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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년입니다. 편집도 바뀌었고 연재작도 [실비와 브루노]를 빼고는 새로 시작하는군요. 언제나 그렇듯이 제 관심사는 소설이므로 일단 조성희의 {검은 실}부터 읽었습니다. 예전에 {고등어 아빠}를 수록한 적이 있는 작가라고요? 그렇다면 [판타스틱] 투고를 통해 지면을 얻게 된 기념적인 첫 작가인 것이군요. {검은 실}까지 벌써 두 번째 작품이 실린 것이니까 나름 앞으로의 행보도 주목되겠네요. 그런데 대체 이 소설은 장르가 무엇인가요.

살펴볼까요. 주인공의 직업은 탐정이지요.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는 곳은 고령화 문제를 앓고 있는 농촌입니다. 무엇보다 나름 한국적인 설정을 적절히 집어넣었어요. 사건을 일으킨다고 여겨지는 물귀신은 남자에게 버림받아 한을 품고 죽은 동네 처녀지요. 게다가 사건의 배후로 짐작되는 무속인 역시 너무도 친숙한 외양입니다. 주인공에게는 자신을 도와주는 조력자도 있고, 적절한 용기와 합리적인 판단력이 있습니다. 그가 의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귀신이 아니라 인간이지요. 그리고 이런 설정이 줄곧 일관성을 유지하게 되면 시리즈물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요.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사건의 외부로부터 방문하는 해결자 역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요. 애초부터 시리즈물로 이어갈 생각은 없었겠지요. 주인공은 그저 단발성 지닌 캐릭터로 끝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주인공의 확고한 세계관이 뒤틀리면서 문제가 됩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면서부터이지요.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독자가 주인공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면 주인공은 독자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열쇠와 같은 존재에서 그저 활극의 주인공으로 탈바꿈해 뛰어다니고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싸우는 주인공은 탐정이 아니라 액션히어로입니다. 사실 탐정이 활약하는 것도 썩 마뜩찮기 마련인데 총까지 등장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가서는 불과 연료를 이용해 폭발을 유도하지요.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헐리우드 액션영화의 클리셰일 뿐입니다.

한 작품을, 그것도 단편을 탐정물에서 좀비물로 장르를 전환시키려면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할까요. {검은 실}의 작가는 그런 복잡한 설득 과정 따위,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이 작품은 그것을 그저 소재주의로 전환시켜버리거든요. ‘연가시’라는 기생충의 존재는 끝까지 미스터리를 책임지지 못한 작가가 변명자료랍시고 내놓은 해결의 증거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또 다른 의문만 남길 뿐 해결책이 안 되지요. 누가 뭐래도 현재로서 인간은 ‘연가시’에 감염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이 메뚜기나 모기와 동일시되려면 반드시 이유가 필요하지요. 마지막에 주인공이 모두 연가시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었음을 깨닫는 장면은 너무나 궁색합니다.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하나요. 사실 이것은 스포일러 축에도 못 낍니다. 독자가 미리 알아두어야 나중에 덜 실망하게 되는 작품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 작품이 그렇습니다.

또 다른 한국작가 김탁환과 비교하면 두 사람의 역량은 눈에 띄게 비교됩니다. 그것은 아직 두 작품밖에 안 실어본 작가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탁환의 개화기 경쾌 잔혹극 {당신은 식인종}은 무엇보다 익숙한 시대배경을 무대로 삼습니다. 굳이 후편까지 읽지 않더라도 이 소설이 꽤나 잘 짜여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어요. 주지하다시피 김탁환은 자료조사에 능한 편이고, 특히 조선의 풍속에 강합니다. 개화기라는 공간 안에서도 식인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느 정도 장르를 구현하고 있고 활극으로서도 매력적입니다. 조선인 남성과 백인 여성을 커플로 점지해준 것은 꽤나 성공한 설정으로 읽힙니다. 조선 땅의 외국인들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기묘하고 낯선 존재들이지요. 그런데 떼로 모여 있으니까 풍자적으로도 보이는군요.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지 모르지만 일단 기대해볼 이유는 충분합니다.

허버트 조지 웰즈의 {데이비슨의 기이한 눈}은 거장은 짧은 소품을 써내도 역시 훌륭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비록 소설의 아이디어만 남아 전체적으로 떠돌고 있기는 하지만, 읽는 내내 부담 없고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소설들만 한동안 읽게 된다면 잠시 행복할 수도 있겠어요.

테드 창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누구나 기대하던 소설이었겠지요.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쉽게, [천일야화]에서 밤마다 앉아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를 듣던 샤라아르 왕의 기분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마르코 폴로가 지나온 도시의 이야기를 듣던 쿠빌라이 칸의 기분도 함께 느낄 수 있지요.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독자를 청자의 입장으로 전환시키면서 보다 편안한 위치를 누릴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독서라는 시각적인 강요에서 벗어나 비로소 일방적으로 청취 가능한 수용적인 태도를 가져다줍니다. 게다가 독자는 이제 왕이나 다름없습니다. 누구라도 즐겁지 않겠어요.

만일 이러한 구조가 조금이라도 뒤틀린다면 소설 자체가 달라집니다. 이런 소설에서는 화자의 어조가 매우 중요하거든요. 독자가 권력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면 화자의 어조에 따라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게 됩니다. 이야기 자체는 매우 우화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요. 체험을 겪는 것이 화자가 아니라 청자 자신이었다면 흔해빠진 옛날이야기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각 이야기를 비교할 수도 없었겠지요. 전체적으로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 높은 완성도를 띠는 요인은 이러한 청자와 화자의 위치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테드 창이에요.

한 달이나 기대했던 [황야의 길가메쉬]가 완결되었는데 사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것은 결국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지옥만 보여주고 끝나버렸거든요. 이토록 만족적인 세계관을 갖고도 이렇게 끝마치다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수많은 위인들이 함께 모였는데 어떠한 장관도 펼쳐내지 않았어요. 이런 소설은 인물들이 모여 점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어갈수록 긴장감을 유발하는 것 아니었나요. 소설 속의 로버트 하워드와 러브크래프트가 진정 이야기꾼이었다면 좀더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지도록 신경을 썼어야 해요. 그것이 두 사람의 소설 속 역할이었다고 비난한다면 제가 너무 속 좁은 사람이 되겠지요. 관두겠습니다.

낸시 크레스의 [스페인의 거지들] 1화가 연재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저는 거대한 수면욕구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레이사가 매우 부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강제적인 조작이 늘 그렇듯이 이 귀여운 아이는 반드시 큰 불행을 겪을 것 같군요. 때문에 앨리스의 역할이 매우 큰 변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권교정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창간 1주년을 맞이하고 나서야 연재 이전 에피소드를 소개해주는군요. 원래 이런 것은 재연재를 기념하는 첫 회에 지면을 마련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박형동의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소녀}는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었습니다. 이런 만화는 지나치게 일회성이 강해서 다시는 못 써먹을 것 같지 않나요.

늘 그렇지만 특집이나 기사에 대해서는 어떤 코멘트를 달아야 할 지 모르겠군요. 사실 [판타스틱]이 일주년을 맞이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입니다. 잡지가 들어 있던 박스는 항상 가방에 넣어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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