런 묘사를 자세히 하기보다는 짧고 선명하게 보여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355서가}는 배명훈의 글에서 가끔씩 내비치는 광기가 살짝 드러난 작품이다. 그의 글들은 대체로 안정적이고 쾌활하지만, 가끔 불안한 광기가 안전선 저 밑에서 넘실거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작품 역시 그 광기가 수위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해학으로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 잔잔하게 흐르다 맥없이 사라지곤 하는 광기를 끝 간 데 없이 몰아붙여서 파국으로 끝나는 글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

김보영의 단편은 단편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종의 기원}도 단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울 만큼 길지만, {미래로 가는 사람들} 시리즈는 4개가 연작 단편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 사실상 하나의 작품이고, 따로 떨어뜨려서는 오히려 제대로 된 감상이 어렵다. 제목조차도 각각 起, 承, 轉, 結로 네 글이 합쳐져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 중 처음에 해당하는 起는 제대로 된 결말도 있고 해서 독립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아예 순서대로 읽을 것을 전제로 쓰여져 있고, 또 그렇게 읽어야만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김보영은 아마도 세 사람 중 가장 미국적 SF의 느낌이 많이 나는 작가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A.C. 클라크와 비슷한 향취를 가지기도 했지만, 주인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조금 궤를 달리한다. 특히 ‘미래로 가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인간 같지 않을 만큼 관조적이고 현명하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동양적 초영웅이며, 글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 이상으로 주인공 자체도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마치 모노크롬으로 펼쳐진 A.C.C.의 공간을 선명한 광휘를 가진 초월자가 이리저리 잡아당기고 다독여 조형하는 듯한 느낌으로.
반면 수동적이고 천재적인 것은 동일하지만 자신감이 결여되고 소심한 {종의 기원}의 주인공은, 세계를 움직인다기보다는, 객관적으로 독자에게 보여주는 쪽에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너무 ‘인간적’인 세계관의 사소한 빈틈들이 여과 없이,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하게 부각되고, 몰입을 방해한다. 덕분에 어쩌면 참신하게 반짝였을지도 모르는 제재는 아시모프의 우울한 패러디 이상이 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박애진은 앞의 둘과는 궤를 달리하는, SF라기보다 환상 문학에 가까운 글을 추구한다. 그의 장점은 아귀가 맞는 정합성과 치밀함보다는 주제와 직결되는 선명한 이미지에 있는데, 여기 실린 단편들도 모두 그의 장점이 잘 드러나는 것들이다.
다만 {선물}의 남자 주인공은 거의 1인칭에 가까운 시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감 가는 자아라기보다 객관화된 ‘취재 대상’으로만 보여지기에 아쉽다. 적어도 모형에 취미를 두고 어린 시절 형에게 죽어라 두들겨 맞던 내 입장에선 그렇다. 이 부분은 나도 모르게 공감이 가는 배명훈의 공돌이들과는 대조적인데, 어쩌면 이것은 작가의 필력이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내가 남자고, 오랫동안 내 안에 닫힌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배명훈이 그리는 여성이 여자들에게 어떻게 보일 지는 짐작도 가지 않으니.
{신체의 조합}은 박애진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만큼 여기저기 많이 소개된 글인데, 그 섬찟할 만큼 선명한 이미지의 나열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딘가 불편한, 그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이 느껴지는 글.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이 분출되지 않은 채 지하 공동을 따라 처연하게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글이다.
{누가 나의 오리 벤쟈민 프랑크푸르트를 죽였나} 역시 선명한 이미지와 광적인 테마가 결합되어 있긴 하지만, {신체의 조합}만큼 강렬하지는 않고 적절한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다. 누군가가 30분 정도의 독립 영화로 만든다면 상당히 괜찮을듯한, 숨가쁜 생생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는 고독이라는 재제에서 {선물}과 맥이 닿아 있지만, 상당히 여성적인 시각으로 색다르게 풀어낸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상당히 광적이고 심리적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비교적 정적이고 평온한 감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일반적인 글의 평균에 비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결합}은 여성의 감성을 신체를 해부하듯 펼쳐 놓은 것 같은 글이다. 단일 개념인 여성의 다양하고 이율 배반적인 면들을 두 개로 분리함으로써, 여성이 여성을 객관화하여 보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상대적으로 남성은 평면적으로 그려지지만, 이 글의 주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리된 여성의 한쪽 시각만 볼 수 있는 것은 좀 아쉽다.

세 작가 모두 특색은 강렬하지만 상당한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고, 그들의 작품을 한 책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개성이 강한 세 작가를 모두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도 많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사람들에겐 오히려 구입을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호오를 떠나서, 이들이 개인 단편집을 펑펑 쏟아낼 수 있도록, 실력에 맞는 지명도를 얻게 되고 장르 문학 시장 여건도 좋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 1
  • No Profile
    as 08.08.04 14:25 댓글 수정 삭제
    동결 건조된 해학,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분류 제목 날짜
소설 바벨의 도시 上, 정지원 2008.09.26
소설 이상한 존5 2008.08.29
소설 GOTH: 리스트 컷 사건2 2008.08.29
소설 가모우 저택 사건, 미야베 미유키1 2008.08.29
소설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덜 여문, 그러나 향기로운 과실4 2008.08.29
소설 바벨의 도시 上1 2008.08.29
소설 멀리 가는 이야기3 2008.08.29
소설 판타스틱 2008년 8월호8 2008.08.29
비소설 모크샤, 올더스 헉슬리 2008.08.29
비소설 똘레랑스1 2008.07.25
소설 다이디타운2 2008.07.25
소설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13 2008.07.25
소설 달과 아홉 냥2 2008.07.25
소설 [판타스틱] 15호 리뷰4 2008.07.25
소설 누군가를 만났어: 옴니버스, 혹은 합승 택시1 2008.07.25
소설 파우스트 vol. 4 2008.06.27
비소설 폭력 없는 미래: 비폭력이 살길이다11 2008.06.27
소설 월간 [판타스틱] 14호 리뷰9 2008.06.27
비소설 도살장1 2008.05.31
소설 화성의 프린세스2 2008.05.31
Prev 1 ...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