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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의 독법

지금껏 써온 리뷰에서 최대한 그리고 의도적으로 배제해 온,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읽는 책의 범위가 점점 편협해진다는 느낌이 드는데, 취향이 굳어지는 문제도 있지만 오랫동안 장르소설만 읽다보니 최근에는 장르가 아닌 소설(이른바 주류문학, 순수문학 계열)을 읽고 즐기는 능력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보통’의 사람이 장르소설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인데, [Happy SF] 1호에서 김상훈이 칼럼을 통해 인용한 새뮤얼 딜레이니의 SF를 읽는 프로토콜과도 유사한 개념인 것 같다. 즉 장르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그 장르들이 가진 규칙(약속)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주류소설을 읽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전제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에 실린 장르소설에 대한 좌담을 보면 주류소설 역시 익숙한 규칙이 나오고 독자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소설의 장르화와 이를 의식 못하는 작가들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도 주인공은 늘 가난하고 우울하다든지 직업은 소설가이고 불륜을 저지른다든지 하는 내용이 많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보통 사람이 장르소설에 대해 가지는 편견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주류소설에 대한 편견을 간직한 채로 윤이형의 [셋을 위한 왈츠]를 읽게 되었다. 이 작품집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과 감수성 풍부한 독후감은 권말 해설을 비롯해 주류문단의 비평가와 ‘보통’의 독자들이 많이 해주리라 믿는다. 여기서는 장르소설만 읽어대는 인간이 주류문단에서 상을 받고 문예지에 발표한 소설들을 장르소설의 관점에서 논해보도록 하겠다. 독자의 권리인 오독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며, 작가 및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는 쉽게 보기 힘든 글을 보는 즐거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복거일, 백민석, 듀나, 박민규 정도를 제외하면 이른바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온 소설이 장르판에서 진지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를 감안하면 말이다.


2. 현실과 이상을 잇는 꼭짓점으로서의 환상

이 단편집은 표제작이기도 한 {셋을 위한 왈츠}가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를 품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고통/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환상(비현실/가상현실)이라는 수단에 의지하는 것으로, 종래의 수단(리얼리즘적 표현)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의 타계를 위해 가져온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골수 장르소설과는 다르지만 종종 섞이기도 하는, 세계적으로는 남미문학이 붐을 일으킨 매직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부류라 할 수 있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꿈/이상으로 향하는 직선상의 경로가 이루어질 수 없을 때 중간에 환상이라는 새로운 꼭짓점을 통해 삼각형을 그리며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게 된다. 수록작의 일부를 이러한 전제하에 좀 거칠게 도식화하면 이렇다.

현실/현재 - (비현실/환상/가상현실) - 꿈/이상/미래
빛나지 못하는 인생 - 불가사리와 병사들 - 고통의 수용
‘3’ 혐오증과 남매의 비극 - 왈츠(3을 싫어하는 이에게는 충분히 비현실이라 할 수 있는 음악) - 과거와 화해
다른 세계에서의 인간 - 게임(가상현실) - 게임 속의 삶에 만족
고독하며 무미한 삶 - DJ의 세계 - DJ로 다시 태어남
불만족스러운 육체와 인생 - 게임 속의 캐릭터와 자신만의 섬 - 남편과의 화해와 자신에 대한 애정의 회복
시인인 동생에 대한 애증 - 동생의 말을 빼앗음 - 동생과 새로운 관계의 시작

환상의 근본적 목적 중에 현실도피나 대리만족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집에서의 환상은 소망충족과 도피에 성공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말들이 내게로 걸어오다}에서 희주는 말을 잃었지만 기주는 동생의 말을 빼앗지 못한다. {검은 불가사리}의 주인공은 살인죄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이며, {안개의 섬} 주인공은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지언정 그 육체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그저 DJ 론리니스로 다시 태어난 강빛나와 게임 속에서 레벨 올리는 삶에 만족한 피의일요일만이 행복이나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인물들일 것 같다.

하지만 환상이 소망충족을 쉽게 이루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의 소재를 다루는 의식은 장르소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장르소설은 주로 독자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기여한다(배드엔딩이라도 최소한 카타르시스는 주려 한다). 하지만 독자의 영혼에 충격과 고통, 고뇌를 줄 수 있는 게 문학의 힘이며 매력이라고 믿는 한, 장르 독자라 해도 이 글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3. 개별 작품

* 검은 불가사리
장르소설 팬들에게도 비교적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 구조와 소재를 갖고 있으나 소포를 보낸 이와 이유, 살해의 과정 및 방법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르적 코드는 약간 모자란다.
눈의 불가해한 변이가 낳은 비극이라는 소재로도 김종일의 [몸]에는 그 비극이 주인의 의지와 육체마저 넘어서는 불가역성에 있다면 이 글은 주인공의 수용을 통한 내부적 극복과 외부적 상황의 괴리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포의 정체나 사형판결에 관련된 반전이 있었다면 오츠이치 풍의 다크 호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피의일요일
우선 [현대문학]에 이런 글이 실릴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보통 문예지는 투고를 받는 게 아니라 출판사에서 작가에게 청탁을 해서 싣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작가가 쓰는 글을 대부분 거절하지 못할 텐데, 그렇다면 누군가 지적한 대로 주류문단에 장르를 퍼뜨리려면 그들이 인정하는 정상적인 경로(신춘문예 등)로 내부로 진입한 후 장르를 쓰는 방법밖에 없을 것인가. 최근의 문단은 SF쪽에는 손을 내미는 눈치지만, 판타지 중에서도 하수로 취급되는 게임 판타지라는 소재로 문예지에 당당히 글을 실은 것이 재미있다. 하긴 신춘문예 등에 ‘WoW 팬픽’을 썼다며 글을 보내면 읽어주기나 할런지 궁금하다. 물론, 소재로 글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건 장르소설계의 오랜 금언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현대 인간의 수동성과 망아(忘我)를 꼬집었다”고 해석되는 모양이지만, 덜 냉소적이긴 해도 현실순응적인 태도가 듀나의 프로타고니스들을 닮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매트릭스], [트루먼 쇼] 등 가상현실에 갇힌 이들을 묘사한 영화의 경우도 이러한 가상현실에서 탈출하여 현실을 직시하는 이야기임을 생각해보면 게임에서의 안온함을 택하는 이 결말은 게임 판타지의 본령에 더 충실할지도 모른다. 온라인 게임을 소재로 현실도피를 다룬 작품이 문예지에 실리고 호평을 받는 건 여러모로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장르와 비장르 사이의 시야의 간극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필자가 WoW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이 글은 온라인 게임의 소재와 설정을 너무 쉽게 가져다 쓰고 있음이 보이고 ‘듀나스러운’ 결말도 그리 설득력 있게 와닿지는 않는다. 대여점에 쌓인 게임 판타지보다 나은 건 등단작가다운 세밀한 묘사 정도 뿐, 안에 담긴 감수성은 다를 바가 없다.

* 절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당시 문단에서 환상소설이라는 평을 받은 적이 있다(당시에도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할 수 없는?) 자살 도우미라는 직업 때문인데, ‘대신 절규해주는’ 이 직업에 대해 비슷한 평을 할지 궁금하다.
사립탐정이나 퇴마사 같은 직업도 (최소한 법적으로는) 없는 우리나라에서 절규인이라는 설정을 판타지로 받아들일 장르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므로, 퀴어소설의 관점에서 읽고 평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 말들이 내게로 걸어왔다
희주의 남편과의 관계에 복선과 반전을 넣었다면 추리적 요소가 강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기주와 희주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희주의 남편은 곁가지, 조역에 머문 듯 하다(개인적으로는 맥거핀이라고 생각한다).

* 안개의 섬
여담에 가까운 말이지만, 이데아론을 가장 소설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은 [앰버 연대기]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를 구현한 작품은 [유년기의 끝]일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조력자가 된 남편의 역할은 제프리 포드의 {창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마지막의 반응은 다르지만).

* 판도라의 여름
외형적으로 가장 장르소설에 가까운 글. 단순히 미래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과학적 소재가 소설의 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SF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소재가 과학적으로 엄밀하냐 여부는 일부 하드SF를 제외하면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퇴화에 가까운 상태인 인간의 페로몬을 해석해서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는 가설의 가능여부보다, 그것이 가능한 현실을 설득시키는 게 SF이기 때문이다.
의미도 쓰이는 방법도 다르지만, 환각이나 환청이 아닌 환취(幻臭)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사사파릴라 냄새}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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