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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종 근접조우]는, ‘외계인’이란 소재로 쓰여진 15편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주제나 소재 별 선집은 아무래도 명확한 지향점이 없는 단편집보다 훨씬 읽기 쉽고 재미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독자가 이미 그 지향점에 대해 동의하고 공감하는 상태에서 읽기 때문이다. 막말로 외계인에 대해 티끌만큼도 관심 없는 독자가 이 책을 눈 여겨 볼 리 없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지향성으로 인한 이득을 제하고라도 좋은 글들이 많아서, 편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읽은 거울의 책 중 가장 재미있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나 싶다. 외계인이라는, 판타지 쪽에서는 약간 생소한 소재를 사용했던 것 치고는 좀 의외이기도 한데, 생각해보니 오히려 생소한 소재였기에 읽기에는 편했던 것 같다. 작가들이 필력을 자랑하며 휘달리지도, 구성을 마구 주무르며 기교를 과시하지도 않았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평이한, 좀 고전적인 느낌을 가진 글들이 되었고, 나같이 얄팍한 독자에게는 오히려 쉽고 재미있게 읽히게 되었다.

물론 소재가 취향에 맞았다거나, 작가들이 ‘자제’를 했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작품을 즐겁게 읽게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의 글들은, 외계인이라는, 너무 특징이 강해 자칫 뻔한 내용으로 흐를 것 같은 소재를 가지고, 무리 없이 능숙하게 ‘환상’을 발현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제의 전달력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잘 어우러졌고, 제재 또한 독특하고 다양하여, 전체적인 다양성과 조화에도 일조하고 있다. 소재 외에는 미리 짜고 맞추어 쓴 것도 아닐 텐데, 열 명이 넘는 작가들의 글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상승 효과를 내는 것은 놀랍다. 게다가 그 속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같은 작가가 쓴 글이라 해도, 다른 글에 의존적이거나 유사하지 않다. 썰렁한 유머와 아련한 연심, 고독한 침잠과 타인에 대한 열정이 각 작품마다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피어 있어, 흡사 산속 깊이 자리잡은 광대한 식물원의 야생초들을 모아놓은 온실에라도 온 듯한 느낌이다.

이런 장점들 외에도 특히나 주목할만한 것은, 이 책이 결코 SF가 아니지만, SF가 아닌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의 글들은, 기존의 장르 구분을 거침없이 무시하고 있다. 작가들은 그런 구분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본연의 ‘환상성’에 치중해서, 자신의 상념을 아름답고 선명하게 가다듬어 보일 뿐이다. 이는 초기의 환상 소설들이 가졌던, 모험과 공포와 활극과 환상과 합리성이 멋지게 어우러져 거침없이 일상을 벗어나던 그 모습과 닮았다. 그 후에 눈부신 최신 지식에 매료된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뭉텅이를 따로 떼어서 떨어져 나가고, 곧이어 톨킨 할아버지께서 ‘여기까지’라고 말뚝을 박아 둘 사이의 경계를 그어버리긴 했지만, 애초에 문학에서 과학과 환상은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음색을 다채롭게 해주는 밀월 관계였다. 그럼에도 지엽적인 재미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장르 문학을 소설에서 따로 떼 내고 거기서 다시 쓰릴러와 SF와 판타지로 잘게 쪼개 버렸다. 심지어 편가르기에 길들여진 독자들은 어떤 작품이 SF인지 판타지인지 시시콜콜히 따져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고, SF의 논리적 우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거나 판타지의 원형적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거나 하며 다투기까지 하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이제 SF는 환상을 잃고, 판타지는 자유를 잃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선 긋기에 구애 받지 않는다. 당당히 모든 제재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며, 환상 문학이 초기에 가졌던 활력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원류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전체적으로는 ‘화성 연대기’와도 닮았지만, 그 자유로운 상상력 외에 구체적으로 유사한 점은 없으며, 훨씬 현대적이고 감각적이다. 우리가 소설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환상 문학이라는 게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보여주는 작품집이라고 하겠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각 작품 서두의 작가 소개에, 본 작품 소개도 같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참여 작가가 많으니 작가 소개를 그때그때 작품 앞에 두는 것이야 매우 요긴하고 독자의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만, 그와 함께 앞으로 읽을 작품에 대한 단평, 심지어는 까발리기까지 일부 들어있는 것에는 아무래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이것은 거울 단편의 전통적인 편집 방식이자 오래된 단점이기도 했으나, 글 자체의 선도가 중요한 이 책에서 특히 더 잘 느껴진다. 아서 C. 클라크 선집에서는 각 단편마다 앞머리에 쓰여진 연유와 발표된 서적, 그 후의 이력 등에 대해 소개되어 있는데, 작품 자체에 대한 내용은 최대한 피하고, 정 소개가 부족하면 작가 자신의 하고 싶은 말 등으로 채워 넣고 있다. 앞으로 이런 편집 방식을 고려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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